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20)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1982년 태어난 오키나와 여성이, 2008년에 자신의 극단을 창단한 이래, 1945년 오키나와전쟁을 테마로 하는 연극을 오키나와 각지에서 상연해 왔다. 극단이라고 해봐야 단원은 10명이 채 안 돼 모두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각자 퇴근 후 모여 연습하고 방학을 하면 공연에 임한다. 공연장은 대부분 지역의 작은 커뮤니티 홀이다. 관중은 주로 마을의 노인들, 그리고 동행한 자손들이다.

히가 하루카 연극의 가장 큰 특색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전쟁 체험을 일본어가 아닌 오키나와 말로 연기하는 것이다. 오키나와에는 일본어와는 다른 독자적인 언어가 있다. 일본이 1879년 류큐를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이라 하여 천황국가에 편입시켰을 때 류큐어의 진정한 수난이 시작되었다. 일본이 그 통치를 오키나와에 침투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은 언어였다. 1882년, 메이지 정부의 기관이었던 오키나와현청은 ‘회화 전수소’를 설치해, 현지의 엘리트 후보생들에게 일본어를 습득시켰다. 이 ‘회화전수소’는 후에 사범학교(교원 양성소)로 계승되어 간다. 일본어는 ‘표준어’로 규정되어 초등교육 현장에서도 그 보급이 도모되어 학교에서 류큐어를 하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어가 문명이고 류큐어는 미개라는 구도다.

오키나와 연극인 '히가 하루카'(왼쪽에서 세 번째)와 그의 극단 단원들.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 연극인 '히가 하루카'(왼쪽에서 세 번째)와 그의 극단 단원들.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한국에서도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가 1939년 오키나와를 방문한 후 오키나와의 언어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훌륭한 제국 신민이 되려는 오키나와의 지식인층은 오히려 그에 반발했다. 표준어를 할 수 없을 뿐, 오키나와인은 군대에서도 일본 본토나 남양 출장에서도 신산을 맛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으로, 서민의 생활에서 모국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일본화의 추세에서도 오키나와 문화의 코스몰로지는 강인했고, 그 기반인 류큐어는 사람들의 생활언어였다. 학교에서 배운 일본어를 익히지 못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오키나와인이, 1945년의 지상전의 지옥으로 밀려 떨진 것이었다.

1944년부터 오키나와 각지에 일본 군대가 배치되면서 오키나와 주민은 군대와 일체가 되어 생활하는 상태에 놓였다. 군부는 군관민 상생공생이라는 비정상적인 구호를 태연히 내세우며 주민 중에 간첩이 있을까 경계했다. 1945년 4월,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해 맹진격하는 와중에, 군부는 '군인군속은 표준어 이외의 언어 사용을 금지한다', '오키나와어로 말하는 자는 간첩으로 간주해 죽여라'라고 병사들에게 명했다. 일본병도 민간인들도 뒤섞여 도망치는 전쟁터에서 패잔의 히스테리에 빠진 병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오키나와인을 살상했다는 증언이 많이 남아있다. 

극단 리더인 히가 하루카가 각본의 축으로 삼는 것은 이런 사례를 포함해 오키나와전 생존자로부터 직접 들은 체험담이다. 그녀는 전쟁의 광기에 농락당하는 오키나와인을 재현한다. 예를 들어 출정하는 병사를 욕해 주위로부터 광인 취급을 받는 노파를, 식량을 내놓으라는 일본병에게  총기로 이마를 맞고 흐느끼는 소녀를, 미군에 수용된 캠프에서조차 불합리한 취급을 받고 ‘남편이 살아만 있었더라면 이런 불쌍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한탄을 반복하는 여자를, 류큐어로 연기하는 것이다.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던 류큐어는, 전후, 급속히 쇠퇴해 버렸다. 그녀 같은 1980년대생이 이렇게 류큐어가 유창한 경우는 드물다. 그의 가정환경에 아직 류큐어가 회자되고 있다는 행운도 있었지만 본인의 노력은 더 크다. 작극을 위해 오키나와전을 듣는 것도, 연기하는 데에도 류큐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고한 신념을 그녀는 갖고 있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오키나와 언어로 연기하는 '히가 하루카'.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의 역사를 오키나와 언어로 연기하는 '히가 하루카'.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의 역사를 오키나와 언어로 연기하는 '히가 하루카'.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의 역사를 오키나와 언어로 연기하는 '히가 하루카'.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의 역사를 오키나와 언어로 연기하는 '히가 하루카'.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의 역사를 오키나와 언어로 연기하는 '히가 하루카'.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노인 관중들은 처음에는 섬 말을 유창하게 하는 젊은 아이를 흐뭇하게 보지만,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 표정이 바뀐다. 전장의 끔찍한 경험 따위는 새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특히 여성 노인들은 히가 하루카가 연기하는 여자들에게 다양한 기억을 투영하고 몰입해 간다. 모국어의 울림이 그들을 70여 년 전 어리고 젊었던 그날로 훌쩍 데려가는 것이다. 처참한 기억이 모국어 배우의 몸에 의해 마치 완화되는 것 같다.

