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15) 김준기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역사적 사건의 이름을 따서 예술 개념을 만드는 일은 언제나 차고 넘치는 무게감을 지닌다. 대만 2.28예술과 제주 4.3예술이 그러한 것처럼, 광주 5.18예술 또한 시리도록 아픈 그 역사적 사건을 예술적 표현의 소재와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천근만근의 무게를 지닌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시민들의 죽음을 낳았고,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광주는 학살의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침묵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  아픔을 자랑스러운 항쟁의 역사로 기리는 시절이 왔지만 아직도 학살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진실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글은 광주의 고통을 예술작품으로 승화한 5.18예술을 단편적으로 살펴보는 5.18예술 시론(試論)이다. 

주지하다시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를 딛고 자라난 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소기의 열매를 맺었다. 1987년 이전과 이후의 짧은 세월 동안 한국의 미술계에는 민중미술이라는 독창적인 미술운동이 탄생했다. 1979년을 기점으로 사회전반의 정치적 민주화 열망과 함께 태어난 민중미술운동은 미술 내적인 측면에서는 지나치게 절제된 미술언어를 강요했던 모노크롬 위주의 추상미술 주류 화단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분출하는 민주화 열기와 동행하여 사회비판적이며 사회참여적인 예술적 표현과 실천이 미술운동의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 민중미술의 사회적 의미이다. 

조선시대 말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시기는 전근대적인 공예 개념의 예술이 예술 자체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때였다. 하지만 일제가 강점한 조선은 자생적인 문화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 상황에서 서구화와 식민화 과정의 일환으로 미술문화가 제도화했다. 1945년 이후의 해방공간에서 격렬한 사회 재구성의 에너지가 들끓었으나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아카데미즘을 딛고 추상미술운동이 나타났지만, 1970년대라는 암울한 독재시대는 모노크롬의 아방가르드미학을 침묵의 백색으로 내몰고 말았다. 

이렇듯 예술적 표현이 철저히 금기시되던 박정희 유신독재 시기에 홀로 민주주의를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 있었다. 김지하가 그 주인공이다. 1990년대 이후 곡절을 겪으며 서서히 시대정신의 빛이 바래진 인물이지만, 1970년대 저항예술운동을 이끈 김지하의 존재는 망망대해를 비추는 한줄기 등대와 같았다. 그의 존재는 한 시대의 어두움을 깨쳐 나가는 초월적 영웅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렇듯 1970년대가 김지하라는 영웅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이 만들어낸 집단지성의 시대였다. 1970년대가 광야에서 외치는 초인의 추상언어였다면, 1980년대는 눈앞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학살사건에 경악한 시민 학생들이 외치는 분노의 절규였다. 

민중미술은 이렇듯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격정의 시대정신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이 가운데 특히 5.18미술은 한국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성한 결정적 대목이다. 1970년대가 만들어낸 침묵의 언어를 1980년대 식의 격정적인 리얼리즘 언어로 바꿔낸 것은 전두환을 경험한 광주의 에너지 덕분이다. 광주학살의 현장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참상을 시각언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진실을 침묵에서 발언으로, 은폐에서 폭로로 드러내는 일이었으므로, 5.18예술은 그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충격적인 장면과 상황을 담아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홍성담의 목판화 연작은 가장 대표적인 5.18미술이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홍보선전 활동을 벌였던 홍성담은 학살과 저항의 장면과 상황들을 생생한 목판화 작품으로 재현해냈다. 50점의 목판화 연작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발생과 전개, 종료의 전 과정이 서사적인 구성으로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가치를 지향한 광주정신을 압축적으로 집약함으로써 광주의 진실을 드러내고 퍼트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홍성담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현장미술 운동은 민중미술 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것은 전시장미술과 현장미술의 공진화하는 한 시대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홍성담 작가의 5.18 목판화 작품. 출처=오마이뉴스.
홍성담 작가의 5.18 목판화 작품. 출처=오마이뉴스.

