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포스트 코로나, 포스트 플로이드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여기저기서 ‘포스트 코로나’가 입에 오르내린다.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글로벌자산운용사인 블랙록 최고경영자 래리 핑크가 한 이 말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가 일했던 방식, 소비하던 방식, 여행하는 방식, 모이던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지만 여기저기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경제학자 지타 고피나스는 코로나19(COVID-19)가 야기한 세계 경제 침체가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경기가 될 것이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IMF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빗대어 ‘대봉쇄’(Great Lockdown)로 칭했다. 

대봉쇄 시대에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했다. 유산 계층은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지만, 무산 계층은 그야말로 위기에 처했다. 경제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살피는 사회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올바른 국가권력이라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포스트 플로이드 시대에 사회적 약자를 살펴야 한다. 왼쪽은 미국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누르는 백인 경찰관의 모습, 오른쪽은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작업 현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코로나만큼은 아니어도 우리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한 달 전인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했다. 2020년 5월 25일,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백인 경찰관의 왼쪽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사했다. 당시 플로이드는 “I can’t breathe” 숨을 쉴 수 없다며 거친 숨을 내쉬었지만, 죽음으로 이끈 과잉 진압은 ‘8분 46초’나 행해졌다. 

플로이드 사건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흑인 사회는 (잘못된 형태로 일부 나타나기는 했지만) 격렬하게 반응했고, 인종 차별에 대한 사회 각계의 비판이 쏟아졌다. (믿기 힘든 영상도 있었지만) 일부 경찰관들은 시위대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흑인과 백인이 한자리에서 함께 무릎을 꿇기도 했다. 

흑인들은 이번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또 다시 인정 투쟁에 나섰다. 경찰의 잘못된 공권력 사용을 규탄하고 사회 곳곳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에 항의했다. 흑인 사회는 ‘주체로서의 정체성’(I-Identity)에 기초해 자신의 ‘객체로서의 정체성’(Me-Identity)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함을 절감하고 ‘새로운 객체로서의 정체성’(New Me-Identity)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투쟁 이후에도 흑인의 인권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20년 6월 11일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방영된 ‘바이러스 전쟁 2부 – 대봉쇄: 바이러스가 만드는 세계’를 보니, 흑인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코로나19와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야기된 흑인의 분노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겠다. 백인 거주지 대비 흑인 거주지 코로나19 감염률은 3배였고 사망률은 6배였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S)’ 푯말은 조지 플로이드 뿐만 아니라 코로나를 향하고 있다. 

영상 속 10살 흑인 남자 아이가 농구를 하다 경찰차를 보고 옆에 있던 차 뒤에 몸을 숨긴다. 짧은 영상이지만 마음이 멍해진다. 어린아이의 마음에도 상처가 남았다. 제도의 개선이 뒤따라도 사회 인식의 변화는 곧장 따라오지 않는다. 플로이드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제주는 4.3이라는 국가폭력의 큰 아픔을 겪었다. 국가 공권력의 폭력은 잦아들었지만 세계 곳곳에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이 많다. 아픔을 겪었기에 아픔을 겪는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혐오와 증오에 대항해 관용과 승인, 연대를 선택해야 한다. 국가권력을 위해 국민이 있는 게 아니다. 국민을 위해 국가권력이 존재한다. 헌법 제1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 되었다. 일부에게만 봉사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군림하려 한다면 바람직한 권력이 결코 아니다. 올바른 국가권력이라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포스트 플로이드 시대에 사회적 약자를 살펴야 한다. 이 당연한 말을 코로나나 플로이드는 되내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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