생존자들은 겨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키나와전의 증언을 시작했다. 말을 꺼내는 데 30여 년의 세월이 필요할 정도로 타격이 컸을 것이다. 증언의 대부분은 화자의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이뤄졌고 증언집도 일본어 기록이 됐지만 오키나와 사람들 자신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전쟁의 기억을 류큐어로 이야기하여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모임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히가 하루카는 이에 크게 영감을 받았다. 일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감각, 모국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기억이나 체험의 농도라는 것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류큐어로 명도보(命ど宝)란 생명이 지존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전사를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군국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일 것이다. 류큐어로 전쟁 시기를 연기하는 히가 하루카의 몸은 생명의 빛이 되어 그 어리석은 전쟁을 비추는 평화예술의 공간이다.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琉球語で演じる戦世-平和芸術空間としての身体

豊見山和美

1982年生まれの沖縄の女性が、2008年に自分の劇団を立ち上げて以来、1945年の沖縄戦をテーマとする芝居を沖縄の各地で上演してきた。劇団といっても団員は10人足らず、みな別の職業で生計を立てている。それぞれ仕事が終わった後に集まって稽古をし、休みをやり繰りして公演に臨む。公演会場はほとんどが地域の小さなコミュニティー・ホールだ。観衆は主に集落のお年寄りたち、そしてそれに付き添うようにしてやってくる子や孫たちである。

この劇団「比嘉座」の芝居の最大の特色は、沖縄の人々の戦争体験を、日本語でなく沖縄の言葉で演じることだ。沖縄には日本語とは異なる独自の言語がある。日本が1879年に琉球を廃して「沖縄県」とし、天皇の国家に組み入れた時に、琉球語の真の受難は始まった。日本がその統治を沖縄に浸透するにあたって、最大の障壁は言語だった。1882年、明治政府の出先機関だった沖縄県庁は「会話伝習所」を設置し、地元のエリート候補生たちに日本語を習得させた。この会話伝習所はのちに師範学校(教員養成所)へ引き継がれていく。日本語は「標準語」と位置付けられ、初等教育の現場でもその普及が図られ、学校で琉球語を話すことは処罰の対象となった。日本語が「文明」で、琉球語は「未開」という構図だ。

韓国でも知られる柳宗悦が1939年に沖縄を訪れた後、沖縄の言語を尊重すべしという旨の発言をしたが、立派な帝国臣民たることを目指す沖縄の知識人層はむしろそれに反発した。標準語ができないばかりに、沖縄人は、軍隊でも日本本土や南洋への出稼ぎでも辛酸をなめているではないかと。もっともそれは表向きのことで、庶民の生活から母語が消えさることはなかった。日本化の趨勢にあっても沖縄文化のコスモロジーは強靭で、その基盤である琉球語は人々の生活言語であり続けた。学校で教わった日本語が身につかなかった者も多かっただろう。そんな沖縄人が、1945年の地上戦の地獄に突き落とされたのだった。