‘광주자유미술인협회’라는 미술인 단체 활동을 펼친 홍성담은 시민미술학교를 열었다. 미술가들의 활동은 주로 아틀리에에서 창작하고 전시장에서 발표하는 식의 단선적인 축선을 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홍성담과 그의 동료들은 시민들과 함께 판화를 새기고 그것을 시민사회에 공유하는 시민미술학교를 열어서 엘리트미술을 민중들의 미술로 확산하고자 했다. 민중미술의 소중한 유산은 엘리트미술가들의 위대한 명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술을 시민과 함께 생산하고 나누는 시민사회 공론장의 씨앗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 운동이야말로 문화민주주의 관점에서 1980년대라는 민주주의 시공간의 위대한 유산이다. 

시민운동 차원의 미술운동은 판화 영역에 그치지 않았다. 걸개그림이라는 독창적인 미술양식을 통하여 더욱 폭넓은 대중적 미술운동이 이어졌다. 걸개그림은 불교미술의 한 양식인 괘불탱화(掛佛幁畵)의 방법을 사용하여 거대한 천에 여러 작가와 시민들이 함께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광장과 거리에 전시하여 운집한 군중의 정서적 연대감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 대형 그림이다. 홍성담과 그의 동료들이 함께 한 미술창작 그룹, 시각매체연구소가 창작한 다수의 걸개그림들은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열망을 강렬한 도상의 대형 회화를 표현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살아있는 미술이었다. 

1987년의 민주화 성취 이후로까지 이어지는 홍성담과 그의 동료들의 활동은 민중미술의 지평, 나아가 한국미술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에서 그 에너지를 받아 안은 예술가들이 시대정신의 부름에 호응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대화의 산물이다. 죽음의 공포를 딛고 끝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며 목숨을 바친 광주의 시민학생들의 위대한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그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노래가 있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스러져간 오월의 넋은 민주화운동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5.18미술과 민중미술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남겨주었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예술과학연구소장,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장.


Hong Sung-dam, the first step in 5.18 art
GIM Jungi

Creating an art concept after a historical event is always full of weight. Just as 2.28 and 4.3 art do, 5.18 art also carries a weight of sheer weight in that it uses the painful historical event as the subject and theme of artistic expression. The May 18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in 1980 in Gwangju resulted in the deaths of countless citizens, and for many years Gwangju had to pass through a dark, silent tunnel where it was unable to tell the truth of the massacre. Although the time has come for Giri as a proud history of protest, the truth about the cause, process and outcome of the massacre has yet to be determined. This article is a collection of 5.18 art poems that examine the 5.18 art that sublimated Gwangju's pain into a work of art.

As you can see, the pro-democracy movement, which grew up overcoming the wounds of the May 18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bore the desired fruit in June 1987 with the uprising. During the short period of time before and after 1987, the Korean art world created an original art movement called popular art. Born in 1979 along with the desire for political democratization throughout society, the Minjung Art Movement was a resistance and challenge to the monochrome-oriented abstract art mainstream painters, who forced excessively restrained art language in terms of art inside. The social meaning of popular art is that the artistic expression and practice of social criticism and social participation were expressed in the way of the art movement, accompanied by the exploding democratic fervor.

The period from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Korean Empire was when the art of the pre-modern craft concept began to become an independent area of art itself. However, Joseon, which was dominated by Japan, failed to achieve self-sustaining cultural development and was institutionalized by art and culture as part of the Westernization and colonization process under colonial conditions. In the post-1945 liberation space, the energy of a violent social reconstruction was infested, but due to division and war, it had to start over the ruins. Over the 1960s, the abstract art movement emerged, overcoming academyism, but the dark dictatorship of the 1970s pushed the avant-garde aesthetics of monochrome into the white of silence.

