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20년 전과 격세지감 “일상이 됐으면”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민갑룡 경찰청장이 지난 12일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있다. 그는 방명록에 '경찰의 지난날'을 반성한다고 썼다. 4.3공원 참배 및 공식 사과는 민 청장이 처음이다. 민 청장은 지난해에도 서울 4.3행사에 참석,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2000년 11월24일, 제주경찰청 앞에서 경찰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 전까지 경찰의 시위 과잉 진압 등을 비판하는 집회는 간간이 있었으나, 오로지 경찰을 타깃으로 면전에서 핏대를 세우는 것은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수백명이 모인 집회 명칭은 ‘제주경찰사(史) 4.3역사 왜곡 규탄 도민대회’. 그해 10월 제주경찰청이 [제주경찰사] 개정판을 내면서 약 10년 전 초판의 4.3 왜곡 내용을 그대로 실은 게 발단이었다. 

4.3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제주4.3특별법이 같은해 1월 공포됐으니, 50여년 금기시됐던 4.3이 막 출구를 찾은 때였다. 

개정판은 왜곡 투성이었다. 4.3을 폭동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소설 [순이삼촌]으로 잘 알려진 ‘북촌 학살’을 공비들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사망 인원도 1만명 밑으로 축소했다. 

4.3특별법 제2조(정의)를 뜯어보면, 4.3사건은 여러 해에 걸쳐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참극’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법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서명했으므로 일개(?) 지방경찰청장이 국가 수반에 반기를 든 모양새가 됐다.

일간지 기자로서 때마침 경찰을 출입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유족들이 울분을 토해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두차례 회동 끝에 제주경찰사 파문은 4.3 관련 내용 삭제, 제주경찰청장의 사과로 일단락됐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20년 전, 그토록 진실을 외면했던 경찰이 요즘 달라도 너무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12일, 민갑룡 경찰청장이 경찰 총수로는 15년 만에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4.3영령들 앞에 머리를 숙였다. 방명록에는 ‘경찰의 지난날’을 반성한다고 썼다. 당초 공개된 일정에는 없던 방문이었다. 그의 제주행은 치안현장 점검이 목적이었던 만큼 4.3을 각별히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민 청장은 임기 중 4.3에 대한 공식 사과와 함께 4.3공원까지 방문해 희생자들을 추념한 최초의 경찰청장으로 남게됐다. 

민 청장의 4.3공원 방문은 2005년 허준영 청장과는 차원을 달리한 것이었다. 당시 허 청장은 공원에서 순직 경찰관을 위해 거수 경례를 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 

더구나 민 청장은 지난해에도 서울 4.3추념행사에 참석해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각에선 이걸 사과로 볼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왔으나, 4.3평화재단은 ‘첫 공식 유감 표명 및 사과’로 받아들였다. 

사실 민 청장은 차장 시절인 2018년에도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과 4.3공원을 찾았었다. 또 당시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고(故) 문형순 경찰서장 공덕비를 참배하더니, 올해는 제주경찰청 내 고인의 흉상 앞에서 예우를 갖췄다. 4.3 발발 이후 총살 명령 거부 등으로 수많은 양민의 목숨을 구한 ‘한국판 쉰들러’, 2018년 경찰 영웅으로 선정된 바로 그다. 

이쯤되면 민 청장 개인의 ‘남다른 관심’ 쯤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그가 누군가. 다름아닌 경찰의 총수다. 일거수 일투족에 국민적 시선이 쏠리고 책임이 따르는 자리다. 바야흐로 4.3을 대하는 경찰의 인식이 바뀌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 씨앗은 제주에서 먼저 잉태했다. 오랜 세월 반목했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2013년 손을 맞잡았다. 이 때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다. 이후 해마다 충혼묘지와 4.3공원에서 합동 참배를 해왔다. 

이번 방문에서 민 청장은 “중앙경우회 회장단을 만나 중앙 차원에서 4.3의 가치를 확산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까지 했다. 기대가 크다. 

이제는 일상이 됐으면 한다. 경찰 간부의 4.3공원 참배가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안되는 상황이 왔으면 좋겠다.

각종 선거에서도 4.3이 더 이상 승패를 가르는 변수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4.3은 도민 모두의 아픔이다. 4.3 해결의 종착역은 화해와 상생이지 않은가.

지난 4·15 총선에서 그럴 징조가 보였다. 여야 공히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적어도 제주에서 만큼은 4.3을 둘러싼 여야의 구분이 무색해졌다. 코로나19 정국에 가려진 측면이 있으나, 4.3이 예전 만큼 보수 쪽에 악재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새삼 민 청장의 참배와 사과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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