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3) 그날의 기억, 15년 걸쳐 제주 참전용사 목소리 담아낸 정수현 작가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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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작가는 15년에 걸쳐 6.25 참전 제주 용사들을 기록해나가고 있다. 그가 집필한 저서만 총 13권으로 416명의 영웅 이야기를 담았다. ⓒ제주의소리

“이제까지 만난 분들만 해도 416명입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많은 6.25참전 제주 영웅 발굴을 위해 발 닿는 곳까지 기록할 겁니다.”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강원도 양구 도솔산 전투, 육군 강원도 고성군 884고지 전투,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 등 다양한 곳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제주 영웅들’을 만나 일일이 기록을 남긴 사람이 있다.

정수현(83) 작가다. 정 작가는 2006년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3권의 저서를 집필하며 총 416명의 제주 용사들을 만났다. 올해는 제주도재향군인회와 함께 참전용사를 총정리하는 원고를 작성, 하반기 발간을 앞두고 있다.

정 작가는 제주도 공보관, 도의회 사무처장 등을 지낸 공직자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다. 1996년 월간 문예사조에서 시와 수필로 등단했고, 이후 활발한 집필 활동으로 한국신문학상, 제주4.3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신문학인협회장, 제주도문화원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제주수필문학회장과 한국신문학인협회 고문 등을 맡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 작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제주 영웅들의 이야기를 집필하게된 계기는 우연이지만 운명처럼 찾아왔다. 2002년 해병대 3~4기 전우회가 남긴 참전 실록을 우연하게 접한 후, 후세를 위해 참전용사들의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일념이 섰다. 

10대 초반 시절 일어난 한국전쟁에 자신은 참전하지 못했지만 가까운 친인척과 동네 형들이 총을 들고 전장으로 주저없이 뛰쳐나갔고, 뒤늦게나마 그 영웅들의 이야기가 역사에 남을수 있도록 기록 작업을 하는 것이 작가로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고 소명이라 생각한 것.  

팔순을 훌쩍 넘기고서도 한국전쟁 제주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작업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을 위로하고 전쟁영웅을 발굴하는 정수현 작가를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만났다.

1950년 6월 25일, 그날의 비극은 한반도 최남단 제주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학생을 비롯한 젊은 청춘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쓰러져갔는지 기록된 제주용사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정 작가는 수많은 전쟁기록을 읽고 보훈처와 재향군인회 등 도움을 받아 생존한 제주 참전 유공자를 만났다. 세월이 흐른 탓에 기억이 희미해진 용사들의 기록을 일일이 찾는 과정이 쉽지 않았단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오래 들여다보니 답이 나오더라. 그분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고 거의 모든 전쟁사를 섭렵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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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작가의 자택 서재에는 한국전쟁 관련 저서와 참전 유공자 인터뷰 기록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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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작가가 수집한 사진과 기록. 사진 속 김진탁 용사는 1952년 11월 해병 제1전투단 제3대대 제9중대장으로 서부전선인 장단 31고지를 방어했다. 중대본부 벙커 앞에서 방탄조끼를 입은 뒤 망원경을 가슴에 차고 적진을 노려보고 있는 김 용사의 사진과 정 작가의 메모. 작가의 치밀함과 성실함이 엿보인다. ⓒ제주의소리

한국전쟁 발발 당시 만 12세였던 정 작가. 그는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가 고향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고향마을에서의 풍경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심각하게 와닿진 않았지만, 학교 운동장을 메워 목총을 들고 훈련하는 동네 청년들을 보곤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지요. 그때 동네 형들이 태극기를 대각선으로 메고 ‘나는 이제 다시 못 볼 거다.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가서 죽을거니까 다신 못 본다’고 말하며 훈련소로 갔죠. 지나가는 행렬을 지켜보면서 박수치고 만세도 부르고 했습니다.”