1944年から続々と沖縄各地に日本軍部隊が配置され、沖縄住民は軍隊と一体となって生活する状態に置かれた。軍部は「軍官民共生共死」という異常なスローガンを平然と掲げながら、住民にスパイがいるかと警戒した。1945年4月、米軍が沖縄島に上陸して猛進撃する最中、軍部は「爾今軍人軍属ヲ問ハズ標準語以外ノ使用ヲ禁ズ」「沖縄語ヲ以テ談話シアル者ハ間諜トミナシテ処分ス」と兵士たちに命じた。日本兵も民間人も入り乱れて逃げ惑う戦場で、敗残のヒステリーに陥った兵士たちが、理解できない言葉を発する沖縄人を殺傷したという証言は多く残る。

劇団座長の比嘉陽花が脚本の軸とするのは、こういう事例も含めて、沖縄戦の生存者から直に聞き取った体験談である。彼女は戦争の狂気に翻弄される沖縄人を再現する。たとえば出征する兵士を罵って周囲から狂人扱いされる老婆を、食糧を差し出せという日本兵から銃を額に突きつけられて泣きじゃくる少女を、米軍に収容されたキャンプでさえ理不尽な扱いを受けて「夫が生きてさえいればこんな哀れはしなくてすんだのに」と嘆きを繰り返す女を、琉球語で演じるのだ。これは尋常なことではない。かつてしたたかな生命力を持っていた琉球語は、戦後、急速に廃れてしまった。彼女のような1980年代生まれが、これほど琉球語が流暢であるのは稀なことだ。彼女の家庭環境にまだ琉球語の話者がいた幸運もあるが、本人の努力はさらに大きい。作劇のために沖縄戦の聞き取りをするのも、演じるにも、琉球語でなくてはならないという強固な信念を彼女は抱いている。

最初のうち観衆の高齢者たちは、島の言葉を上手に喋る若い子を微笑ましく見ているのだが、劇が進むうちにその表情を変える。戦場の忌まわしい経験など今更思い出したくなくても、特に女性の高齢者たちは、比嘉陽花の演じる女たちにさまざまな記憶を投影し没入していく。母語の響きが、彼女たちを70数年前の幼く若かったあの日へとするりと連れ戻すのだろう。凄惨な記憶が、母語を発する役者の身体によってあたかも緩解されるかのようだ。

生存者たちが沖縄戦の証言を始めたのはようやく1970年代後半になってからだ。語り出すのに30年余の歳月が必要なほど痛手が大きかったのだろう。証言のほとんどは話者の母語ではない日本語でなされ、証言集も日本語の記録になったが、沖縄の人々自身もそれを自明視した。しかし1990年代後半、戦争の記憶を琉球語で語らせ動画で記録する会の活動が始まり、比嘉陽花はこれに大きくインスパイアされている。日本語では決して言い表せない感覚、母語でしか表現できない記憶や体験の濃度というものが確かに存在することを知ったのである。

琉球語でいう「と命ど宝」は、生命こそが至高という意味だ。それは、戦死を最高の栄誉とする軍国主義の対極にある思想だろう。琉球語で戦世を演じる比嘉陽花の身体は、命の輝きとなってあの愚かな戦争を照射する、平和芸術の空間なのである。

写真はすべて「比嘉座」公演より


The Body as Space of Peace Art: the Memories of the Wartime Performed in Ryukyuan language.

Kazumi Tomiyama

An Okinawan woman, born in 1982, started her own theater company in 2008, and since then, she has played with the theme of the Battle of Okinawa at various venues of the Islands. The troupe has less than 10 members, all of whom work in different professions to make a living. They gather to rehearse after work and make do with the rest of the day off for performances. Most of the venues are small community halls. The audience is mainly the elderly of the community, with their children and grandchildren accompanying them. The most distinctive feature of the Higa-za Theater Company's play is that it tells the story of the Okinawan people's experience of war in their own language, not in Japanese.

Okinawa has its own languages which are different from Japanese. When Japan abolished Ryukyu in 1879 and incorporated it into the state of the Emperor as "Okinawa Prefecture", the true tribulation of Ryukyu languages began. The biggest barrier to Japan's penetration of its rule in Okinawa was language. In 1882, the Okinawa Prefectural Office which was an outpost of Japanese government set up  a conversation training center to help local elite candidates learn Japanese. This center was later taken over by the teacher's training school. Japanese was positioned as the "standard language" and its diffusion in primary education was promoted, Speaking Ryukyu languages at school was punishable. Speaking Japanese meant "civilization" and speaking Ryukyu languages meant "uncivilized."

