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기지 들어서면 평화도 자유도 다시 못 찾을 수 있다

요즘 제주에서는 김도백의 <해군전략기지> 유치 결정을 간단한 제비뽑기식 여론조사로 마무리해버린 처사로 인해서 각계각층의 각양각색의 찬반여론으로 뜨거운 '도가니탕'이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기도와 설교에만 전념해야 할 카톨릭 사제단 사제들이 해군기지 유치를 반대하며 단식에 돌입하게 되었을까? 제주4.3항쟁 때에도 카톨릭 신부는 본국에다 남몰래 편지를 띄웠다. 6만명의 제주인들이 도륙당하고 있다고.

어떤 이들은 나그네된 자 이도영이 왜 밖에서 제주인들의 문제에 콩놔라 팥놔라 '내정간섭'이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향을 잃어봐야 고향의 참맛을 안다'고 제목을 뽑았다.

진정한 자유는 아마도 억울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고나 할까.

나의 할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맞이 한 후에도 진정한 해방의 맛을 거의 못 느끼고 평생을 살다 가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진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딱 한 번 본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이른 봄이라고 기억이 된다. 일제때 일본군에 강제로 징발되고, 6.25때 대한민국 군에 또 징발되어 버렸던 오무라(대촌) 병사속의 일부 땅들이 원소유주에게 반환된다는 소식이었다. 모슬포에서 대정골(보성, 안성, 인성)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넓은 들판이 나온다. 속칭 '버들못'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아마도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냇물이 흘러서 그런 명칭이 붙여지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할아버지는 일요일 아침 일찍 나를 깨워서 쇠(소) 등위에다 쟁기를 싣고 흥분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도영아, 일제때 뺏겼던 버들못 밭이 이제사 진짜로 돌아왐쪄. 얼른 강 농사헐 수 이실 건지 쟁기로 혼번 갈아나 보게..."

한 20분 가량 걸었나, 황소 한마리, 할아버지, 그리고 나.

우리 밭이라고 어림직잠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총을 어깨에 멘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우리에게 "여기에 왜 왔느냐?"고 물었다.

"여기가 우리 밭인데, 곧 군에서 원주인에게 돌려준다고 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한 번 밭을 갈아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였다.

그 보초를 선 군인은 상부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아섰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딱 한 고량만 갈아 볼 것이니 잠깐만 허락해 달라고 통사정했다.

그 보초는 "딱 한 고랑만이요..."라면서 마지못해 허락했다.

"도영아, 쟁기 내령, 니가 혼 번 갈아보라!"  막 자나나는 손자에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선물로 먼저 주고 싶었던가 보다.

풀이 무성한 속을 쟁기를 들이데고 갈아보려고 했다. 쟁기 보섭에 바위돌들이 걸려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할아버님, 여기 돌밭이우다. 농사 못 짓컨게 마씸." 

"어디 나가 혼 번 해 보켜."

할아버지가 손수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도영아 가자, 이 돌짝들을 들어내기 전엔 아무 것도 못허켜..."

나선 김에 알뜨르 '문드리골' 밭이나 가서 조금만 갈고 집에 가자면서 할아버지는 실망을 다른 곳에다 돌렸다. 문드리골 밭도 일제때 강제징용 당했고 해방이 된 후에도 한 참 후에 원주인들에게 경작이 어렵사리 허용되었으나 '국유지'로 묶이고 말았다. 요즘도 대정주민들에게 신경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곳이며 소위 '분쟁지역'이다. '국유지 원주인에게 반환' 요청을 60년이 넘게 끈질기게 해오고 있는 곳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글을 깨우치자 마자 나의 고사리 같은 손에 몽당연필을 쥐게 하고,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에게 "일제 때 빼앗긴 땅을 돌려달라"는 진정서를 쓰게 했다. 수차례 진정서를 보냈지만 국방부로부터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

현재도 모슬포는 군부대 점령상태로 앞뒤가 꽉 막혀 있다. 앞뒤 뿐만 아니라 동쪽도 막혔다. 앞과 뒤는 공군부대로, 동쪽은 해병대로.

