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세이레 연극 ‘세 마녀’

11일 극단 세이레의 연극 '세 마녀' 출연진.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양순덕, 설승혜, 정민자. ⓒ제주의소리
11일 극단 세이레의 연극 '세 마녀' 출연진.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양순덕, 설승혜, 정민자. ⓒ제주의소리

'몸에 딱 맞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멋진 연극이었다.

제주 극단 세이레의 올해 두 번째 연극 <세 마녀>는 거장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맥베스>를 기초로 한다. 엄격히 말하면 <맥베스>를 각색한 홍창수 작가의 <세 마녀>가 원작이다. 지난 2003년 밀양여름연극축제에서 극단 인혁과 이기도 연출을 통해 처음 소개된 바 있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 장군 맥베스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맥베스는 최고 권력자인 던컨 왕을 시해하고 손수 왕위에 오르지만, 가시지 않는 불안함과 죄책감에 무리한 숙청을 이어간다. 남편 맥베스를 부추겼던 아내는 던컨 왕 망령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은 왕은 최측근 무관(武官) 맥더프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세 마녀>는 극 안에 또 다른 극이 등장하는 액자형 구성이다. 맥베스 장군을 기다리다 지루해진 <맥베스> 속 마녀들은, 자의적으로 ‘맥베스’ 이야기를 만든다. 그 중에서도 ‘맥베스의 아내’에 비중을 둔 새로운 해석이 극의 중심이다.

역모를 머뭇거리는 남편을 떠밀었지만 몽유병과 신경쇠약으로 자멸한 원작과 달리, <세 마녀>에서 왕비는 ‘판을 만드는’ 주도적인 성격으로 탈바꿈 한다. 멕베스와 맥더프, 맥베스의 동료 뱅코우, 던컨 왕의 아들 맬콤까지. 자신 주변의 남성 권력자들이 죽고 죽이며 몰락하는 와중에 그녀는 나름의 전략으로 역경을 딛고 끝내 자리를 지킨다. 

시체 사이 왕좌 위에 홀로 서서 뱃속의 아이를 어루만지는 왕비. 냉혹한 현실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독백은 ‘센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제일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가장 세다’는 냉정한 금언과 일맥상통한다.

<세 마녀>는 왕비 뿐만 아니라 점차 변모하는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보는 재미가 있다. 모시던 왕을 향해 칼을 겨눴지만 “나가고 싶다”고 망설이던 맥베스, 거사를 앞두고 흔들리는 남편 맥베스를 향해 “짐승”을 반복해서 외치게 하며 몰아붙이는 아내.

시간이 지나 맥베스 왕은 불안함에 사로잡힌 아내를 향해 오히려 “메두사”라고 일갈할 만큼 자신감을 얻었다. 그에 비해 아내는 반대로 갈수록 초조해지지만 본인 손으로 사태를 매듭짓겠다는 '결자해지' 의지로 위기를 극복한다. 맥베스는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희미해지고, 좁아지는 입지에 전전긍긍하는 허약한 권력자로 전락하며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뱅코우를 왕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처단하면서 비통해하지만, 이내 맥베스를 향한 적개심에 사로잡힌 끝에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는 맥더프까지.

<세 마녀> 속 등장인물은 욕망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욕망에 몸을 맡긴 자연스러운 변화일까, 혹은 더러운 타락일까. 작품은 무엇이 옳다고 정의 내리기 보다는 인간의 연약함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세 마녀가 서로 맥베스를 연기하겠다고 나서면서 ‘세 명의 맥베스’가 등장할 때는 혼란스러운 맥베스의 여러 내면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로웠다.

# 능숙하면서 빈틈없는 연기, 무대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조명

<세 마녀>가 인상 깊은 이유는 출연진의 열연과 함께 무대 연출을 빼놓을 수 없다.

마녀 1역의 배우 양순덕은 아주 짧은 순간 표정이라도 깊은 내면의 불안감을 놓치지 않으며 작품 내내 맥베스에 집중했다. 마녀 3, 설승혜는 줄타기 같은 맥베스 아내의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무엇보다 마녀 2, 정민자는 이번에 모처럼 배우로서의 생기를 뿜어냈다. 정민자는 <늙은 부부 이야기> 이후 1년 만에 세이레 무대에 섰다. 긴 포효에 칼을 휘두르고 뛰는 몸짓 하나 하나가 ‘나는 영원한 연극배우다’라고 말없이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은 반가우면서 동시에 애틋했다.

<세 마녀>는 최근 제주 소극장 연극 가운데 모처럼 밀도감을 선사한 작품이었다. 이는 조명과 무대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극 진행 상황마다 조명은 꼭 필요한 위치에 알맞은 농도와 힘으로 움직였다. 돌변하는 푸른 빛과 함께 명암 효과가 극명하게 대비된 맥더프의 뱅코우 살해 장면이나 흐트러짐 없이 얼굴에 붉은 빛이 모아진 던컨 왕 망령의 독백 같은 장면에서는 대사와 몸짓만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을 조명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된 조명 덕분에 관객은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세 마녀> 조명은 배우로도 주목받은 이주민이 담당했다.

천장과 바닥을 잇는 길다란 천과 3단으로 나눈 단상, 그 위에 놓인 의자. 무대 구성은 힘을 뺀 가벼운 모습이지만 마녀 셋, 권력 등 작품 내용과 메시지를 적절하게 내포해 오히려 무게감이 느껴졌다. 작품 배경인 16세기와 크게 어색하지 않은 의상, 무난한 음향까지 모든 연출 요소가 균형있게 어우러졌다.

무대 제작은 강상훈, 의상은 김이영, 음향은 박현수, 분장은 신예경, 기획은 박은주, 진행은 이영원·고정민·현유상·장문정이 맡았다. 표지 그림은 홍진숙 작가, 프로필 사진은 허영숙의 작품이다.

한동안 극단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작품 숫자뿐만 아니라 최근 내용도 다소 아쉬웠던 극단 세이레에게 <세 마녀>는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이번 작품이 세이레에게 맞춤형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마녀 세 명이 등장인물인 구성은 극단 세이레의 주축인 베테랑 여성 단원 세 명과 딱 맞는다. 연출가로서 정민자가 가진 원칙론적인 연극 철학과 셰익스피어 고전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이번 작품이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가 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다. 지금 극단 세이레에게는 자신감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동이 트기까지 아직 새벽은 끝나지 않았으니 완성도 있는 무대에 대한 자신감이 쌓이고 쌓일 때, 비로소 재도약의 발판이 만들어지리라 조심스레 덧붙인다.

한 바탕 <맥베스> 놀이를 하고 나서 “다음은 햄릿?”이라고 호탕하게 웃음 짓는 마녀들처럼 셰익스피어 유니버스를 누벼도 좋다. 오히려 최근 제주 연극계에서 고전은 새롭게 느껴진다. 

<세 마녀>는 14일까지 오후 7시 30분 세이레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ps. <세 마녀> 출연진과 관객을 둘러본다. 개점 휴업 상태인 연기 강사, 올해 문화 행사에 한 차례도 출연하지 못한 퍼포머, 무대가 간절한 음악인…. 코로나19 시국에서도 예술가들은 창작을 고민하고 서로를 격려한다. 경제적인 이유를 넘어 '예술'로서 본인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숙명 같은 이유다.  제주도 문화정책과, 제주문화예술재단 같은 제주 예술 행정이 예술가들의 고뇌와 현실을 현장에서 더 많이 듣고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을 세이레아트센터를 나오며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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