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술공간 오이 연극 ‘프로젝트 이어도’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기마경찰이 아이를 치고 가지 않았다면, 경찰이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1948년 4월 3일 무장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만약 72시간 평화 협상이 무사히 성사됐다면, 오라리 방화사건을 막았다면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제주4.3이란 역사를 조금씩 알아간다면 아마도 한 번 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을 법 하다. 중요한 변곡점을 지나면서 안타깝게도 실제 역사는 죽고 죽이는 구렁텅이로 떨어졌지만, ‘만약’이라는 가정으로 상상한다면 전혀 다른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았을까 곱씹어 보지만 결론은 공허한 마음 뿐이다.

제주 극단 ‘예술공간 오이’가 올해 두 번째 작품으로 들고 온 연극 <프로젝트 이어도>는 이런 상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고도의 과학 기술을 보유한 먼 미래에서 학살을 막기 위해 1947년 작은 섬 제주로 시간여행을 한다면 어떨까? 존재 자체로 변수인 미래인(人)은 과연 4.3이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을까?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 

작품은 이런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며 밀고 당기기를 시도한다. 그리고 SF(Science fiction)와 과거 사이에서 줄타기하면서 4.3에 대한 메시지를 단도직입적으로 관객에게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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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승유, 홍서해, 김지은, 이상철, 강영지, 현대영, 김소여, 김경미 배우. ⓒ제주의소리

# 하나의 무대, 과거와 미래 

<프로젝트 이어도>는 두 시공간이 한 무대 위에 존재한다. 무한 에너지 개발로 단일 정부가 전 세계를 통솔하는 가상의 미래와 1947년 3월 1일부터 약 1년 동안의 제주도. 

미래 정부는 수십 년 간 자리를 지킨 대통령(배우 김경미)의 독재와 그에 반발하는 반정부시위로 분쟁을 겪고 있다. 미래 정부는 아주 오래 전 ‘제주도’라고 불린 섬 전체를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곳에 무한 에너지를 개발한 천재 과학자(김소여)가 붙잡혀 들어온다. 

한때 대통령과 가까웠지만 지금은 멀어진 과학자는 반정부단체 ‘레드(Red)'의 수장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더불어 ’프로젝트 이어도‘라는 새로운 연구 흔적이 미래 정부 공권력인 연방수사국에 의해 발견되면서 ’프로젝트 이어도‘에 대해 추궁 받는다. 

제주는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열린 관덕정 앞에서 시작한다. 응원경찰의 발포를 예상하고 막으려 했지만 실패한 어도(현대영). 그는 기념식 현장에 있던 제주도민 도하(강영지)를 찾아가 자신이 미래를 볼 수 있으며, 이대로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실제 현실을 예측하는 어도를 신뢰하고, 둘은 중요한 4.3의 순간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려 한다. 

# 참혹한 4.3의 현실 속으로 한 걸음 더

<프로젝트 이어도>는 예술공간 오이가 매해 4월마다 4.3 작품을 무대에 올리겠다고 다짐한 이래 두 번째로 만든 작품이다. 

2018년 첫 4.3 작품인 <4통3반 복층사건>은 한 명의 생명이라도 살리려는 거대한 학살터 제주와 과도한 경쟁·부조리 속에 삶의 의지마저 상실해가는 현재를 ‘복층’이란 소재 안에서 표현했다. ‘살아있는 것’ 그 자체로 축복이자 가치 있는 가능성임을 강조한 수작이다. 같은 작품을 선보인 지난해에는 미국의 책임론에 힘을 실은 연출을 새로 추가한 바 있다.

<4통3반 복층사건>이 현재·과거의 이음, 삶의 무게에 방점을 뒀다면 <프로젝트 이어도>는 4.3의 비참하고 복잡한 피해 구조에 가까이 접근했다.

<프로젝트 이어도>에서 과거는 1947년 3.1절 기념식부터 다음 해 오라리 방화사건 직후까지 약 1년여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밟아간다. 그 중에서도 4.3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사건을 짚고 가는데 ▲3.1절 기념식 ▲4월 3일 무장봉기 ▲평화협정 ▲오라리 방화사건 모두 4.3이 대학살의 국면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작품은 사건을 단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4.3의 비참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무장대에 몸담고 있는 전직 학교 교사(김지은)가 봉기를 알리는 봉홧불을 붙이려고 하자, 도하는 꼭 총칼을 들고 일어서는 방법뿐인지 묻는다. 교사는 이미 수 백 명의 도민이 억울하게 갇히고 고문당하고 있다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더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외친다. 그럼에도 도하는 모든 친일파를 죽이진 않았다는 자신의 독립운동 경험을 이야기하며 무장봉기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거듭 만류한다.

