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70. 박태균,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책과 함께, 2005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책과 함께, 2005. 출처=알라딘.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책과 함께, 2005. 출처=알라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세월이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가족과 집을 잃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수사조차 전쟁의 상처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해보인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다룬 연구서이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지만, 필자의 내공이 담긴 이 책은 깊이와 대중적인 설득력을 동시에 지닌 보기 드문 연구이다. 저자는 전쟁의 배경과 원인, 미국과 소련의 책임, 내부 정치세력의 문제 등 전쟁의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고, 1950년 6월에 시작된 전쟁의 전개과정과 후방의 민간인 학살,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담담하게 독자에게 다가가고 있다.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의 첫걸음은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한국전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한 장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휴전선에서는 총성이 계속 울렸고 서해에서는 남과 북의 해군이 교전을 벌였다.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이산가족 문제는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남과 북의 체제 경쟁은 한반도를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지역, 그리고 냉전지역으로 남겨놓고 있다. 1953년 형성된 ‘정전협정’과 그로 인한 ‘정전체제’는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놓고 있다. 이렇게 한국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그리고 그 현재적 의미도 알아야 한다. 

 -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머리말에서

저자는 또한 왜 1950년 6월 26일이었는가를 반문하고 있다. 저자는 계절적 요인, 중국의 동의와 협력을 얻어낸 시점을 고려하기도 하지만, 주요한 이유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변화를 꼽고 있다. 분단된 지 2년여 기간에 빨치산 활동이 진압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남한의 상황은 도리어 북한 지도부에게 전쟁을 한시라도 빨리 일으키도록 작용한 원인이 됐을 것이란 견해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의 신호탄이 올랐다. 기습남침은 북한군의 대성공이었다. 38선은 무너지고 서울은 단 사흘 만에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안심하라는 방송과는 달리 전선의 포성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봇짐을 이고 진 피난민으로 메워지고, 기차역은 넘치는 인파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부의 방송만을 철석같이 믿었던 시민들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한강교가 폭파된 다음이었다. 수도 서울의 함락은 지도상의 손실 이상의 엄청난 정치적 무게를 갖는 것이었다.

6월 27일 뉴욕, 소련의 불참 속에서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UN 회원국들이 남한을 도와 무력공격을 격퇴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건 UN 역사상 아주 중요한 뜻을 지닌 조치였다. 비록 미국의 주도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UN의 깃발 아래 세계의 여러 나라가 침략자로 낙인을 찍은 집단에 대해 공동으로 응징에 나선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제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국이 전쟁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미국의 신속한 처리로 인한 UN군의 참전 결정이 패망의 위기에 처한 남한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무적의 미군마저 패배하고 워커 중장은 8월과 9월에 걸쳐 약 한 달간 낙동강전선에서 시간을 버는 사투를 벌인다. 한반도 지도에서 한 줌밖에 안 되는 땅만이 남아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결전장이었다. 1950년 불볕더위 아래 한 치의 땅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혈전이 계속되었다. 이제부터는 유엔군이 반격할 차례가 되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양상을 일순간에 역전시켰다. 인천상륙작전의 D-day는 9월 15일, 모든 함대는 새벽 2시에 인천 앞바다에 정렬을 완료했다. 맥아더는 사령선에서 자신이 연출한 세기의 작전을 지켜봤다. 

10월 1일 마침내 동부전선에서 국군이 38선을 넘었다. 10월 중순까지 만주 국경을 눈앞에 둔 전선 상황이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흥남 지역으로 집결한 국군과 UN군 부대들은 흥남 외곽지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10만 명의 병력이 안전하게 해상철수를 할 수 있도록 엄호하는 교두보작전을 전개했다. 12월 24일 마지막 부대가 승선할 때까지 20여 일 동안 몰려드는 중공군들에게 이들은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미군들은 처음 피난민들을 수송할 생각이 없었으나 필사적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 때문에 계획을 바꿔야 했다. 10만이 넘는 피난민의 해상철수는 한국전쟁 중 극적인 민족대이동이었다.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중국군의 인해전술과 UN군의 대규모 화력전은 그 어느 쪽도 상대방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군사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전쟁, 많은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된 전쟁, 한국전쟁은 이제 그 어느 일방의 의지로만 해결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38선 부근에서 다시 대치한 양쪽은 이제 군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 졌다. 그 다음 수순은 협상일 수밖에 없었다. 1951년 7월 10일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휴전회담의 막이 올랐다. 험준한 협상은 포로교환 문제였다. 무조건 송환인가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인가를 둘러싼 대립이 지속되었다. 18개월을 끈 포로 협상은 1952년 중반이 되도록 해결을 보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이제 군사적 싸움에서 정치적 싸움으로 변화했다. ‘반공포로 석방’사건으로 공산측은 정전회담을 다시 중단시켰으나, 한국군이 정전협정을 준수하도록 UN군이 보장하겠다고 확약함으로써 회담이 재개되었다. 결국 7월 22일 군사분계선이 확정되고, 7월 23일에는 비송환 포로들의 비무장지대의 인도군 관할 지역으로 인계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끝났다. UN군과 북한의 대표인 해리슨과 남일은 묵묵히 협정문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158회에 걸친 회담 끝에 휴전협정이 조인된 것이다. 3년여에 걸친 전쟁의 종결, 그러나 휴전문서에 서명하는 시간은 한순간이었다. 

전쟁은 후방에서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또 다른 학살과 희생을 낳았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작된 4.3과 여순사건, 그리고 보도연맹사건들을 경험했던 한국인들은 전쟁기간 동안 또 다른 학살을 겪어야 했다. 남한지역을 점령한 북한군 또한 인민의 이름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저자는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은 폭격이나 전투 때문만이 아니다. 무장하지 않은, 싸울 의사가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자행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역시 이데올로기 전쟁의 형태를 띄었기 때문에 예외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결론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저자는 6.25가 아닌 ‘한국전쟁’으로 정의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표현은 당시 한반도에서 싸웠던 수많은 외국 군인들을 고려할 때, 전쟁의 한 측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조국보위전쟁’이란 이름은 전쟁의 한쪽 당사자들이 인정하는 이름일 뿐 당시의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하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전쟁’과 같이 무가치적인 이름으로 통칭하는 것이 일단 이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전쟁은 수많은 죽음을 낳았고, 그 상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방아쇠를 누가 먼저 당겼는가는 역사적 사실은 물론 기억해야 한다. 다만 전쟁의 잔혹함을 딛고 평화로 가는 여정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성찰 또한 우리의 몫일 것이다.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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