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76. 글도 초면, 나도 초면

* 초멘 : 초면(初面), 첫 대면

말재간 한번 좋다.

세상에 글이란 걸 읽고 써 본 적 없는 일자무식한 자는 글을 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연히 글도 그 사람을 대면한 적이 없다. 글을 난생 처음 대하고 있으니 글 또한 난생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의 체면이란 게 그렇지 않은지라 대인관계에서 “나는 글을 전혀 모르는 무식자요” 하고 실토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니 남 앞에서는 차마 자신의 위신을 세우지 않을 수 없은즉, “글을 처음 보고 있고, 글 또한 나를 처음 보는 것이오”라 어물쩍 넘기는 것이다. 글을 모른다고 대놓고 말하면 자신이 한순간에 망가지고 말 것은 뻔 한 일이 아닌가. 따라서 어불성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함이다.

그때를 모면할는지는 모르나 금세 들통 나고 말 일이다. 그러니까 당장은 무식자라는 평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임기응변에 불과한 것임은 말할 것이 없다. 사람이란 제각각이어서 예전에도 이렇게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 없었겠는가. 문맹은 당장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고, 나중엔 한(恨)이 맺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예 입을 다물어 침묵할지언정 글 모르는 자가 글을 아는 것같이 행세하려니 진땀께나 쏟을 일이다. 일단 ‘글도 나도 서로 처음 본다’고 넘기는 재치와 기지는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2017년 서귀포 오석학교 50주년 기념 행사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주 야학학교 '서귀포 오석학교'의 지난 2017년 50주년 기념 행사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한편 옛날 못 살던 시절, 우리 조상들 대부분이 글을 배우지 못한 채 한평생 까막눈으로 살려니 얼마나 답답하고 가슴 아팠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여자는 해방 직후에서 십여 년이 지나도 학교에 잘 보내지 않았었다.

그래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夜學)에 나가 한글을 공부하고 셈을 익히곤 했던 시절이 있다. 오늘날엔 문맹이 퇴치돼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하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된다.

‘보름을 눈 트곡, 보름은 눈 어둑나’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달을 전·후반으로 나누어 열닷새는 눈이 떠 글이 잘 보이고, 나머지 열닷새는 눈이 어두워 글이 보이지 않는다 한 것이다. 이 또한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자신의 무식함을 드러낼 수 없어 임기응변으로 넘어가려 한 화법(話法)이다.

오죽 했으면 그렇겠는가, 그 속셈을 떠올리고 보면 안쓰러운 생각에 가슴 뭉클하기도 하다. 글 모른다 하기가 얼마나 쑥스러웠으면 둘러댔을까를 생각게 하는 것이다. 한데 누가 무슨 문서를 들고 와 봐 달라 했을 때, 마침 내 눈이 어두울 때라 말할 명문이 설 게 아닌가.

참으로 구차하기 그지없는 궁여지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우회적 화법을 구김살 없이 쓰고 있는 걸 보면서 선인들의 말을 그때그때 자기 처지에 맞게 쓰던 재주가 요즘 수사(修辭) 못지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글도 초멘, 나도 초멘’, 이제 와서는 못 살고 못 배우던 옛 시절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잠시 눈을 감게 한다. 상전벽해로 격세지감이 든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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