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홍한별 1인극 ‘흩날리는 검은 씨앗’, 즉흥극단 맘트라 ‘서랍 속 꿈 이야기’

코로나19로 숨죽이던 제주 연극계가 서서히 기지개를 피고 있다. 수개월 간 꼼짝도 못한 극단들이 하나 둘 작품을 올리고 다음 작품도 준비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기지개라기 보단, 참던 숨을 버티다 못해 다급하게 내쉰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지역 감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발병 사례까지 더해, 다시 한 번 대확산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속된 말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라는 극단적인 외침이 나올 만큼 공연 예술계는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연극 현장도 할 수 있는 방역 조치에 만전을 기하면서 작품을 올리는 수밖에 없는 처지다. ‘코로나와의 동거’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주 제주에서 열린 배우 홍한별의 1인극 <흩날리는 검은 씨앗>과 즉흥극단 맘트라의 연극 <서랍 속 꿈 이야기>는 꽉 막힌 현 시국 속에서도 ‘가능성’이란 씨앗이 꿈틀대는 무대였다.

# 꼬닥꼬닥 앞으로 향하는 제주 청년 연극인

제주 출신 홍한별 배우가 27일 봉성리하우스씨어터에서 선보인 <흩날리는 검은 씨앗>은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를 각색한 1인극이다. 원작은 전 유럽이 ‘흑사병’ 공포에 빠진 14세기의 암울한 현실을 건조하게 기록한다. 홍한별은 아버지를 페스트로 떠나보낸 작가지망생 여인을 연기한다.

작품은 5부로 이뤄진 원작 소설 가운데 일부분(2부)을 참고해 대사로 작성했다. 주목할 점은 배우의 몸동작이 대사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 흑사병 이전 삶에 대한 그리움, 감염병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함과 공포심..., 한 개인의 복잡한 심정을 홍한별은 힘겨운 몸동작으로 표현한다. 의자를 안고서 몸을 굴리고 탁자 위에서 두 다리를 하늘 위로 뻗는다. 기울어진 의자에 맞게 몸을 기대며 힘겹게 무게 중심을 유지한다. 중력에 저항하면서 떨리는 근육은 곧 작품 속 화자가 느끼는 내적·외적 고통과 이어지는 흥미로운 경험이다. 말과 표정만큼이나 배우의 몸동작은 무대에서 큰 무기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한다.

ⓒ제주의소리
'흩날리는 검은 씨앗'을 공연한 배우 홍한별. ⓒ제주의소리

<흩날리는 검은 씨앗>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감염병’이란 동일한 고민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밀폐된 침묵의 도시” 안에서 “페스트가 깃든 태양이 모든 기쁨을 빼앗아버렸다”는 울부짖음은 14세기 유럽과 21세기 전 세계 양쪽 모두를 향한다. 약 600년 전 사람들의 심정이 오늘 날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공통점은 비극적인 안타까움과 동시에 묘한 위로로 다가온다. 

작품이 지닌 또 다른 가치는 배우에게 있다. 이번 작품은 홍한별이 강원도 소재 극단 노뜰에서 수련하면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지난 5월 15일과 16일 ‘같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각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내는 작업’인 <배우展>의 네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소개됐다. 그는 지난 2월 노뜰이 제주에서 개최한 4.3 공연 <침묵>을 보고 나서, 몸짓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노뜰의 방식을 배우고 싶어 강원도까지 찾아갔다.

본인의 삶에 대해 한창 고민할 30세 나이에 홍한별은 끈질기게 ‘무대’와 함께 했다. 예술극단 오이, 연극공동체 다움, 제주시 뮤지컬 아카데미, 극단 노뜰, 그리고 제주아트센터 공연 안내 아르바이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예술가, 더욱이 연극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게 험난한 가시밭길이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무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홍한별뿐만 아니라 이날 10석 남짓 객석을 채운 동료 연극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 다시 만나는 꿈, 나를 치유시킨다

플레이백 시어터(Playback Theatre)는 1975년 뉴욕에서 생겨난 연극 장르다. 선구자격인 조나단 폭스의 책 《플레이백 시어터의 이해》에서는 ‘대본 없이 관객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객과 배우가 함께 만들어가는 연극’이라고 설명한다.