There was a great poet who sang democracy alone during the period of Park Chung-hee's dictatorship, when artistic expressions were strictly taboo. Kim Ji-ha is the main character. Although Kim Ji-ha, who led the resistance art movement in the 1970s, was a ray of lighthouse that lit the Great Sea of Mangmang, although she slowly faded from the spirit of the times after the twists and turns in the 1990s. His presence created the epic of a transcendent hero who awakened the darkness of an era. If the 1970s were the era of Kim Ji-ha's heroism, the 1980s was the era of collective intelligence created by Gwangju's May 18 Democratic Movement. If the 1970s were the abstract language of the superhuman shouting in the wilderness, the 1980s was a cry of anger shouted by frightened civic students in the unprecedented massacres in front of their eyes.

Minjung art was created against the backdrop of a passionate period spirit mixed with despair and anger. Among them, 5.18 art, in particular, is the decisive part that has created a new paradigm for Korean art. It is thanks to the energy of Gwangju, which experienced a frontal disease that transformed the silent language created in the 1970s into a passionate realist language of the 1980s. Expressing the horrific tragedy at the scene of the Gwangju massacre in visual language itself was to reveal historical truths from silence to speech and from cover-up to revelation, so the 5.18 art had no hesitation in capturing shocking scenes and situations that had never been met before.

Hong Seong-dam's woodblock print series is the most representative of 5.18 art. Hong Seong-dam, who was a member of the civic group during the Gwangju uprising and engaged in promotional activities, recreated scenes and situations of massacres and resistance with vivid woodblock prints. The 50 woodblock print serials not only contained the whole process of the occurrence, development and termination of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in narrative composition, but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revealing and spreading the truth of Gwangju by compressing the spirit of Gwangju toward values of democracy, human rights and peace. In addition, the field art movement of artists, including Hong Seong-dam, greatly contributed to expanding the horizon of the popular art movement. It resulted in the co-evolving of exhibition art and field art.

Hong Sung-dam, a group of artists called the "Gwangju Free Artists Association," opened a civic art school. The artists' activities were mainly to go back and forth between one-way lines created by Atelier and presented at the exhibition hall. By the way, Hong Seong-dam and his colleagues tried to spread elite art into the art of the people by opening a civic art school that engraves prints with citizens and shares them with civil society. The precious legacy of popular art is not only in the great masterpieces of elite artists. This movement, which wanted to make art a seed for a public forum for civil society, produced and shared with citizens, is a great legacy of the 1980s, from a cultural and democratic point of view.

The art movement at the civic level did not end up in print. A wider public art movement was followed through the unique art style of Geolgae painting. Geolgae painting is a large-scale painting used to express the emotional solidarity of the crowds gathered in the square and street by painting together by various artists and citizens on a huge piece of cloth using the method of gwaebultanghwa, a style of Buddhist art. Many of the hanging paintings created by Hong Sung-dam and his colleagues, an art creation group and a visual media research institute, were living art that embodied the era by expressing the aspirations of the 1980s' democratization movement in a powerful painting.

The activities of Hong Seong-dam and his colleagues, which continued until the democratic achievement of 1987, widened the horizons of popular art and further the horizons of Korean art. It is the product of social and political dialogue in which artists who embraced the energy from the stream of huge history, such as the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responded to the call of the spirit of the times. There could have been a song of survivors since then because of the great spirit of sacrifice of Gwangju's civic students who sacrificed their lives by defending Jeonnam Provincial Government until the end despite the fear of death. May's soul, which fell for democracy, left together the great cultural heritage of 5.18 art and popular art amid the huge wave of democratization movements.


