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장편서사시 ‘한라산’ 저자 이산하 제주 첫 대담...“표현의 자유 도전하라” 

“제주4.3 당시 희생당한 영혼들이 편하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4.3평화공원 위령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합니다. 마치 유태인 추모비에서 무릎 꿇은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처럼.”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 제주4.3의 항쟁 정신을 생생하게 담아낸 장편 서사시 <한라산>으로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른 이산하 작가. 책이 나온 지 무려 33년이 흐른 뒤에야 제주에서 첫 공개 대담을 가졌다. 그는 4.3문학의 미래에 대해 ‘미국의 책임’ 같은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분야까지 뻗어나가면서, 표현의 자유에 과감히 도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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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제주에서 공개 대담을 가진 장편 서사시 '한라산'의 저자 이산하. ⓒ제주의소리

5일 오후 5시 제주시 삼도2동 갤러리 ‘포지션 민 제주’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987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편 서사시 <한라산>의 주인공 이산하 작가가 제주에서 대담을 연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마스크 착용, 손 소독, 발열 확인, 개인정보 게재까지 꼼꼼한 과정을 감수하고 자리를 채웠다.

이산하는 격동의 민주화운동 한 가운데 서 있었다. 1979년 경희대 국문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선전국에서 각종 유인물의 격문을 쓰면서 4년간 경찰의 수배 대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 고 박종철 열사, 고 김근태 의원 등 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과 인연을 맺는다. 

무엇보다 그가 쓴 <한라산>으로 촉발된 사안은 국내 대표적인 필화사건으로 손꼽힌다. 이산하는 <한라산>을 썼다는 이유로 1987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1년 6개월 형을 받았고 1년 복역 후 석방됐다. 

1987년 3월 세상에 나온 시집 <한라산>은 ▲1장 정복자 ▲2장 폭풍전야 ▲3장 포문을 열다 ▲4장 불타는 섬까지 총 27편의 시 작품으로 구성됐다. 4.3 무장봉기 전후 과정과 미군정, 이승만 정권, 반공 단체들의 만행을 과감하게 표현한 내용 때문에 저자뿐만 아니라 출판사 대표, 편집자 등이 당국에 구속됐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018년에 나온 <한라산> 복원판의 추천글에서 “아직도 <한라산>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전율과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작품은 제주의 피맺힌 역사와 비극을 모른 채 아름다운 신혼여행지로만 생각했던 ‘육짓것’들이 뒤늦게나마 그날의 ‘폭도’들에게 바치는 슬프고도 비장한 헌사”라고 설명한다.

거듭 말하노니
한국현대사 앞에서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 <한라산>의 <서시> 가운데 일부.

대담은 제주민예총과 제주작가회의가 마련한 4.3문화예술축전 ‘4.3문학 아카이브 기획전 - 지문’의 일환이다. <한라산> 발표 전후 과정과 흥미진진한 사연들, 4.3 문학에 대한 조언 등을 김수열 시인이 질문하고 이산하 작가가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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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산하 시인, 김수열 시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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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열린 대담 현장. ⓒ제주의소리

이산하는 “1986년 여름 어느 출판사 편집 직원을 만났는데 내게 ‘혹시 4.3사건을 아냐’고 물어봤다. 어느 일본책의 번역본이 회사에 들어왔는데 그것을 읽어본 사장이 겁을 먹고서, 그 뒤로 책이 캐비넷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아는 것은 1978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소설 <순이삼촌>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 책은 바로 4.3 당시 오사카로 도피했던 재일제주인 김봉현의 책 <혈의 투쟁사>. 이산하는 평소 알고 지내던 녹두출판사 편집장과 사장에게 <혈의 투쟁사>를 소개했고, 논의 끝에 이산하가 시(詩)로 각색하기로 뜻을 모은다.

이산하는 “이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관련된 모두가 구속되고 회사가 공중분해 될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며 “결과적으로 난 폭탄 운반책에서 제조책이 된 셈이지만, 당시 생각에는 4.3으로 미국 문제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장편 서사시 <한라산>은 4.3 재일제주인들의 증언 위주인 <혈의 투쟁사>를 기반으로 정 반대 성향의 자료도 거꾸로 해석하며 완성했다. 

그렇게 1987년 1월 집필을 마치고 <한라산>은 3월 ‘녹두서평’을 통해 발표된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책을 발간한 녹두출판사 사장과 편집장이 전격 구속된다. 이산하는 “당시에 안기부, 보안사, 서울시경에 이산하 체포조가 따로 있어서 거미줄처럼 동선을 조여 왔다. 출판사에 <한라산> 원고를 넘기기 전에 딱 한 사람에게만 보여줬는데 바로 채광석 시인이다. 채 시인이 원고를 쭉 읽고 나서 ‘너 10년간 도망가야 한다’고 딱 한 마디를 남겼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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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시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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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중에 서로 웃음 짓는 이산하(왼쪽), 김수열 시인. ⓒ제주의소리

도피 끝에 경찰에게 붙잡힌 이산하는 곧바로 서울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24시간 동안 물고문을 당한다. 그는 “평생 먹을 물을 다 먹었다”는 말과 짧은 웃음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고문을 당하면서 나로 인해 추가 연행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면서 굳은 심지도 강조했다.