무장대의 수장이 된 도하의 동생 도철(이상철)은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협박한다. “산에서 한 명이 내려가면 다음에 수십 명이 죽는다. 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형님에게 하소연한 뒤 매몰차게 경찰 가족을 살해한다.

남편 도하가 남긴 폭약을 들고 미군·토벌대와 마주한 영선어멍(홍서해)은 그 동안 군인·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무참한 짓들을 하나하나 읊는다. 꾹꾹 눌러 담는 감정으로 토해내듯이. 그리고 “괴물로 사느니 사람답게 죽겠다”는 말을 남기고 라이터를 열자 총소리가 울린다. 

원인을 따지는 게 무의미해진, 생과 사의 경계가 종이 한 장 보다 얇은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살았던 이들의 외침이 배우의 표정과 목소리를 빌어 극장을 채운다. 그것은 고립된 섬이 피로 물든 지옥도의 증언이다.

<프로젝트 이어도>는 지난 작품 <4통3반 복층사건>과 비교했을 때 4.3을 직접 말하고 묘사하는 비중을 늘리면서, 한 걸음 더 현장 안으로 들어간다. 관객이 느끼는 무게감 혹은 부담은 이전 보다 커지겠지만, 극단이 4.3을 표현하는 능력은 넓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반전 매력 뒤에 아쉬운 매듭

<프로젝트 이어도>의 미래 이야기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 결말이 궁금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구조를 띈다. 동시에 민의에 따르는 선한 권력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질문을 던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어도는 자신이 앞날을 볼 수 있다는 다소 생뚱맞은 말로 도하에게 접근한다. 동시에 미래에서는 프로젝트 이어도가 과거로의 시간여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과학자는 시민들이 독재의 위험성을 깨닫고 다시는 독재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과거 섬에서의 학살이 한층 키워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일종의 충격 요법을 제시한다.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낯선 존재 어도와 시간여행의 실마리가 하나씩 풀리면서 관객은 어도가 미래에서 온 인물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연방수사관 딘(현대영)이 과거로 돌아가 학살을 막겠다고 나서자 ‘딘=어도’라는 예측은 더욱 굳어지고, 관객은 작품이 ‘떡밥’을 어떤 전개로 풀어낼지 긴장감 있게 주시한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과학자는 시간여행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깜짝 공개한다. 동시에 자신을 배신한 딘과 대통령 모두를 속이고 몰락시킨다. 작품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관객의 예상을 유도하면서 극 말미 클라이막스에 와서야 반전 매력을 선사한다.

다만, 과거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다는 사실에 미래 이야기는 순식간에 힘이 빠지고 만다. 이어서 과학자가 “평화, 인권, 정의”가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온 우주 시민들에게 또박또박 알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웃음은 선사했지만 작품 전체를 매듭짓는 관점에서 메시지 전달까지는 미흡했다. 오히려 투박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다소 진부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는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총격으로 사망하는 도하가 숨이 끊어지면서 어도에게 부인을 챙겨달라고 당부하는 장면, 총상을 당한 어린 자녀를 치료할 생각은 없이 남편 도하는 분노에 차 독립군가를 부르고 부인은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아리송한 모습. 특히 관객 입장에서는 그리 위력적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어도의 발차기에 서북청년회 단원이 진지하게 고통스러워하며 옴짝달싹 못하는 장면은 꽤나 혼란스러웠다. 서북청년회 단원이 제주 여성을 겁탈하기 직전, 도하가 단원의 말투를 따라하면서 벌어지는 전개이기에 진지함 속에 웃음을 유발하는 효과를 기대했으나, 차라리 진지 혹은 웃음 한쪽으로 확실히 정했으면 어떨지, 지켜보는 입장은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었다. 

사소한 지적일 수 있으나, 제주 출신 경찰이 제주여성에게 칼을 건네주고 곧이어 등장한 서북청년단 단원의 바지 주머니에 꽂힌 다른 용도의 칼이 거의 같다. 객석에서는 ‘저 칼이 여성의 것이 옮겨 간 것인지’ 무척 헷갈렸다. 헐렁한 주머니를 대신할 군장 같은 대안이 적절해 보인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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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넓어질 예술공간 오이의 4.3

작품은 현재보다 과학기술이 훨씬 발전한 미래를 재현한다. 때문에 소극장과 연극이란 명확한 한계 위에서 SF장르를 얼마나 어색하지 않게 재현할지 여부는 <프로젝트 이어도>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다. 특히 가상의 세계를 재현하기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칫 지루하게 흐를 가능성도 다분한 배경 설명도 역시 최대한 매끄럽게 극에 녹아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프로젝트 이어도>는 이런 부분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영리하게 구분했다. 미래인을 상징하는 흰색 옷, 미래 정부의 로고, 조명과 효과음으로 재현한 인식 기능,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는 목젖이란 설정, 세계력 같은 용어가 대표적이다. 과학자-딘, 과학자-대통령 간의 심리전 속에 작품 배경을 설명하면서 덜 부담스러운 진행을 성사시켰다.

