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69. 정도상, '꽃잎처럼', 다산책방, 2020.

1.
인간의 감각 기관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현실이 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일어나는 일들의 낱낱을 보고 들으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압도함으로써 감각 자체를 동결시켜버린다. 그 순간,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은 분명 현실이되, 현실의 실감을 상실하고 현실의 경계를 훌쩍 넘어버린 ‘비현실’과 뒤섞인다. 현실·비현실이 혼재된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하며, 그 세계 속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2.
정도상의 장편 《꽃잎처럼》은 이와 같은 물음을 묻는다. 이 소설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그동안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문제작들을 상기해볼 때 정도상의 《꽃잎처럼》은 이들 문제작의 계보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것은 《꽃잎처럼》이 ‘5.18광주’의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꽃잎처럼》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항쟁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바, 특히 광주도청에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한 광주시민군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서사적 실천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1980년 5월 26일 저녁 7시부터 5월 27일 새벽 5시 15분까지 한 시간 간격을 두고 광주도청의 시민군이 곧 들이닥칠 계엄군의 공격에 대한 준비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차분히 목도한다. 무엇보다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대하는 시민군의 내면 풍경에 대한 진솔한 접근은, 계엄군에 맞서 싸운 도청의 시민군을 역사적 평가의 척도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시민군도 엄연히 가혹한 세계의 폭력 속에서 노출된 실존임을 드러낸다. 

가령, 시민군으로 참여하고 있는 작중 화자 ‘나’의 동갑내기 또래 4인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실행될 것이라고 예견된 5월 26일 자정을 두 시간 정도 앞둔 시간 도청 분수대 근처에서 대중가요에 대한 잡담을 주고받는가 하면, 심지어 수찬과 ‘나’는 노래를 나지막이 흥얼거리며 읊조리며 부르기도 한다. 나애심, 김정호, 김상국, 조용필, 양희은 등의 국내 가요와 팝송까지 망라하는 대중가요와 연루된 이들 4인의 유쾌하고 명랑한 잡담과 흥얼거림의 장면은 시민군을 대문자 역사, 즉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주체로서만 평가되는 데 국한시키는 게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시민군이 매순간을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저버리지 않으면서 죽음의 두려움을 담담히 대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 4인은 각자 자신의 삶과 연루된 대중가요로부터 무심결 쏟아져 나오는 작고 하찮은 자신들만의 삶을 신나게 늘어놓는다. 이제 두 시간 정도 지나면, 자신들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두 시간 후의 미래를 확정할 수 없는 절대 공포를 마주하면서 이 4인은 ‘낭만적 초월’의 경이로움을 그들에게 익숙한 삶문화(대중가요)의 형식으로 견디고 있는 것이다. 

대중가요가 그렇듯, 작중에서 흥얼거리는 노랫말에는 사랑과 이별이 본바탕을 이루는 만큼 4인은 짧은 생애를 반추하면서 그들만의 사랑과 이별의 역사, 달리 말해 소문자 역사를 소중히 부둥켜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작가의 이러한 서사가 이들 4인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4인의 수다 속에서 불려지는 위 가수들과 노랫말은 4인의 대중문화 감각을 넘어 도청 시민군, 그리고 도청 밖에서 시민군을 간절히 응원하고 있는 광주시민들 모두를 망라하여 민주주의의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사랑과 이별의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작가의 서사 욕망에 이어진다. 

3.
이처럼 도청의 시민군은 그들을 옥죄는 죽음의 사위 속에서 생명의 숨을 결코 놓지 않는다.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계엄군으로 꽉 막힌 도청 안에서 시민군은 이렇게 ‘낭만적 초월’로 죽음을 역사의 패배자가 맞이한 그것이 아니라 역사의 승리자가 결연하게 맞이한 그것으로 전도시켜 매순간 살아간다. 이것은 시민군의 대변인 작중 인물 상우가 계엄군의 진압 작전 실행이 임박할 무렵 도청에 남은 시민군에게 광주 민주화항쟁이 추구하는 세 가지 과제(구국과도정부, 민주주의 쟁취, 남북통일)를 명료화함으로써 시민군의 항쟁의 정치적·윤리적 합목적성을 보증한다. 

