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69. 아침에 빈 허벅 진 여자 만나면 재수 없다

* 아적이 : 아침에
* 빈 허벅 : 우물물을 길어 채우지 않은 허벅(허벅은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에 제주에서 여인들이 등에 져 우물물을 길어 나르던 그릇. 진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배가 불룩해 물이 많이 들었음. 어린 여자 아이가 지던 앙증맞게 조그마한 것은 특히 ‘대바지’라 했음.
* 예펜 : 여자, 여인
* 만나민 : 만나면
* 읏나 : 없다

우물에 물 길러 가는 여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아침에 식구들을 위해 밥 짓고 목마름을 적셔 줄 식수(食水)다. 출처=오마이뉴스.
우물에 물 길러 가는 여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아침에 식구들을 위해 밥 짓고 목마름을 적셔 줄 식수(食水)다. 출처=오마이뉴스.

어느 사회에나 그렇게 인식해 온 관행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어떤 근거가 있어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닌데도, 오래전서부터 그러하다고 믿어 오던 것이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아침은 긴 밤을 지나 맞은 새 날의 출발점이다. 일하러 길을 나섰는데, 빈 허벅을 진 여인을 만난 것이다. 여인의 등에 진 허벅이 물을 채우지 않은 빈 허벅인 건 우물이 있는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빤히 안다. 빈 허벅임이 틀림없다. 그 순간, 불쑥 떠오르는 말이 이 말이다.

‘아적이 빈 허벅 진 예펜 만나민 재수 읏나.’

참 공교롭게도 집을 나서자마자 길가에서 그런 해후가 이뤄진 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삽시에 생각이 그렇게 확산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그런 관념이 전해 오는 터라 기분이 영 찜찜하다 함이다. 무심결에 입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오늘 일진이 썩 좋겠구나.’ 성급하게 기분이 잡쳐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은, 이 말이 일방적인 것임을 간과해선 안된다. 우물에 물 길러 가는 여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아침에 식구들을 위해 밥 짓고 목마름을 적셔 줄 식수(食水)다.

이 말의 배경에 도사리고 있는 남존여비 사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얘기다. 빈 허벅을 진 사람이 여자이기 때문에 문재 시 하는 것이다. 물지게를 지고 흥청거리며 지나는 남자였다면 거리껴 할 이유가 하등 없다.

좀 적나라하게 풀이한다면, 빈 허벅 진 여인을 만나면 그날 하루 재수에 ‘옴 붙는다’는 것으로, 남존여비 사상의 극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재수 없다’ 함은 달리 말해 좋은 아침에 상서(祥瑞)롭지 못하다고까지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지금처럼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시대에 이 말을 올렸다가는 본전을 찾기는커녕 발붙일 자리도 없을 것이다.

‘아적이 빈 허벅 진 예펜 만나민 재수 읏나.’

이런 말이 제주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상 변화란 게 참 가파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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