제주 청년들이 앞장서서 전장으로 뛰어든 것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심과 더불어 4.3사건의 영향도 있었다. 법과 질서없이 총에 맞으면 그저 억울하게 죽어갔던 제주도민들. 더불어 소위 ‘빨갱이’라 불리는 불명예를 벗고자 참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육지에선 제주도를 사상적으로 의심했다. 해병대 훈련 당시 육지서 온 하사관들은 말끝마다 ‘이 빨갱이들’이라고 자주 말했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제주 해병대 군인이 가택 수색을 펼칠 때 ‘어떻게 제주도에서 이렇게 훌륭한 용사들이 나왔냐’고 인천 주민이 물으니, 제주 출신 군인이 ‘제주도에는 다 이런 민주투사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죠. 사실 거기서 (빨갱이) 낙인이 벗겨졌습니다. 누구보다 용감히 싸웠기 때문에.”

그는 제주 청년들이 입대를 위해 밥을 두 사발씩 먹어 체격을 키우고 입대 자격이 안되어도 혈서를 쓰며 그 의지를 보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했다.

4.3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정 작가는 4.3사건으로 어느 곳보다 큰 상처를 입은 제주이기에 대한민국에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또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펼친 제주인들에게 재미있는 사건이 많았다며 숨겨진 비화를 소개했다.

인천에 가게 되면 외삼촌을 찾아보란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우연찮게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가택 수색 중 외삼촌을 찾은 이야기, 휴전 다음 날 국군과 북한군, 중공군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 등 참전용사 인터뷰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렇게 제주 용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올해 1월엔 서귀포시 출신 故박평길 육군 병장이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했다. 전쟁영웅을 추천해달라 하는 보훈처의 연락을 받고 6.25 당시 박평길 병장의 소대장이던 고남화 대령을 만나 함께 자료를 제출, 선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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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작가의 제주 6.25참전용사 면담 기록의 일부. 수십권의 작가노트에 그동안 취재과정에서 면담한 용사들의 참전 기록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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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 작가가 써 내려간 원고. 두꺼운 공책으로만 수십 권에, A4용지에도 수없이 적혀있다. ⓒ제주의소리

그는 “제주의 전쟁영웅을 찾기 위해서는 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입대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950년 10월까지 1만3000여명의 도민이 참전했다는 사실 외엔 기록이 없어 제주 참전 유공자들의 확실한 숫자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 작가는 “제주도가 전수조사를 통해 참전했던 제주 용사들이 몇 명인지 발굴해야 한다. 그분들의 값진 희생을 빛바랜 역사의 한 조각으로 둘 순 없지 않느냐. 더 늦기 전에, 참전용사가 그래도 살아계신 동안에 도 차원에서 전수조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둘째 손주가 해병대 중위로 복무하기도 했다는 정수현 작가의 집안은 3대째 해병대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큰아들과 세 명의 손주가 자신을 따라 해병대에서 복무했단다.

또 그의 집 벽면 책장에는 한국전쟁사 관련 책들과 수많은 인터뷰 기록과 사진이 남아 있었다. 이런 자료를 통해 집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준 제주도재향군인회에 감사한다고 전했다.

자료를 하나하나 넘기던 그는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몸을 내던진 선배들을 잘 기억하길 당부했다. “당시 선배들이 전쟁판에서 죽을 것을 알면서 혈서를 쓰고 몸을 내던진 것은 ‘개인보다 나라가 먼저’라는 생각을 한 것”이라며 “이런 마음가짐을 본받고 우리도 애국심을 가슴에 품는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총 한 자루에 의지해 나라를 지켜낸 제주 한국전쟁 용사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지금도 펜을 휘날리고 있다.

비단 6월이 아니더라도 내내 6.25 참전용사의 정신을 기리며, 후손인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를 기록하는데 노년을 바쳐온 정수현 작가. 이름없이 사라질뻔 했던 진정한 영웅들을 발굴하고 기록해낸 그도 또 한명의 영웅이다. 고향 제주를 가슴에 품고 전선에서 태극기를 펼쳐낸 용사들의 마음이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정 작가의 바람이, 한국전쟁 70주년에 힘차게 불어 새겨지길 기대해본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정수현 작가가 집필한 저서. 제주의소리
2006년부터 지금까지 정수현 작가가 집필한 6.25참전 제주용사들을 기록한 관련 저서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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