5.18 美術の第一歩、ホン·ソンダム
金俊起

歴史的な出来事に因んで芸術概念を創造することは、常に重量感に満ち溢れている。2.28芸術と4.3芸術がそうであるように、5.18芸術もまた、冷酷な歴史的事件を芸術的表現の素材とテーマにする点で、千醫万斤の重みを持つ。1980年、光州で起こった5·18光州民主化運動は、多くの市民の死をもたらし、少なからぬ歳月の間、光州は虐殺の真実を語ることができない沈黙の暗いトンネルを通り過ぎねばならなかった。その痛みを、誇らしい抗争の歴史として称える時代が訪れたが、虐殺の原因と過程と結果の真実究明はいまだ行われていない。このコラムは光州の苦痛を芸術作品に昇華した5.18芸術を断章的に考察する5.18芸術試論である。 

周知のとおり、5·18光州民主化運動の傷から立ち直った民主化運動は、1987年6月抗争で所期の実を結んだ。1987年以前と以後の短い歳月に、韓国の美術界には民衆美術という独創的な美術運動が誕生した。1979年を基点として、社会全般の政治的民主化の熱望とともに生まれた民衆美術運動は、美術の内側では、過度に節制された美術言語を強要するモノクローム中心の抽象美術が主流だった画壇に対する抵抗と挑戦だった。外向けには、噴出する民主化の熱気に同行し、社会批判的かつ社会参加的な芸術的表現と実践が美術運動の方式で表出されたのが民衆美術の社会的意味である。 

朝鮮時代末期から大韓帝国に至る時期は、前近代的な工芸概念の芸術が芸術独自の領域として定着し始めた時代だった。 しかし、日帝が強占した朝鮮は自生的な文化発展を成し遂げることができず、植民地状況で西欧化と植民化の過程の一環として美術文化が制度化した。1945年以降の解放空間で社会再構成の激しいエネルギーが沸き起こったが、分断と戦争による廃墟から再出発せざるをえなかった1960年代を経て、アカデミズムを乗り越えた抽象美術運動が現れたものの、1970年代という暗鬱な独裁時代はモノクロームのアバンギャルド美学を沈黙の白に追いやってしまった。 

このように芸術的表現が徹底的にタブー視された朴正熙の維新独裁期に、ひとり民主主義を歌った偉大な詩人がいた。金芝河がその主人公だ。1990年代以降、紆余曲折を経て徐々に時代精神の光が色褪せた人物だが、1970年代の抵抗芸術運動を率いた金芝河の存在は、茫々たる大海を照らす一筋の灯台のようだった。彼の存在は、一時代の暗さを乗り越える超越的な英雄の物語を作り出した。このように1970年代が金芝河の「英雄の時代」だったとすれば、1980年代は光州の5.18民主化運動が作り出した「集団知性」の時代だった。1970年代が「荒野」で叫ぶ超人の抽象言語だったとすれば、1980年代は目前で起きた前代未聞の虐殺事件に驚愕した市民、学生たちが叫ぶ怒りの絶叫だった。 

民衆美術は、このように絶望と怒りが入り混じった激情の時代精神を背景に誕生した。このうち、特に5.18美術は韓国美術の新しいパラダイムを生成した決定的部分だ。 1970年代が作り出した「沈黙の言語」を1980年代式の激情的なリアリズムの言語に変えたのは、全斗煥を経験した光州のエネルギーがあったからである。光州虐殺の現場で起こったその残酷な惨状を視覚言語で表現すること自体が、歴史的真実に対して、沈黙から発言へ、隠蔽から暴露へさらすことだったから、5.18芸術は、それ以前に遭遇したことのないような衝撃的な場面と状況を描くのに躊躇しなかった。 

洪成潭の木版画連作は、最も代表的な5.18美術である。光州抗争当時、市民軍の一員として広報宣伝活動をした洪成潭は、虐殺と抵抗の場面と状況を生々しい木版画作品で再現した。50点の木版画連作には、光州民主化運動の発生と展開、終了までの全過程が叙事的な構成で描かれているだけでなく、民主主義と人権、平和の価値を志向した光州精神を圧縮的に集約して、光州の真実を解き明かすの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た。また、洪成潭をはじめとする芸術家の現場美術運動は民衆美術運動の地平を広げるのに大きく貢献した。それは展示場美術と現場美術を共振化する一つの時代を実らせたのだ。