반 백 년도 안된 새로운 예술이 최근 제주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즉흥극단 맘트라’가 주인공이다.

맘트라는 2004년부터 한국에서 플레이백 시어터를 선보인 극단 ‘목요일오후한시’에서 활동한 배우 권민정(활동명 니모)이 근래 제주에 이주하면서 창단한 극단이다. 지난해 가을 창단 공연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아직 돌잡이도 못한 신생 단체다. 권민정은 이전 극단부터 약 12년간 플레이백 시어터를 매진해오고 있다. 여기에 배우 드리(문미영), 리나(이하나)와 악사 알맹(이소선), 기린(이영주)을 더해 5명이 한 팀을 이루고 있다.  

맘트라는 지난 26일 김택화미술관 초청으로 연극 <서랍 속 꿈 이야기>를 공연했다.  관객이 그린 꿈 이야기 그림을 보고 현장에서 재현하는 작품이다. 준비물은 종이와 펜, 목재로 만든 정사각형 구조물 세 개와 여러 색깔의 천이 전부다. 즉석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폴리아티스트(악사)도 빼놓을 수 없다. 

비현실적이든 현실적이든 꿈은 우리의 일상, 내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커다란 고래와 마주보거나 바다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가득 품에 안는 태몽부터, 남편의 새 아내를 태우고 달리거나, 머리에 달린 커다란 뿔이 잘리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군 입대 순간까지. 이날 관객들이 그린 꿈 그림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든다.

맘트라의 극 진행은 투박할 만큼 솔직하다. 그림을 보며 꿈의 내용과 배경을 하나씩 물어보며 충분한 정보를 확보할 때까지 대화를 이어간다. 

‘꿈에서 깨고 나니 기분은 어떤가?’, ‘꿈을 꿨던 중학교 때는 어떤 아이였나?’, ‘지금도 이런 꿈을 꾸는가?’, ‘중학교 때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겠나’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며 차곡차곡 꿈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도구를 모아간다. 

ⓒ제주의소리
왼쪽부터 니모, 알맹, 드리, 리나. ⓒ제주의소리

그리고 폴리아티스트의 소리에 맞춰 세 명의 배우는 눈앞에서 꿈을 재현한다. 니모가 주된 이야기를 시작해 끌고 가고 나머지 배우 드리, 리나가 살을 덧붙이는 구조다. 맘트라는 단순히 장면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그 꿈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 해석을 덧붙인다. 

‘반짝이는 바다 속 보석처럼 자녀는 당신의 변치 않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질문도 제대로 하지 못한 소심한 어릴 적 모습 대신 이제는 당당히 소리치며 자신을 알려요.’
‘당신을 계속 옭아매는 군 생활의 압박을 당신과 가족 모두를 위해 떨쳐버리세요.’

맘트라는 무대 이곳저곳을 누비며 꿈속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던진다. 잊고 있거나 혹은 외면했던 내 속마음을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신기한 마음으로 박수를 치고, 벅찬 감동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우러나온다. 사전 설명도 대본도 없는 바탕 위에서 극을 창조하고 진행하며 관객과 하나가 되는 일련의 흐름이 플레이백 시어터의 매력이다.

마지막 순서로 모든 꿈을 무작위로 연결하는 ‘비빔밥’에서는 웃다가 눈물이 날 만큼 커다란 웃음을 선사한다. 배우들이 활용하는 소품은 많지 않다. 네모난 의자와 천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감정·역할·분위기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의 천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기술은 꽤 인상 깊었다. 모든 단원들은 아이를 키우는 여성인데 덕분에 태몽에 관한 꿈 풀이에서는 한층 더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진다.

플레이백 시어터와 맘트라가 제주에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은 다양한 사람, 문화가 오고 가는 환경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그들 앞에 있는 예술 현실은 녹록치 않지만, 공동 창작 집단을 표방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인지 조바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섬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신생 극단 맘트라가 제주 연극의 또 다른 가능성이 될 지 주목해본다. 

즉흥극단 맘트라 https://www.facebook.com/Momtra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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