여기에 '단짝' 어도-도하 콤비는 웃길 땐 슬랩스틱(slapstick)도 마다하지 않는 유쾌함에, 진지할 때는 진지하면서 티격태격 공방까지 주고받는 역할을 부여 받아, 마치 버디 무비를 지켜보는 즐거움을 줬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무대 바닥이 회전하는 시도를 선보였다. 비록 수작업으로 돌리는 조건이지만 감정 표현과 동선을 강조해 보여줬다. 미래 정부가 제주도를 ‘바다 위 감옥’으로 만들었다는 설정도 상징성을 띤다.    

<프로젝트 이어도>의 가장 큰 매력은 상상력이다.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이 역사를 바꾸기 위해 응원경찰의 총격을 막고자 몸을 던지고 무장봉기도 말린다. 거기에 무장대 대장의 형이 평화협정을 성사시키고, 4.3으로 남편과 자녀 모두를 잃어버린 제주 여인이 폭약을 들고 미군과 토벌대 간부들 앞에 선다. 실제 역사에 상상력을 덧입힌 시도는 향후 예술공간 오이의 4.3서사에 기대를 품게 만든다. 

이상철, 고승유, 김경미, 김지은, 현대영 배우는 1인 2역 혹은 3역까지 소화하며 무대를 누볐다. 4.3의 실상을 담담하지만 곱씹으며 홀로 풀어내는 홍서해는 <4통3반 복층사건> 이후 오랜만에 연기자로 출연해 반가웠다. 강영지는 지난 <4통3반 복층사건> 때보다 연기 무게감이나 비중이 한층 더 커졌다. 오랜만에 오이 무대에 오른 과학자 박사 역의 김소여는 복잡한 성격의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애썼다.

# 기억해야, 잊혀지지 않아야 4.3은 산다

도하와 어도는 학살을 막으려 동분서주 뛰어다녔지만 결국 어느 것도 바꾸지 못한다. 간발의 차로 놓치거나 계획이 실패하며 3.1절 기념식, 4월 3일 무장봉기, 평화협정, 방화사건 모두 4.3진상조사보고서에 쓰인 대로 진행됐다. 그럼에도 학살을 막겠다는 신념 하나로 뛰어드는 청년 어도의 모습에서, 유족과 수많은 도민들의 염원을 자연스레 투영시키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도민들이 갈망해온 환상의 섬, 이어도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닐까.

<프로젝트 이어도>에는 현재가 없다. 과거와 미래 만 있을 뿐이다. “현재의 우리로 인해 먼 미래에는 4.3이 판타지가 될 수 있다”는 마지막 화면 문구는 지금 우리가 어도처럼 나서서 알리고 기억해야만 4.3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예언일 것이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

생존수형인들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가 수십 년 만에 가까스로 벗겨졌고 이제 재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실질적인 배·보상과 4.3 진상규명의 발판이 될 특별법 개정안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특정 정치 세력의 아집으로 끝내 20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새로운 국회에서 기대를 걸어봐야 한다. 4.3의 미국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속도가 느리고 때로는 발목이 잡혀 몇 걸음 뒤처지기도 하지만 도민·국민 상당수가 4.3의 진상규명과 기억투쟁을 지지하기에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 이 동력이 꺼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4.3의 진실과 가치를 사람들이 잊지 않아야 한다. 

4월이 되자 무대를 준비하는 예술공간 오이 단원들의 의지와 그 결실인 <프로젝트 이어도>가 높이 평가 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제주4.3, 그 아픔의 무게를 담아낼 주머니가 제게는 없습니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자 하면 때론 송곳이 되어 살을 찌르고 때론 쇳덩이가 되어 걸음조차 힘들게 합니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한 주머니는 찢어져 버립니다. 다만 예술이라는 허명을 믿고 찢어진 주머니를 이어 붙일 뿐입니다. 이 작품이 제주4.3을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 <프로젝트 이어도> 작가 겸 연출 전혁준

작품은 6월 7일까지 매 주말 오후 3시, 7시마다 열린다. 관람료는 현장 구매 1만3000원, 예매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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