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의 푸른 꿈을 품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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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166. 김상숙, ‘10월 항쟁’, 돌베개, 2016.
김상숙, ‘10월 항쟁’, 돌베개, 2016. 출처=알라딘.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 반경, 대구부청 앞에서는 여성과 아이들이 중심이 된 시민 1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공출과 비슷한 식량 배급제를 실시한 미군정 아래에서 식량 문제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권 문제였다. 1946년 가을에 전국을 휩쓴 10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이 책은 1946년 10월 항쟁을 포함하여 1945~1950년 사이 대구·경북 지역의 사회운동사와 민간인 학살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대구 경북지역의 진보적 사회운동을 담고 있다. 구술 자료를 통해 경북 농촌 지역에서 있었던 빨치산과 군경 간의 지역 내전과 이중권력 상황을 살펴보았다. 저자는 특히 당시 청년 세대의 경험을 초점을 두었다. 당시 청년들은 진보세력과 대중이 만나는 접점에 있었던 대중운동의 선봉대였다. 동시에 무명의 말단 행동가로서 한국전쟁 전후 가장 많이 학살당한 세대이기도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그 중에서도 ‘대구 10월 사건’을 맡아 집중적으로 조사했던 저자의 이 저서는 10월 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경험과 지역사를 문헌과 구술 자료의 촘촘한 추적을 통해 10월 항쟁에 대한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역에서는 노동자 파업을 폭력으로 탄압하는 미군정에 맞서 가두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총을 쏘았다. 1946년 10월 1일과 2일에 발생했던 대구의 항쟁은 미군정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대구에서 밀려난 시위대는 시 외곽으로 나가 경북 각 군의 농민들과 합세했다. 항쟁은 경북 전역 22개 군으로 파급되었다. 시위는 계속 퍼져 나가 많은 도시와 농촌에서 민중봉기로 발전했다. 부녀자는 쌀을 요구하고, 노동자는 임금을 올려 주고 쌀 배급을 늘려 달라 했다. 학생은 경찰의 발포 금지와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을 요구했다. 

“1946년 10월 항쟁은 각 지역에서 대부분의 계층·계급이 연대하여 일어났다. 이러한 연대에는 해방 후 1년 동안 대중투쟁의 경험을 쌓아온 조직 대중이 선도 세력이 되었다. 당시 전국에서 노동자 파업이 진행되었으나 대구에서만 노동자 파업이 시민 항쟁으로 전환했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과 달리 지역의 건국운동 과정에서 노동자와 시민이 계속 연대해 왔고 총파업 기간에도 노동자와 시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데 있다.1946년 10월 1일 오후 대구역광장에서 열린 시민대회는 노동자의 파업이 시민 연대로 확산하는 결정적인 장이었으며 해방 후 1년 동안 축적된 대중투쟁 역량이 지역 중심부에서 표출된 것이었다.” (272쪽)

저자는 10월 항쟁은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의 지도부와는 별개로 지역 차원에서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미군정이 10월 항쟁을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의 작품으로 몰고 갔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었다. 실제로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이 각 지역에서 항쟁을 지도한 흔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1946년 10월 항쟁은 전국적 지도부 없이 지역 민중과 지역 진보세력의 힘으로 전개된 항쟁이라고 보고 있다. 

10월 항쟁은 경북·경남·전라·충청·제주 등 남한의 주요 도시와 농촌으로까지 번져 경찰관서를 습격하는 등 60일 남짓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6년 11월 중순 미군과 경찰은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당시의 기록만 하더라도 77만 3,200여 명이 참여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전국적인 계획이 없어 고립된 투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 

10월 항쟁을 계기로 미군정은 지방 인민위원회를 거의 다 분쇄하는 한편, 좌익세력을 더욱 탄압했다. 미군정이 좌익세력의 모든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자, 이들은 지하로 몸을 숨겼다.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반대세력을 물리친 우익은 이제 힘에서 좌익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0월 항쟁은 실패로 끝났다. 저자는 그 이유를 항쟁을 이끄는 전국적 지도부가 없었던 것을 가장 큰 한계로 지적했다. 항쟁은 지역 민중과 진보세력이 결합하여 각 시·군 단위로 발생한 뒤 미군정의 막강한 물리력에 의해 단기간에 진압되었으며, “항쟁 단위가 전국적, 체계적 형태를 띠지 못하고, 한 지역이나 군 이상의 유기적 연대가 결여된 채 조직 역량의 분절성이 극복되지 못한 운동”이라는 평가도 있다.

저자는 10월 항쟁은 한국전쟁 전 민간인 집단학살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라고 지적한다. 항쟁 후 항쟁 참여자들은 군경의 탄압을 피해 팔공산, 지리산, 태백산 등으로 들어가서 야산대를 형성했다. 야산대가 발전한 유격대는 군경과 대치하며 ‘작은 전쟁’이라는 이중권력 아래엣 생활했다. 야산대·유격대는 잔인하고 지속적이고 철저한 군경의 소탕작전에 의해 뿌리가 뽑혔고, 내전 지역에서 생활했던 주민들은 ‘빨치산 협조자’라는 이유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살된 경우가 많다. 학살은 건국운동의 주축이었던 지역 진보세력의 배제와 절멸 과정, 특히 진보세력 말단에서 대중과의 접점에 있던 청년 활동가군의 말살 과정이 되었다. 학살은 한국전쟁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학살에서 생존한 지역민들에게는 패배와 학살의 공포가 집단적 트라우마를 형성했다. 이 트라우마는 전쟁 후 한국 사회 전반에 ‘반공=빨갱이 혐오’의 사회심리 구조를 만들어 냉전 통치성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는 나중에 대구·경북 지역이 보수화된 또 다른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의 세월을 살았던 10월 항쟁의 유족들은 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진상규명에 뛰어들면서 조금은 상처를 극복해가고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족들과 같이 했던 저자는 이 또한 살피고 있다.

“저는 크면서 보도연맹, 빨갱이 빨갱이 하면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불러보지 못했어요. 평소에 살면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마음에 떠올리지도 못했지요. 그런데 올해는 서명운동 하러 다니면서 아버지라는 말을 진짜 많이 해봤어요.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생전에 그런 소리 안 하다가 하려니 잘 나오더라 카이께네. 그런데 서명받을 때, (상대방이) “여 누군데? 라고 물으면 우리 아부지!” 그 말이 당당하게 나오더라고예. 전에 같으면 움츠리고 못 할 건데. “우리 아부지!” 이래 나오더라고, 말이.“ (293쪽)

10월 항쟁은 해방 공간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열망이 분출하고, 그리고 좌절되는 분기점이었다. 당시의 지식인도, 당원도, 단체원도, 평범한 사람들도 해방의 기쁨은 잠시일 뿐 새로운 세상의 꿈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목도 했다. 생존을 위해서, 암울한 노동조건의 변화를 위해서,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위해서 등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양했지만, 그 속에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시대의 푸른 꿈이 담겼을 것이다. 그 꿈이 좌절되고 상처는 깊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노력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여정에 10월 항쟁 진상규명운동의 노력이 놓여 있다.

▲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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