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 작가 여덟 번째 수필·시집 《읍내 동산 집에...》, 《둥글다》 발간

출처=알라딘.
출처=알라딘.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 보다 적은 이들에게 생(生)은 더 없이 특별한 가치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교사라는 꼬리를 떼고 수필가·시인·작가라는 새로운 꼬리가 자란 김길웅 역시 마찬가지. 그가 최근 펴낸 여덟 번째 수필집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력》, 시집 《둥글다》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의 몸짓이 차분하면서 2018년 직전 발표작 보다 농도 짙게 칠해져 있다.

# 수필집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력’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뱉는 말 가운데 특정 나이를 지나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있다. 그 중에서도 황혼의 나이에 접어드는 세대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어느새 ‘원로’의 문을 열고 들어간 김길웅은 새 책에서 세월에 대해 담담히 곱씹는다.

손자 손녀와 함께 찾아간 납골당, 차마 정(情)을 붙일 수 없는 동물들, 정신이 부옇게 흐려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상상해보는 10년 뒤 자신의 모습까지. 저자는 일상 속에서의 성찰과 재발견이라는 수필의 공식에 충실하며, 삶에 대한 애착과 두려움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력 1·2>는 12개월 사계절 풍경과 인생의 추억을 잇는 서사의 확장까지 시도하며 마치 한편의 영화를 만나는 경험을 안겨준다.

“오늘 새벽에도 잠을 깨는 순간, 책상머리에 놓인 전자시계에 눈이 갔다. 벌겋게 달아오른 붉은 신호. 시계는 붉게 효과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남아 있는 내 삶의 처음이다. 처음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시간 위에 빛난다. 처음이다.”
- <처음이다> 가운데 일부

“5월_훈풍에 마당이 감꽃으로 분분하다. 산으로 난 과수원 길을 걷는데 코끝 얼얼해 밭담에 다가서니 귤 밭에 너울 이는 감미한 귤꽃 향기. 장미의 고혹에 잔뜩 기울어 화석화한 관념이 본질을 덮어버리는 건 고질적 오류다. 아잇적 삘기 뽑으며 시간 가는 줄 잊던 옛 동산이 난개발에도 남아 있다니 문득 그립다. 달려가 등성이를 오르내리며 하루를 지치게 놀고 싶다. 유년이 사라진 자락에 고인 적막처럼 아름다운 건 없다.”
-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력 1> 가운데 일부

저자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원초적인 삶의 의지,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글에 대한 갈망이다. “철학 부재의 허한 정신에서 벌떡 깨어나 글쓰기에 매진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가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백지 위에 만년필을 써내려 간다.

특히 외래어·한자어를 배제하며 순수어로만 쓴 실험적인 글이나, 변시지 미술 작가의 작품 <아침> 리뷰처럼 70대 작가의 새로운 시도는 속도에 쫓기는 기자를 포함한 현대인들에게 말 없이 던지는 묵직한 조언이다. 

“몇 날 며칠을 두고 찾아낸 낱말 하나가 내 글에 작은 파장으로 흐를 수는 없을까. 한 낱말의 빛이 첫 문장으로 번지고, 그 빛이 잇대어 다음 단락으로, 좀 더 번져 결말로. 번졌으면. 인드라망의 빛처럼.”
- <번지다> 가운데 일부

# 시집 ‘둥글다’

수필집 전반에 흐르는 저자의 욕망은 시집을 통해 한결 정제된 결정체로 다가온다. “간신히 매달린 은유 하나 그게 내 시였으면”하는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김길웅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남은 세월을 맞이한다.

둥글다
김길웅

바람에
쓸려 각지고 모났다 오래 비
내려 질척이다
우기 지나 활짝 갠 날
아침 햇살
그 햇살에 연둣빛 풀잎 끝 이슬
눈 시렸거니
기어이 안으로 스며
둥글다

젊은 날
설익어 풋풋했다 꽃이 진다고
마냥 진다고 
오랜 밤을 뒤척였는데
굽은 등으로 가파르게 그 한 고비 넘었어도
모를 일이네

눈 속으로 오는 것들 다
둥글다

저자는 책 말미 발문에서 "내 시는 뻔질나게 자연과 교통하고 세상과도 통섭한다. 바람, 이슬, 비, 햇살, 이슬들. 그것들과 노닥거리는 데 집중하노라면 어느새 속으로 침잠한다. 그런 한때의 도정을 거치고 나면 굽은 등이 고단하긴 해도 내 안에 화평함이 깃들어 있다"고 시를 마주하는 마음가짐을 설명했다.

김길웅은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주신인문학상(1993), <수필과비평> 신인상(1994), <심상> 신인상(2005)을 수상했고 지금껏 수필집과 시집은 각 7권 씩 썼다. 수필선 《구원의 날갯짓》, 글방 강의식 수필작법 《수필이 맨발로 걸어 들어오네》도 펴낸 바 있다. 대한문학 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제주수필문학회, 동인脈,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제주의소리>에서 제주어 속담으로 현 시대를 읽는 칼럼 ‘차고술금’(借古述今)을 정기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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