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집단 유산사건 후 11년 만에 판결...여성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 범위 확대

유해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간호사가 선천적 질병을 가진 아이를 낳은 경우도 산업재해가 인정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태아에 의한 여성근로자의 첫 산재 인정 사례여서 주목된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허모(39.여)씨 등 4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신청반려처분취소 소송에서 29일 원고 패소를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임신한 여성 근로자에게 그 업무에 기인해 발생한 태아의 건강손상은 여성 근로자의 노동능력에 미치는 영향 정도와 관계없이 업무상 재해에 포함된다”며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조 1항에서 ‘업무상 재해’는 업무에 따른 근로자의 부상이나 질병, 장해 또는 사망으로 정의하고 있다. 태아의 건강 손상을 업무상 재해로 처음 인정한 것이다. 

이번 소송의 발단은 2009~2010년 사이 발생한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집단유산 사건이었다. 당시 간호사 중 15명이 임신했지만 이중 5명이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 

이듬해에도 간호사 12명이 임신을 했지만 33%인 4명이 유산했다. 나머지 8명은 출산을 했지만 절반인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

전국적으로 보기드문 일이 벌어지자 2012년에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역학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간호사들의 유산과 업무상 연관관계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판단이 나왔다.

간호사들은 이를 근거로 2012년 1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보험 요양급여 및 휴업급여 신청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하고 심사에 돌입했다.

결과는 반려였다. 태아의 선천성 심장질환을 근로자의 질병으로 볼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간호사 4명은 2014년 2월4일 산재를 인정해 달라며 서울중앙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의 쟁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근로자 본인이 아닌 몸 속 태아의 질병을 업무상 재해에 포함 시킬 수 있느냐 여부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40조(요양급여)에는 요양급여는 근로자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에 그 근로자에게 지급한다고 규정돼 있다.

2014년 12월 열린 1심 선고에서 재판부는 엄마와 태아를 단일체로 보고 태아의 법적 권리와 의무는 모체에게 귀속돼 산재적용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반면 2016년 5월 항소심 재판부는 출산으로 어머니와 아이가 분리되는 만큼 선천적 질병은 출산아가 지닌 것으로 봐야 한다며 태아의 법적 권리와 의무를 모체와 분리해 해석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아기에게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 여부를 떠나 현행법상 태아의 질환을 어머니가 산재적용을 받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대법원의 법률 검토가 한창이던 2019년 1월 업무상 재해로 태아의 건강이 나빠졌을 경우도 산업재해 보상 범위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대법원이 임신한 여성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 범위를 태아의 건강 손상까지 확대 해석하면서 향후 유사 사례에 대한 산재 적용 범위도 한층 넓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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