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정기성 할아버지 별세...4.3생존수형인 빈소 방문해 영면 기원

"이제야 좀 좋은 세상이 오나 싶었더니...뭐 하나 누리지도 못하고 이렇게 보내네"

이념의 광풍에 휩쓸려 옥살이를 하고,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한평생. 무려 70년이 지나서야 억울함이 풀리나 싶었지만,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제주4.3재심 청구자 중 누명을 쓰고 가장 오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 故 정기성(1922~2020) 할아버지가 2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제주시 부민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마지막 길에는 누구보다 아픈 과거를 공감했을 오희춘(88) 할머니, 양근방(88), 오영종(90) 할아버지 등 4.3생존수형인들이 자리를 지켰다. 4.3재심사건을 맡아온 임재성 변호사와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 등도 함께 자리했다.

고인이 평소 지병을 알고 있어서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떠나보내는 이들의 마음은 쓰라렸다. 분향과 헌화를 하고 유족들의 손을 맞잡으면서도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양근방 할아버지는 "고인이 좀 더 건강하게 살아서 다음 소송을 이길 때까지 살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좋은세상을 맞나 싶었더니 세상을 떠나게 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양 할아버지는 "4.3문제가 하루 속히 해결이 돼 모든 희생자나 유족들이 좀 더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오희춘 할머니도 "(정 할아버지는)우리 윗 부락에 살던 분이다. 미망인과도 알고 지내와서 서로 의지가 됐는데, 안타까움이 크다"고 했다. 오 할머니는 "평생을 기죽고 살아오면서 어디 나서지도 못하다가 명예회복 받고 이제야 제대로 사나 싶지 않았겠나"라며 "우리 나이대면 오늘 일도 모르고, 내일 일도 모른다. 죽기전에 4.3 문제가 빨리 해결됐으면 싶다"고 했다.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상주들은 번갈아가며 생존수형인들의 식사 자리를 찾아 감사를 표하며 "꼭 오래오래 사셔야 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정 할아버지의 아들인 정경문씨는 "제주사회가 4.3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말 못할 고통이 많았다. 이번 공소기각 판결을 통해 아무 죄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인 인식에 있어 명예회복을 해서 홀가분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아버지께서 병세가 심해 재판 과정에 참석하지 못했다. 말도 거의 못하는 상황이었고, 인지능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승소를 했는데도 기뻐하시질 못했다. 그게 가슴이 너무 아팠다"며 "이제 사회정의 구현 차원에서라도 국가에서 조속하게 억울한 누명을 쓴 분들에 대해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라고 했다.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출신인 고인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 돼 일본 히로시마 조선소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광복후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다 4.3의 광풍에 휘말렸다. 

1948년 11월 학생청년단에 잡혀 하효지서로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온갖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그 사이 어머니는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몸을 피했지만 예비검속에 걸려 행방불명인이 됐다.

정 할아버지는 이송된 위미지서에서 도망쳐 1949년 5월까지 산에서 생활했다. 스스로 경찰서로 간 정 할아버지는 그해 7월 군법회의에 넘겨져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성명불상의 무장대에게 식량 등을 제공해 물자로서 적을 구원하고, 성명불상의 무장대가 폭동을 할 때 참가해 적과 통신 연락 혹은 적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거짓 혐의가 씌워졌다.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4.3생존수형인 희생자들. ⓒ제주의소리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제주의소리
27일 4.3생존수형인 故 정기성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은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제주의소리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정 할아버지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수형자들과 함께 형무소를 나왔다. 당시 북한군이 남쪽 형무소의 문을 열어주면서 벌어진 일이다. 목포 등지에서 생활하다 1954년 제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경찰에 잡혀 목포형무소에 재수감됐다. 형량은 15년으로 줄어 1965년에야 출소했다.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난 것은 50여년이 지난 2019년 1월이었다. 정 할아버지는 당시 병상에 누워있어 법정에는 출석하지 못했다. 

형사보상과 손해배상소송이 이어지는 사이 현창용 할아버지와 김경인, 김순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정 할아버지까지 떠나며 재심청구인 18명 중 4명이 운명을 달리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통상적으로 2~3년 가까이 걸리는 재심 사례를 미뤄봐도 4.3수형인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늦춰진 것은 아니지만, 피해 당사자들이 모두 고령이다보니 조속한 진행이 필요하다"며 "2차 재심 역시 하루 빨리 기일이 잡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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