「光州自由美術人協会」という芸術家団体の活動を展開した洪成潭は、市民美術学校を開いた。 美術家たちの活動は、主にアトリエで創作し、展示場で発表するといった単線的な軸線を行き来することだった。 しかし、洪成潭と彼の同志たちは市民たちと一緒に版画を彫り、それを市民社会と共有する「市民美術学校」を開いて、エリート美術を民衆の美術に拡散しようとした。 民衆美術の貴重な遺産は、エリート美術家の偉大な名作だけにあるのではない。 美術を市民とともに生産し分かち合う市民社会の公論場の種にしようとしたこの運動こそが「文化民主主義」の観点からみた、1980年代という民主主義の時空間の偉大な遺産だ。 

市民運動レベルの美術運動は版画の領域にとどまらなかった。掛画という独創的な美術様式を介して、より幅広い大衆的美術運動が続いた。掛画は仏教美術の一様式である掛仏幁画の方法を用い、巨大な布に複数の作家と市民たちが一緒に絵を描き、それを広場や通りに展示して、集まった群衆の情緒的な連帯感を表現するのに使われた大型の絵である。洪成潭と彼の同志が協働した美術創作グループ、視覚媒体研究所が創作した多数の掛画は、1980年代の民主化運動への熱望を強烈な図像の大型絵画で表現して一時代を風靡した、生きた美術だった。 

1987年の民主化以降まで続く洪成潭と彼の仲間たちの活動は民衆美術の地平、ひいては韓国美術の地平を広げた。それは光州民主化運動のような巨大な歴史の流れから、そのエネルギーを受けとめた芸術家が、時代精神の呼びかけに応えた社会的かつ政治的な対話の産物である。死の恐怖から立ち上がり、最後まで全南道庁を死守し、命を捧げた光州市民、学生たちの偉大な犠牲精神があったからこそ、その後を生き残った者たちの歌が存在しえた。民主主義のために倒れた五月の魂は、民主化運動という巨大な波の中に、5.18美術と民衆美術という偉大な文化遺産を一緒に残してくれたのだ。


5.18藝術的第一步,洪成潭
金俊起

根據歷史事件,創造藝術概念始終充滿溢出的重量感。 正如2.28和4.3藝術一樣,5.18藝術也把那段冷酷的歷史事件作爲藝術表現的素材和主題,具有純粹千醫萬斤的重量。1980年在光州發生的5.18光州民主化運動,導致無可計數的市民死亡,多年來光州市不得不經過一條黑暗的沉默隧道,無法說出屠殺的真相。儘管現在已經到了以自豪的抗議歷史來紀念痛苦的時候了,但大屠殺的起因、過程和後果的真相查明工作尚未確立。 這篇文章是「5.18藝術試驗論」,它探討了5.18藝術,將光州的痛苦昇華為藝術作品。

衆所周知,在5·18光州民主化運動中重新崛起的民主化運動是以1987年6月抗爭結出了豐碩果實。 在1987年以前和之後的短短的歲月裏,韓國美術界誕生了稱之爲"民衆美術"的獨創性美術運動。以 1979年爲起點,與整個社會對政治民主化的熱情與同期誕生的民衆美術運動,是藝術圈內部對以單色爲主的抽象藝術為主流的抵抗和挑戰,因爲這些畫家的內在藝術語言被過度拘束。民衆美術的社會意義在於,隨着對外散發的民主化熱潮,以美術運動的方式表現批判社會的藝術表現和實踐。

朝鮮時代末期到大韓帝國時期是近代工藝概念藝術開始作爲藝術獨立領域佔據一席之地的時期。 但被日本帝國主義強佔的朝鮮沒能實現自身文化的發展,在殖民地的條件之下,文化藝術被規訓作爲西化和殖民化進程的一環。 1945年以後的解放空間裏,社會重組的能量沸騰, 但在因分裂和戰爭而遭到破壞的1960年代,雖然出現了超越學術主義的抽象美術運動,雖然出現了超越學院主義的抽象美術運動,但上世紀70年代的黑暗獨裁時代把單色畫的前衛美學推向了沉默的白色。

