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청진기] (27) 우리를 넘어서는 우리를 기다리며 

우리는 그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른 물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는 그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른 물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지난 4월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와 카카오 ‘같이가치’ 팀은 카카오의 ‘마음날씨’ 플랫폼을 통해 한국인의 행복도를 측정한 ‘안녕지수’를 발표했다. 2019년의 안녕지수는 10점 만점에 5.12점으로, 2018년의 5.18에 비해 조금 하락했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행복도는 100점 만점에서 간신히 50점을 넘긴 수준이다. 

한국인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안녕하지 못한 한국’은 이미 자명한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삶은 원래 불행한 것임을 받아들이거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를 극복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불행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여전히 존재한다. 개인의 일상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매일같이 교차할지라도 ‘안녕지수’는 여전히 50점 근처를 배회한다는 것이다. 

고착화된 사회적 불행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항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해결의 가능성을 한껏 높여주었다.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현실을 바꾸고자 했으며, 때로는 광장에 직접 나와서 주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2016년의 촛불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수많은 국민들이 모여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끌어내렸다는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었다. 

정치적 해결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었다.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으로 인한 소비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창구가 되었다.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상품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우리는 상품을 직접 만들거나 찾아다니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원하는 상품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거래는 점점 간편해져서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대부분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은 여전히 50점 근처에 있다. 문제는 무엇일까? 촛불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정부에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만한 충분한 상품이 개발되지 못한 탓일까. 물론 보다 더 나은 정부와 혁신적인 상품이 등장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대가 얼마 가지 않아 금방 실망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기도 한다. 그동안 새로운 정부, 새로운 기업이 끊임없이 변화를 약속해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50점의 성적표를 들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반복적인 기대와 실망을 겪으면서 어렴풋하지만 분명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은 기대와 실망이 반복될수록 점점 선명해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른 물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불행한, 그럼에도 변화를 열망하는,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선택하는 주체이다. 우리는 국민으로서 헌법에 보장된 권리와 민주주의의 원칙을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주권을 행사한다. 또한 우리는 소비자로서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 교환을 통해 원하는 상품을 구입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어떤 대표, 어떤 상품을 선택할지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로 선택지를 만드는 일보다는 선택하는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선택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의 기호를 반영해 선택지를 구성할 것이라는 약속만을 받을 뿐이다. 

선택하는 주체도 변화를 꿈꾼다. 이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소비자의 이름으로 주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권행사는 항상 국가와 기업이라는 권력의 이름으로 승인될 경우에만 유효하다. 소비자들이 힘을 합쳐 악덕업주를 몰아내고 나면, 새로 들어온 업주는 악덕업주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새로운 업주가 얼마나 소비자들의 불만을 충실하게 해소해줄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할지는 보증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택하는 주체인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처한 문제가 선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선택하는 주체를 넘어선 주체로 변화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주체가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나 이들은 분명 선택하는 주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변혁의 주체일 것이다. 이들은 역사적인 변혁의 주체로 불렸던 민중, 노동자계급, 시민과 어떤 유사한 성격을 가질 지도 모른다. 또한 이들은 갑자기 생겨난 주체가 아니기에 선택하는 주체와도 어느 정도 닮아 있을 것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아직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계속해서 해야 할 질문이다. 기대와 실망이 반복될수록 선택의 문제만으로는 불행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그 이름은 점차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울타리)를 넘어서는 우리를 기다리며, 그 시기를 앞당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우식(29)

바라는 것은 깃털같이 가벼운 삶

탈제주를 꿈꾸며 서울로 향했으나
돌연 제주로 돌아와 사회학을 공부중

가까운 것엔 삐딱하나 먼 것에는 관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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