“우리는 패배할 것이나 패배하지 않을 것이고, 승리하지 못할 것이나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오늘 밤의 이 싸움을 피하면 우리는 영원히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싸움에서 패배하게 될 지라도 우리는 끝내 승리하게 될 것이고요. 그래서 나는 오늘 밤, 내 손에서 총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184쪽)

논리형식적 면에서, 상우의 이 비장한 다짐에는 역설의 숭고함이 있다. 상우뿐만 아니라 도청에 남은 시민군을 휩싸고 있는 내면의 심경은 바로 이 ‘역설의 숭고성’이 지닌 경이로움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낭만적 초월’의 경이로움과 또 다른 성격의 그것이다. 공수부대로 꾸려진 정예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탄창 하나에 적게는 세 발, 많게는 열 발이 지급되었을 뿐”(74쪽)인 시민군의 무장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바, 이 싸움에서 패배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상우를 비롯한 시민군은 이 자명한 사실을 ‘역설의 숭고성’으로 전복시키고 있다. 그래서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자로 기록할 것”이므로, “나이 어린 학생들은 살아남아 오늘의 목격자가 되어 역사의 증인이 돼주시기 바랍니다”(75쪽)고, 사실을 넘은 역사의 자명한 진실을 증언해줄 미래를 선취(先取)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청의 시민군은 “손에서 총을 놓지 않”는다. 

4.
작가 정도상은 이 같은 시민군의 ‘역설의 숭고성’이 지닌 경이로움이야말로 우리가 쉽게 망각해서는 안 될 1980년 광주가 외롭게 지켜나갔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고갱이임을 서사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 시간은 광주 도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객관화하는 물리적 시간으로서 의미, 곧 계엄군에게 참담한 희생을 당하는 수난사로서 시간의 의미보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 속 수난의 시간을 항쟁의 역사적 승리자로 전복시키는 시간의 의미를 갖는, 즉 민주주의 역사를 새롭게 생성시키는 ‘역사의 시간’의 경이로움으로 발견된다. 그러니까 정도상의 소설 속 시간 구성은 좁게는 광주 민주화항쟁, 넓게는 한국 민주화항쟁의 ‘역사의 시간’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재구축하는 서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표면상 시민군을 에워싸고 있는 시간은 죽음과 절멸의 시간이 아니라 그것을 무화시켜버리는 또 다른 삶과 탄생의 시간이다. 바꿔 말해, 시민군이 계엄군과 대면하면서 계엄군의 총칼에 살점이 찢겨지고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불모화된 시간은 시민군의 불가항력적 저항이 지닌 새로운 역사의 탄생을 위한 정화의 시간이리라.

이 정화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지난 시기 민주화운동에서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민군에 참여한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21세기의 현실로 소환한다. 사실, 언제부터인지 한국소설에서 급물살 빠지듯, 자취를 감춰버린 민주화운동의 구체적 리얼리티는, 겉으로는 한국사회의 안팎 급변화한 현실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는 매우 거칠고 성급한 문학사적 알리바이를 들이댔지만, 정작 한국문학은 부화뇌동하는 그 문학사적 알리바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치열한 통과의례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199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과 연관된 그 풍요로운 리얼리티를 한층 깊숙이 탐구하지 못했다. 이러한 저간의 한국문학의 동향을 냉철히 반성해볼 때, 《꽃잎처럼》에서 다시 주목하는 민주화운동의 정치문화적 담론과 실천은 이후 한국문학이 다시 재해석하고 발견해야 할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서사적 과제로서 손색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작품의 종반부에서 우리가 좀처럼 잊힐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작중 화자 ‘나’는 계엄군의 파상적 공격 속에서 옆구리에 총을 맞아 죽어가는데, “옆구리에는 상우 형이 담겨 있었다. 옆구리 속에 웅크리고 앉은 상우 형이 흥건하게 피를 흘렸다. 희순이 손을 뻗어 상처를 만져주자 옆구리가 자궁으로 변했고 이어 상처 위에 놓인 희순의 손가락이 서서히 배추흰나비로 변했다.”(233-234쪽) 광주의 어느 야간 강학에서 선생으로 만난 상우 형과 희순, 그들은 강학에서 노동자 계급의 모순과 분단 모순에 대해 공부하고, 노동자로서 계급적 각성에 눈을 뜨고, 모순된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운동을 노학연대로서 실천하지 않았던가. 비록 그들의 염원은 작품 속에서 도청 시민군의 현실적 패배로 산산조각 났으되, 정도상 작가는 그들 개별 죽음을 분리하지 않고 연접하는 상상력을 통해 그들의 죽음을 서로 회통(會通)시킨다. 이 회통은 ‘배추흰나비’로 거듭나고, ‘나’는 “배추흰나비를 따라 걷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희순을 만났”(234쪽)으며, 희순과 ‘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과의 행복한 일상을 사는 ‘환(幻)’을 보여준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환’에서 보이는 평화로운 일상이야말로 작가가 《꽃잎처럼》에서 이르고 싶은, 그래서 도청 시민군이 역사의 승리자로 기억되어야 할 이유다.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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