在這樣的藝術表現被徹底禁忌的朴正熙的維新獨裁時期,曾經有一位偉大的詩人唱過「個人民主主義」,這位主角是金芝河。 20世紀90年代以後,金芝河經歷迂迴曲折,逐漸失去了時代精神的光芒,但20世紀70年代引領抗爭藝術運動的金芝河的存在彷彿是一盞照耀茫茫大海的燈塔。他的出現喚醒了一個時代的黑暗英雄史詩。如果說1970年代是金芝河的「英雄時代」,那麼1980年代就是光州5.18民主化運動製造的「集體智慧時代」。如果說1970年代是在荒野高聲喊叫的抽象表現語彙,那麼1980年代是對在眼前發生的前所未有的屠殺事件感到驚愕的市民、學生們高喊的憤怒的吶喊。

「民衆美術」就這樣以夾雜着絕望和憤怒的激情時代精神爲基礎誕生。 其中,特別是5.18藝術是韓國美術新模式的產生的決定性部分。將70年代創造的"沉默的語言"改爲80年代式激情的現實主義語言,是因爲經歷了全斗煥時代的光州能量。因爲用視覺語言描述光州屠殺現場發生的慘狀本身就是對歷史的真相從沉默到發言、從隱蔽到揭露,所以5.18藝術毫不遲疑地描述了之前從未遇到過的衝擊性場面和情況。

洪成潭的木版畫連作是最具代表性的5.18美術。光州抗爭當時作爲市民軍的一員,展開宣傳活動的洪成潭生動地再現了屠殺和反抗的場面和情況。 50幅木版畫連作中,不僅把光州民主化運動的發生和展開、結束的全過程描寫成敘事性的結構,還壓縮性地集約了嚮往民主主義和人權、和平價值的光州精神,對查明光州的真相起到了重要的作用。另外,洪成潭等藝術家的現場美術運動爲民衆美術運動拓寬了領域,也使展示場的藝術和現場美術實現了共進發展。

開辦名爲「光州自由美術人協會」的藝術團體活動的洪成潭開設了市民美術學校。過去藝術家們的活動主要是在工作室創作,並在展場發表的單向循環形式。然而,洪城潭和他的同志們試圖通過開設一所民間藝術學校來將精英藝術傳播到人們的藝術中,該藝術學校與市民進行木版畫雕刻教學並與社會大眾分享。民眾藝術的寶貴遺產不僅在於精英藝術家的傑作。從文化民主的角度來看,這一運動試圖使藝術成為民間社會產生並與公民共享藝術的公共領域的種子,這是1980年代民主時空的重大遺產。

市民運動層面的美術運動不僅限於版畫領域,通過軸畫這種獨創的美術樣式,形成了更廣泛的大衆美術運動。 軸畫採用佛教美術的一種樣式:「掛佛畫」的方法,在巨大的布條上由多位畫家和市民共同繪畫,並在廣場和街道上進行展示,用以表達群眾的情感團結。洪成潭和他的同志合作的美術創作集團視覺媒體研究所創作的大多數掛畫都是將1980年代對民主化運動的熱望用強烈的大型圖畫表現出來,成為風靡一個時代的鮮活的美術行動。

洪成潭等人的活動一直持續到1987年民主化成果,除了擴大了民衆美術的視野,也進一步擴大了韓國美術的視野。這是從光州民主化運動等巨大歷史潮流中得到力量的藝術家響應時代精神號召的社會性、政治性對話的產物。從死亡恐懼中站起,死守全南道廳並奉獻自己生命的光州市民,還有學生們的偉大犧牲精神,這才讓倖存者們的歌曲得以生存。因為民主主義而倒下的五月之魂在巨大民主化運動的浪潮中同時留下了5.18美術和民衆美術這一偉大的文化遺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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