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71. 익었는가 한 점, 설었는가 한 점

* 이거신가 : (잘) 익었는가
* 설어신가 : (아직도) 설었는가

몇 번 반복해 음미할수록 제 맛이 우러나는 재미있는 말이다.

어느 들판, 사냥꾼들 몇이 노루 한 마리 사양해 놓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있는 현장을 떠올리면 좋다. 사냥꾼들은 포획한 들짐승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대개 산에서 잡았다. 불을 피울 삭정이도 널렸고 게다가 가까이 철철 넘쳐흐르는 시냇물이 있으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 아닌가. 사냥하느라 때마침 뱃속이 출출하니 여러 손이 모여들어 짐승을 잡아 불에 굽게 된다. 고소한 냄새가 퍼져 저절로 입에 침이 돌게 마련이다.

이런저런 뒷얘기들을 나누며 무심결에 고기가 잘 익었는가 해 한 점, 아직도 익지 않았는가 해 한 점, 줄곧 손이 가는 것이다. 허기지면 손이 가만있지 못한다. 그렇게 한 점, 한 점 끊어 먹다 보니 어느새 고깃덩이가 다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기를 ‘이거신가 혼 점, 설어신가 혼 점’ 끊어먹다 보면 눈 깜짝할 새 한 조각도 없는 법이다.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를 세상사에 빗대는 걸 잊지 않았다.

옛날 삶은 돼지 다리를 상할라 뒤뜰로 나가는 바람 잘 통하는 문설주에 걸어 놓았는데 감쪽같이 없어지는 경우를 경험했다. 식구 여럿이 들고 나며 한 점씩 잘라 먹었으니 그냥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손이 거의 안 갔던 분은 어머니였다. 한소리 안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세상에 영도 허느냐. 그 작산 괴기 다 어디 가시니. 고냉이가 물어가지 아니 해실 건디."
(아니, 세상에 이러기도 하느냐. 그 큰 고기 다 어디 갔느냐. 높은 데 걸어 놓았으니 고양이가 물어가진 않았을 텐데.)

먹는 것, 쓰는 것이 다 그렇다. 머고 싶어도 침을 삼키며 참고, 쓰고 싶어도 손에 꼭 쥔 채놓지 않아야지, 먹고 쓰다 보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바닥이 나는 법이다. 맛있는 음식이 그렇고 돈(재산)이 그렇다. 

탕진(蕩盡)이란 말을 한다. 많던 재산을 다 써 없애버린다 함이다. 한국소설문학사에 빛나는 〈붉은 산〉, 〈비땨가리〉, 〈광염 소나타〉의 작가 김동인을 기억하리라. 그는 평양 출신으로 집안이 천석지기 부농이었다. 하지만 주말마다 기차 타고 한양(서울)에 내려와 기생을 품어 방탕하게 살다보니 엄청난 재산을 기생치맛자락에 쓸어 담고 말았다 한다. 천석꾼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부호가 아닌가. 

재산을 물 말아먹는다는 소리를 한다. 낭비벽이 빚는 비극이다. 근검절약이란 말이 흘려들어선 안된다. 제주의 오늘, 이 풍요의 시절이 그냥 눈앞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고기를 ‘이거신가 혼 점, 설어신가 혼 점’ 끊어먹다 보면 눈 깜짝할 새 한 조각도 없는 법이다.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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