6.25때는 모슬봉 앞에 미군부대와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와 있었다. 어릴적에는 한 10만 대군을 양성하는 곧이라고 들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배운 노래라고는 동요는 전혀 없고 매일 '군가'를 배웠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아침을 보는, 총을 메고 두곳서면 맘이 새로워, 눈을 들어 산을 보라..."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과 훈련병을 면회하겠다는 부모형제들과...모슬포는 아수라장이었다. 숙식할 마땅한 시설이 없었으니 일반 가정 아무데나 허락하는 곳에 가서 기식하였다.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나 세 사람이 함께 자는 비좁은 방에도 거의 매일 2~3명의 나그네들이 함께 자야 했다. 이와 벼룩이 득실거렸다. 그들이 가져온 달갑지 않은 '선물'이었다.

미군부대에서는 아주 신기한 고급스런 쓰레기들이 흘러나왔다. 소위 '짬방 구루마(마차)'가 한 대가 저녁 늦은 무렵 정문을 통해서 나온다. 동네 '망나니'들은 갑짜기 '산적'으로 변신된다. 밭담 뒤에 숨었다가 그 짬방 구루마를 기습하는 것이었다. 그 구루마에는 드럼통 두개가 실렸었는데, 그 드럼통 구정물 속에는 비닐로 포장된 맛있는 고기덩어리가 있다는 것을 그 산적들은 경험에 의해서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고기덩어리는 미군부대 내 식당에서 일하는 한국인과 그 짬방 아저씨와 짜고 몰래 내오는 장물이었다고 판단되었다.

쇠 칼쿠리를 가지고 그걸 낚아채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었다. 그 장물을 훔쳐 먹는 산적들도 별다른 죄의식이 없었다. 모두 훔쳐먹고 사는 주제들이었으니까...

우리들이 입고 있는 교복은 모두 군부대에서 나온 '사지'라는 군복을 검정물감을 들여서 우리 체격에 맞게 줄여서 만든 것들이었다. 교모는 군담요를 물들여서 오려 만들었고...이런 것들은 모두 부정한 뒷거래를 통해서 민간인에게 흘러나온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군부대로 인해서 가장 심각하게 피해를 당한 것은 농사짓던 땅만 빼앗긴게 아니었다. 일제 때는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 만드는 공사에 강제노역을 당했고 땅굴을 파는데 동원되었다. 요즘 처럼 중장비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다. 모두 괭이와 따비(삽과 같이 생긴 작은 쟁기 모형)로 평지를 만들고 동굴을 만들었다니 그 흘린 피땀을 생각해 본다.

가장 큰 피해는 일제 때 당하지 않고 해방된 후에, 4.3 때 당하였고 6.25 때 두 차례, 그것도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서 당하였다. 4.3 때에는 오무라 병사에 제2연대 허욱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에 숱한 대정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6.25 때에는 그 오무라 병사에 육군 대신 교체된 해병대(김윤근 부대장)에 의해서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되었던 252명의 비무장 주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바로 섯알오름 '백조일손' 사건이다.

이 보다 더 큰 피해가 있을 수 있을까? 모슬포에는 숱한 태풍이 해마다 지나간다. 내가 어릴 적 만난 가장 큰 태풍은 '사라호'였다. 밭작물 피해 등 엄청난 재산피해를 내었지만 인명 피해는 단 한 사람이었다. 천재지변 보다 더 큰 손실을 '인재'에 의해서 당한 것이다.

그게 바로 '군사문화'에 의한 피해였다. '가해자'의 후배들은 그 자리에 다시 와서 버티고 섰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선배'들이 저지른 만행을 '용서해 달라'고 한 적이 없다.

국방부 장관이 제주도를 방문하여 단호하게 '해군기지 건설'을 선언하고 갔다. 과거의 역사부터 인정하고 사과하고 갔어도 덜 서러운 터인데, 때가 언제인데 '폭군같은 선언'을 하고 가는 지, 그리고 덩달아 김도백은 여론조사의 결과를 핑계로 그 장단에 춤을 추고 말았다.