After visiting Okinawa in 1939, Yanagi So-etsu, also known in South Korea, said that the Okinawan language should be respected, but the Okinawan intelligentsia, aiming to become a worthy imperial subject, was rather opposed to him. Because of their inability to speak standard language, Okinawans had to endure a painful experience in the military and as emigrant workers to mainland Japan and the South Sea Islands. However, it was obvious that the mother tongue never disappeared from the lives of ordinary people. Despite the trend of Japanization, the cosmology of Okinawan culture was strong, and the Ryukyu languages, the foundation of which, remained the language of people's daily lives. Many of them probably didn't master the Japanese language at school. These Okinawan people were thrust into the hell of the ground battle in 1945.

In 1944, Japanese troops started to deploy in various parts of Okinawa, and Okinawa residents began to live together with the military. The military raised an unusual slogan of "military, government, and people symbiotic coexistence and co-dying " and was wary of spying at the same time. In April 1945, as the U.S. troops landed on Okinawa Island and made fierce attack, the Japanese military executives ordered the soldiers not to use any language other than Japanese, and those who spoke in Okinawan language should be treated as secret agents and killed. There are many testimonies that soldiers who have fallen into the losers and in raving hysterics  on the battlefield, where both Japanese and civilians are mixed up and evacuating, killed and injured the Okinawa people who spoke in a language they did not understand.

HIGA Haruka, the leader of the theater company, the main theme of her script is the story which directly heard from the survivors of the battle of Okinawa, including the cases above. She reproduces the Okinawans who are tossed about by the madness of the war. For example, she plays an old woman cursing a soldier going off to war and being treated like a mad person by those around her, a girl who sobbers when a Japanese soldier asking her to give him food held a gun to her forehead, and a woman who repeatedly laments, saying "If only my husband were alive, I wouldn't have been so pitiful" in a civilian camp.

The Ryukyu languages, which once had a strong vitality, has rapidly declined after the WW2. It is rare for someone like her, born in the 1980s, to be so fluent in the Ryukyu language. She was fortunate that there were still speakers of Ryukyuan in her family, but her own efforts were even greater. She holds the belief that in order to interview the survivor of the battle for her script writing and to perform, she have to speak Ryukyuan.

At first, the elderly audiences smile at the young woman who speaks the island's language so well, but the play changes their expression as it progresses. Even if they don't want to recall the horrible experiences of the battlefield any more, especially the elderly women, project and immerse themselves in various memories onto the women played by HIGA Haruka. The echoes of their mother tongue would smoothly bring them back to that day more than seventy years ago, when they were young and in their infancy. The horrific memories seem to be loosened by the bodies of the actress who speaks in their native tongue.

It was not until the late 1970s that the survivors began to tell their stories about the Battle. The pain must have been so great that it took more than 30 years for them to recount their experiences. Most of the testimonies were given in Japanese, not the speaker's native language, and the collection of testimonies was written in Japanese. The Okinawan people themselves took it for granted, though. However, in the late 1990s, one association started to record memories of the war in Ryukyu languages through videos, and she is greatly inspired by this achievment. She learned that there are certain sensations that can never be expressed in Japanese, a density of memories and experiences that can only be expressed in one's native tongues.

In Ryukyuan, the term "Nuchi do Takara" means that life is supreme. This is probably the opposite of the idea of militarism, which regards death in battle as the highest honor. HIGA Haruka's body, which plays the war time through Ryukyu language, becomes a glow of life which irradiates that stupid war and becomes a space of peace art.

All photos are from Higaza performance.


