[BOOK世通, 제주 읽기] 164. 테리 이글턴 외 3인 공저, ‘민족주의, 식민주의, 문학’, 김준환 옮김, 인간사랑, 2011.

테리 이글턴 외 3인 공저, ‘민족주의, 식민주의, 문학’, 김준환 옮김, 인간사랑, 2011. 출처=알라딘. 

1.

서재에 삐뚤빼뚤 꽂혀 있는 책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가 있다. 필요에 따라 구입한 책이 있는가 하면, 문학평론가의 직업을 구실 삼아 저자들이 보내온 책도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렇듯 어느 책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그 중 내 경우 자꾸만 눈에 밟히는 이론 서적이 있는데, 그것은 세 명의 마르크시스트 문예비평가들 각 한 편의 글을 묶은 비교적 얇은 책이다. 그들의 명성은 이 분야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테리 이글턴(영국), 프레드릭 제임슨(미국), 에드워드 사이드(팔레스타인계 미국)가 그들이다. 

이들이 함께 한 책의 표제가 뚜렷이 말해주듯, 이들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을 갖고 문학을 살펴본다. 사실, 이들의 문제의식이 새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문학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문제를 싫든 좋든 껴안을 수밖에 없다. 전근대의 문학이라면 모를까, 근대로 접어든 이후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응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두고 지나치게 거대담론 중심으로 문학을 이해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근대를 맞이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생기는 숱한 갈등의 도정에는 지극히 개인적 차원으로 생각되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도 숱한 타자들과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고, 그 관계를 작동시키는 힘의 역학은 근대 국민국가의 유무형의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에돌아갈 필요 없이 근대 국민국가의 안팎을 민족주의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이다. 게다가 각 국가들이 국제사회에서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관계를 유지하다가 정치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다른 국가에 대한 지배 권력을 행사하는 식민주의를 펼치기도 한다. 물론, 해당 국가와 지역에 따라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작동 메커니즘은 단순하지 않다. 

2.

《민족주의, 식민주의, 문학》은 이처럼 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쉽게 지나쳐서 곤란한 이들 사안을 문학 쪽에서 사유하도록 한다. 3인의 저자들은 자칫 이 사안이 관념적으로 난해하게 접근될 수 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일랜드(피지배자) 대 영국(지배자)’를 중심으로 각자의 구체적 입장을 전개한다. 

먼저, 이글턴은 서구사회에서 이른바 포스트마르크시즘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통 마르크시즘에 천착하고 있는 문예비평가로서 <민족주의: 아이러니와 참여>란 글에서 식민주의의 권력과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그 권력의 바탕이 되는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맑스주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특수한 사용가치를 드러나게 하려면 교환가치의 추상적인 보편적 평준화를 우회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소외된 논리 속으로 들어가 그 논리를 자체적으로 상충하게 만들어야 한다.”(56쪽)는 것을 역설한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비판은 맑스주의 같은 ‘내재적’ 비판”(57쪽)에 있는바, 식민주의 지배권력이 모든 것을 상품화함으로써 피식민지의 정치사회적 실재가 갖는 특수한 가치를 추상화 및 평준화하는 효과적인 통치에 대한 래디컬한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제국의 지배권력이 그의 식민주의를 한층 공고화하기 위해 마련한 “보편적인 추상적 평등”(56쪽)이 은폐하고 있는 식민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에 그 문제의식이 맞닿아 있다. 