무엇이 앞뒤가 안맞고 뒤죽박죽이 되어가는지도 모른다. <평화의 섬>을 선포한 지 몇 십년이라도 지나갔나? 이제 제주도는 더 이상 '평화의 섬'이 아니다. 이지스 체제를 갖춘 구축함과 초계정 잠수함 항공모함 등이 줄줄이 들어온다. 이것은 모두 미군들이 60년 전에 이미 점지해 뒀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 제주도였기 때문이다.
 
'해군전략 기지'는 한국해군만이 사용하는 곳이 절대로 아니다. 한국군 기지는 어느 곳이나 언제든지 미군이 필요에 따라서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한미방위조약에 그렇게 되어 있다.

왜 주한미군들은 전방의 모든 미군부대들을 동해도 아닌 서해의 평택으로 집결하고 있는지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미래의 '가상의 적'은 북한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에도 근 7만의 일본군들이 중국본토를 침략하기 위해서 제주도에 진주했었다. 그로 인해서 미군의 공습 제2 타킷이 되었었다. 오끼나와가 미군 공습에 의해서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끼가 가공할 원자폭탄에 의해서 초토화되었다.

일군들은 제주도민들을 모두 육지로 소개시키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육지로 나가던 피난민을 가득 실은 민간인 배가 미군비행기에 의해서 공습되고 거의 모두 수장되었다.

이번 김도백이 주도한 '여론조사'에 응답하고 찬성한 제주도 주민들은 이런 역사적, 지정학적, 국제역학적 사실들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었을까? 대단히 의문스럽다.

해군본부에서 던진 '핑크 빛 선심공세'에만 눈독이 들어서 잠시 후에 벌어질 '미래'를 내다 보지 못했다.

해군전략기지 유치 찬성에 나선 강정 주민들 중 일부 '선동자'들은 불을 짊어지고 화약고에 뛰어드는 격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같다. 아마도 강정은 내가 직접 몇 차례 가보고 경험한 곳 중에서 몇 째 안가는 가장 '평화'로운 마을이다.

거기로는 일주도로가 나 있지 않다. 내가 탐라대학에 재직할 당시(1997~1999) 나는 서귀포를 갈 일이 있으면 회수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중문, 하원, 월평을 지나 강정을 거쳐서 갔다. 한 번은 강정 포구에 가서 옛날 처럼 바닷가에 실뱀장어들이 살고 있는지를 조사해 봤다. 조그만 조약돌들을 뒤집으니까 실뱀장어들이 나왔다. 그 기쁨은 이루말 할 수가 없었다. 엄청난 농약이 과수원에 숱하게 뿌려지는데도 그것들은 살아있었다. 강정천에는 은어들이 놀고...

아마도 강정의 찬성파들은 이 탁트인 앞바당이 얼마나 좋은 지를 그리고 평화로운 마을이 얼마나 살기 좋은 지를 이제 잃어봐야 알게 될 것이다, 그 소중함을. 만약 해군전략기지가 들어서게 되면 100년이 지나도 다시 그 '평화'와 '자유'는 다시 찾을 수가 없음을 알라.

   
 
 
나는 아직도 근 50년이 넘도록 고향을 잃은 '나그네'다. 그러나 언제나 내 맘속에는 모슬포로 돌아가서 '평화'롭게 여생을 살다가 뼈를 모슬봉 기슭에 선조들과 함께 묻히는 것이 간절한 소원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나의 너무나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꿈에 불과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에게도 '깨몽'이라고 했는지도..."청소년들이여 꿈을 가져라"가 아니고, "청소년들이여 깨몽!' 이것이 나의 모토였다. 바로 진정한 '행복'은 '깨몽'이요, 핑크 빛 미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다.

강정주민 여러분, 그리고 제주인 여러분 모두 깨몽헙써 양!  

이역만리에 '나그네'된 농사꾼, 이도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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