作為和平藝術的身體空間:以琉球語演繹戰爭回憶

豊見山和美

這位沖繩女性出生於1982年,於2008年成立了自己的劇團,從那以後,她就在沖繩的各個地方以沖繩戰為主題。該團只有不到10名成員,他們全都從事不同的職業謀生。每次工作之後,他們將聚集在一起練習,並在一天的其餘時間裡表演。大多數表演場所是該地區的小型社區大廳。聽眾主要是村里的老人,以及跟他們一起來的孩子和孫子。

這個劇團「比嘉座」的戲劇最大的特點是用沖繩語而不是日語來演出沖繩人民的戰爭經歷。沖繩有著和日語截然不同的本國語言。當日本於1879年廢除了琉球,並以「沖繩縣」的名義將其併入日本帝國時,琉球的真正災難開始了。語言是日本在進入沖繩統治中遭遇的最大障礙。 1882年,作為日本政府前哨的沖繩縣廳成立了會話培訓中心,幫助當地訓練精英人士學習日語。該中心後來由教師培訓學校接管。日語被定位為「標準語言」,並促進了其在小學教育中的普及,在學校講琉球語會受到懲罰。說日語意味著「文明」,說琉球語言則意味著「不文明」。

在韓國也廣為人知的柳宗悅(Soetsu Yanagi)在1939年訪問沖繩後發表了一份聲明,提到尊重沖繩的語言,但是沖繩的知識分子卻反對柳宗悅成為優秀的帝國臣民。由於無法說標準日語,沖繩人無論是軍隊還是去日本本土或南洋賺錢,都吃盡了苦頭。但是這只是表面現象,在庶民的生活中,母語並沒有消失。儘管日化的趨勢,但沖繩文化的原生系統仍然很強,琉球語言作為其基礎,仍然是人們日常生活的語言。許多人可能在學校沒有掌握日語。這樣的沖繩人於1945年被推入了地面戰爭的地獄。

從1944年開始,日軍已在沖繩各地部署,沖繩居民與軍隊生活在一起。軍方提出了「軍、官、民,共生共死」的口號,並警惕間諜活動。 1945年4月,當美軍登陸在沖繩並發動猛烈進攻時,軍方命令「士兵不要使用日文以外的任何其他語言交談」,「使用沖繩話的人應被視為間諜處分」。在戰敗中日軍和平民疏散撤離的戰場,有許多證詞表明,失敗而歇斯底里的日本士兵殺死了許多不懂日語的沖繩人。

包括這些實例,劇團負責人比嘉陽花 (HIGA Haruka)的劇本主題是直接從沖繩戰倖存者那裡聽到的故事。她重現了一個受戰爭而瘋狂被拋棄的沖繩人。例如,她扮演一位老婦人,詛咒一名參戰的士兵,並被周圍的人當作瘋子對待,一個女孩在日本士兵要求她給他食物的時候抽泣,並用槍指著她的額頭。一位在平民營地反復感嘆的婦女說:“如果只有我的丈夫還活著,我就不會那麼可憐”。琉球原本具有很強的生命力,但在第二次世界大戰後迅速下降。像她這樣的人,生於1980年代,已很少能使用流利的琉球語。幸運的是,她的家人中仍然有琉球語使用者,但她自己的努力更大。她堅信,為了採訪劇本倖存者並撰寫劇本並表演,她必須更努力傳承琉球語。

起初,年長的觀眾對那個講島上語言的年輕女子微笑,但是隨著劇情的發展,劇情也隨之改變。即使他們不想再回憶起戰場上的恐怖經歷,尤其是老年婦女,也將自己的各種記憶投射到比嘉陽花扮演的女性身上。母語的低迴聲音似乎將他們帶回到了七十多年前的那一天,那時他們還很小,還處於嬰兒期。講母語的演員的身體似乎消除了悲劇性的回憶。

直到1970年代後期,倖存者才開始講述他們關於戰役的故事。痛苦一定是如此之大,以至於他們花了30多年的時間來敘述自己的經歷。大多數證詞是用日語提供的,而不是講者的母語,並且證詞的收集是用日語寫的。不過,沖繩人自己認為這是理所當然的。然而,在1990年代後期,該協會開始通過視頻以琉球語言記錄戰爭的回憶,比嘉陽花對此深有啟發。她了解到,有些感覺是永遠無法用日語表達的,記憶和經驗的密度只能用自己的母語表達。

在琉球,「 生命與寶藏」一詞意味著生命是至高無上。這與軍國主義相反,後者認為戰鬥中的死亡是最高榮譽。比嘉陽花用自身身體以琉球語演繹戰爭世界的荒謬,轉化身體成為和平藝術的發生空間,將生命的光彩照亮了這場愚蠢的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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