이글턴의 이러한 비판은 제임슨의 맥락에 따르면, 제국의 식민주의 지배권력이 모더니즘이란 미학으로 구체화되고 있음을 직시한다. 제임슨은 “자본주의가 지닌 특유의 제국주의적 역할을 의미하는 것”(79쪽)으로 모더니즘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제국주의 문제가 재구성된 시기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우리 시대—즉 다국적 자본주의 및 거대한 초국적 기업들과 더불어 나타난 신식민주의 시대이며 탈식민화의 시대”(81쪽)임을 또렷이 응시한다. 그런데 제임슨의 이 같은 주장에서 혹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모더니즘이야말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서구의 근대문명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현실을 목도하는 가운데 서구의 근대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의 역사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는 문예사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제임슨이 논파한 제국주의적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모더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아닌가. 이 같은 문제제기는 제임슨이 이해하고 있는 모더니즘에 대한 것에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임슨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모더니즘과 제국주의’의 관계다. 설령, 모더니즘이 서구의 근대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의 측면에서 이해된다고 하자. 문제는 그러한 자기비판이 서구의 근대 안쪽에서만 행해지는 그래서 서구가 창안해낸 근대의 병폐를 응시하고 치유하는 것에만 자족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자기비판을 수행하는 모더니즘이 얼마나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새 질서를 창조해내는, 말 그대로 ‘대안’을 생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도리어 서구의 근대를 기형적으로 발전시킨 또 다른 제국주의적 근대와 식민주의를 파생하는 역할을 맡는 모더니즘으로 전락할 뿐이다. 따라서 제임슨은 영국의 런던에서와 같은 제국의 심장부에서 팽배한 모더니즘, 그리고 그러한 모더니즘을 모방하고 이식한 제국의 식민주의류의 모더니즘보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처럼 제국의 모더니즘이 갖는 맹점을 뒤틀고 풍자하고 비판하면서 제국의 모더니즘을 부정하고 균열을 내는 피식민지의 이른바 제3세계 모더니즘을 주목한다. 

사실, 이글턴과 제임슨의 글을 읽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해당 분야의 전문적 지식과 공부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이유도 있되,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사이드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이드의 글이 상대적으로 이글턴과 제임슨의 것보다 이해하기 쉽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이글턴과 제임슨이 구미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구미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공부했다는 전기적 사실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것을 부연하면, 이글턴과 제임슨이 비록 마르크시즘 문예비평가로서 제국의 식민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적 성찰을 수행하고 있지만, 제국의 심장부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공부해온 그들은 제국의 안쪽에서 구조화된 제국의 삶에 밀착해 있으므로 무엇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부가 지닌 복잡한 메커니즘 속에서 발달한 글의 생리 또한 자연스레 그러한 복잡성을 띨 수밖에 없을 터이다. 따라서 이글턴과 제임슨의 글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처럼 제국의 중심부가 지닌 복잡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사이드의 경우 그의 조국 팔레스타인이 서구 제국의 식민주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선명한 목적을 지녀왔기에, 그의 글 자체가 추구하는 해방의 성격은 그 선명성과 투쟁성으로 인해 독자를 이해시키는 데 힘이 덜 들어간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3인 모두 ‘탈식민 해방’에 대한 이론적 실천을 수행하고 있지만, 사이드처럼 태생적으로 피식민지가 겪는 억압을 생활 경험으로 체화한 이론가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강구하는 이론과 그 실천은 그에 걸맞는 글의 생리를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사이드의 <예이츠와 탈식민화>에서는 예이츠를 영국의 시인으로 호명하는 게 아니라 아일랜드의 시인으로 명확히 인식하면서, 예이츠 문학이 지닌 탈식민의 문제의식을 아주 명료히 분석한다. 그것은 예이츠의 문학이 아일랜드 고유의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되, 그 민족주의가 아일랜드의 토착주의로 떨어지지 않고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이드는 “민족주의적 독립이 아니라 해방—파농의 말을 빌리자면 본질상 민족의식을 넘어서는 사회의식의 변혁을 수반하는 해방—이 새로운 대안”(139쪽)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3.

어떤 이론 서적이든지 이론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다른 독서보다 수월치 않다. 때로는 해당 이론서를 오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를 병행해야 하듯, 현실이 희부윰한 것 투성일수록 잠시 현실과 거리를 두고 그동안 삶의 구체성을 차분히 성찰하고 도래할 시간을 창조적으로 만나기 위해 이론과 씨름하는 일도 요긴하다. ‘이론적 실천’에 매진함으로써 현실에서 실제와 마주하는 힘을 기를 수 있으리라. 책장을 덮은 후 이명으로 남아 있는 사이드의 전언을 곱씹어 본다. “본질상 민족의식을 넘어서는 사회의식의 변혁을 수반하는 해방”을 향한 삶과 공부에 나는 얼마나 매진했는가.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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