이산하는 “당시 안기부는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대내외 공작 2가지를 세우고 있었다. 국외용은 KAL기 폭파 사건, 국내용은 나를 엮은 인천 노동자 정치교실 선동 사건이다. 그때 수사하던 사람들 표현을 빌리면 <한라산> 시가 워낙 ‘빨개서’ 누가 봐도 선동용이기 때문”이라면서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내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바로 황교안”이라고 밝혔다.

이산하는 재판 과정에서 서운했던 사연도 풀어냈다. 

그는 “구속되고 나서 처음에는 변호사가 없었다. 내 책을 제작해 구속된 녹두출판사 사람들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인) 회장 등이 재판을 맡았다. 그런데 변호사들이 나는 변호를 못 해주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당시 민변 회장은 ‘1987년 대선에서 DJ(김대중)-YS(김영삼) 단일화로 승리하면 사실상 법무부 장관을 맡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산하 사건은 변호사 바닥 용어로 ‘똥물 튀긴다’는 것이다. 시간이 쭉 지나서 관련한 변호사 한 분을 만났는데 70대 나이에도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너무 죄송했다’며 사과했다”고 밝혔다.

동료 작가들도 비슷하다. 이산하는 “필화사건인 경우에는 작가, 평론가들이 재판장에서 작품에 대해 변호를 한다. <한라산> 사건 역시 재판 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공론의 장이 됐다. 재판장에서 <한라산>의 문학적 가치를 알리면서 변호하는 것은 결국 4.3항쟁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똑같은 일인데, 당시 인지도 높은 유명 시인, 평론가들에게 변론을 부탁했다. 그런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 중에는 고은 시인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처음엔 변호사도 없었고, 이렇게 동료 문인도 도와주지 않으니 설치고 다니는 황교안 검사와 홀로 싸워야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면이 피폐해지고 날카로워졌다”고 씁쓸한 기억을 내비쳤다.

그럼에도 이산하 구명을 위해 국제적으로 활동한 미국 펜클럽 회장 ‘수전 손택’ 여사에게는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남겼다.

이산하는 석방 후 2년 간 제주에서 머문다. 처음엔 마무리 짓지 못한 <한라산> 2부를 완성할 생각이었지만 이내 생각을 접는다.

그는 “나는 4.3(문학)에 있어 라이터 하나 정도의 작은 불에 불과하다. 그 불을 어떻게 활용하는 지는 제주도민의 몫이다. 내 역할은 여기서 그쳐야 한다. 더 이상은 극단적으로 ‘4.3팔이’ 밖에 안된다고 생각했다”면서 “<한라산>은 비교하자면 뼈다. 살을 붙이려면 제주에서 10번은 씨 뿌리고 열매를 거둬야 가능하다고 봤다. 억지로 <한라산>을 완성하겠다는 양심의 가책이  나중에 밀려왔다. 더 이상 예전 <한라산>에 이어서 쓸 수 없었다”고 본인의 결심을 밝혔다.

또 “2년 간 제주에 머무르면서 도민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30명 정도 모인 자리였는데 ‘앞으로 4.3은 이산하가 다 장사할 것 같다’는 말로 나를 경계 했다. 그때 ‘4.3으로 돈 안 벌겠다, 상업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강조했다.

이산하는 석방 후 10년 간 글을 쓰지 않고 여러 민주화, 인권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998년이 돼서야 시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재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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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서사시 '한라산'과 김동윤 문학평론가의 설명.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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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시인의 재판 관련 공판 조서. 가운데 '검사 황교안'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제주의소리

그는 ‘4.3문학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영역까지 도전하면서, 방식도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산하는 “소설 <순이삼촌>은 피해자의 관점이고, <한라산>은 항쟁사를 다룬 시다. 투쟁 주체를 부각 시켰기에 과격할 수밖에 없고 일부분 이념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다소 앞서가는 부분이 있다”면서 “몇 년 전 다크투어를 주제로 한 독일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20곳 이상 둘러보면서 ‘2차대전 당시 나치 전범들이 어디로 갔을지’ 고민하면서 추적 작업을 했다. 예컨대 나치 정보요원 가운데는 미국 CIA로 흘러들어가 동아시아 전략을 짠 사람도 있다. 그 전략 중에는 제주4.3도 포함돼 있다. 나치와 4.3이 어떤 관계로 이어지는지 계속 추적했다”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더불어 “제주4.3 당시 희생당한 영혼들이 편하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다. 유태인 추모비에서 무릎 꿇은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처럼 미국 대통령이 4.3평화공원 위령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한다”면서 “4.3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미군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에 대해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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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시인의 항소이유서. ⓒ제주의소리

이산하는 끝으로 “<한라산> 재판 받을 때 고등법원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적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시도였다. 앞으로 제주4.3 문학도 표현의 자유에 있어 선도적으로 치고 가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대담이 끝나고 나서는 1987년 결성한 제주청년문학회의 공동창작시 <용강 마을, 그 피어린 세월>을 제주 시인들이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 포지션 민 제주에서는 6월 30일까지 아카이브 기획전 <지문>을 이어간다. 전시장에는 이산하가 쓴 항소이유서, 법정 최후진술을 비롯한 4.3문학의 역사를 각종 자료와 함께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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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창작시 '용강 마을, 그 피어린 세월' 낭독.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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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풍경.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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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문학의 결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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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순이삼촌' 자료.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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