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을 그린다는 것
4.3을 그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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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21) 박경훈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외국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슬픔의 대필자, 예술가

슬픔이란 대체로 눈물로 한숨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4.3의 슬픔은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다. 그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다.

- 현기영, <목마른 신들> 가운데 일부

슬픔이 너무 깊고 한이 너무 서리면, 침잠된 기억은 결코 원상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나마 말문을 어렵게 여는 이들도 대부분 유년기의 체험자들인 경우가 태반이다. 진정 생애를 관통하는 지옥도를 본 사람에게는 그것을 떠올리는 것조차 생생한 현재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의 진실은 우회로를 찾는다. 4.3을 진정 호되게 치른 자들이 그 생생한 진실과 진상을 말하지 못하기에, 그 후대들이 이 일을 해내게 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우주적 원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죽은 자들과 말을 뱉지 못하는 체험자들이 남긴 4.3의 목소리는 결국, 타자 또는 미체험자들에 의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불분명한 남의 체험을 자기화한 불완전한 진실이, 예술적 상상력에 의해 조합되면서 퍼즐 같던 역사는 서서히 부활한다. 

4.3을 표현한 작가들. 좌로부터 소설가 김석범, 현기영, 화가 강요배, 시인 이산하.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4.3을 표현한 작가들. 좌로부터 소설가 김석범, 현기영, 화가 강요배, 시인 이산하. 제공=박경훈. ⓒ제주의소리

살아 있는 역사를 무덤이나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은 역사학이지만, 묻혀 있는 역사를 오늘에 끌어내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문학이며 예술이다. 김석범, 현기영, 강요배, 이산하가 다 그러하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이들의 공통점은 예술가라는 점과 직계 중에 4.3의 직접적 피해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할 수 없는” 직접적인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이타적인 슬픔의 대필자이자 진실의 담지자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4.3은 이미 나의 유년기 내내 곁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관동군장교 출신의, 작은 키의 독재자 박정희. 그가 구축한 군부독재정권의 시대_18년은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최초의 헌법유린사태인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시작됐다. 나의 유년기와 성장기 동안 그는 유일무이한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박정희, 박정희는 대통령”이었다. 그렇게 알고 성장했던 한 소년은 1979년 새벽버스에서 그의 죽음을 접하고 애도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대학 진학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내 입에서 “박정희 XXX”라는 쌍욕이 터져 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성장한 한 소년이 한국사회가 잘못된 사회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 세월만큼 분노의 감정은 더 거세었다.

그리고 그 시기 내가 만난 것은 복사본의 단편집인 현기영의 《순이삼촌》이었다. 그것이 4.3과의 최초의 조우였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곰곰 생각해보면 4‧3과의 조우는 이미 나의 성장기 내내 걸쳐 있었다. 그것이 4.3이 남긴 후유증이란 걸 몰랐을 뿐. 웃드르 송당마을에서 살던 유년 시절, 늘상 보았던 제삿날 술만 마시면 광질(狂疾)하던 마을의 남자들, 정신줄 놓아 버린 미친 여자들, 외가가 있던 산 넘어 남원마을도 매한가지였다. 아니다. 당시에는 여느 마을마다 미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4.3이란 감당할 수 없는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이상자가 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4.3에 입문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까메기 몰른 식게’도 마찬가지다. 그저 집안사람들만 해 먹는 제사로 알았지만, 그것이 일가방상이나 이웃의 삼촌들을 불러들일 수 없는 은밀한 제례였음을 깨달은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어린 날 봄소풍 때면 으레 찾았던, 진달래가 만발해 ‘진순내’ 라 불리던 아름다운 시냇물이 흐르던 ‘대천동’이 4.3으로 인해 폐동되었다는 것도,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 이곳에서 붙잡혔다는 사실도, 그 옆 마을인 ‘장기동’은 4.3 때 폐동되어 4.3초토화작전으로 빨갱이 해충 박멸에 나섰던 이승만정권에 의해, 또 그 뒤를 이은 5.16군사쿠데타세력에 의해 400만 평이 넘는 송당목장이 되어 버린 것도, 장기동 마을 터에 ‘이승만별장’이 그래서 들어선 것도 후에 알았다. 4.3을 알고 나서야 내 고향마을 주변의 경관의 내력들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향마을의 풍경이 사실은 4.3에 의해 굴절된 풍경이었음을 4.3의 진실과 조우하면서 비로소 발견하기 시작했다.  

제주섬을 할퀸 4.3의 광풍은 주민들만을 할퀴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자연의 풍경마저 “헷싸 불고 뒛싸 분” 것이었다. 4.3의 역사를 모르고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음을 필자는 경험을 통해 절감한다. 제주섬에서는 4.3을 관통하지 않고는 4.3 이후의 어떤 것도 본질에 이를 수 없다. 

촌로들은 술 취한 사람들이 ‘4.3사태’란 말만 나와도 아이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다. “큰일 난다”고. 그렇게 4.3은 이미 나의 유년기부터 같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4.3을 내 생의 어찌할 수 없는 인연으로 만난 것은 《순이삼촌》과의 조우, 그 시절부터였을 것이다. 순이삼촌은 내 인식의 뒤통수를 내리친 강력한 쇠망치였다. “쩌~엉” 하는 그 느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역사란?

역사적 사건을 당시에 체험하지 못했던 후대의 작가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이야기’. 그렇다 그것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선대 삶의 내력담이며 나에게까지 도달한 어떤 시그널이다. 적어도 4.3역사는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이야기였기에 그것은 듣기 쉽거나 듣기에 편한 영웅담이나 무용담은 아니었다. 그것은 숨죽여 찾아내야 하는 보물찾기 같은 것이며, 발견된 보물조각들을 맞추어 인식의 지도를 그려야 하는 지난한 퍼즐 맞추기였다. 또한 듣기 위해 더욱 은밀해져야 했던 비밀스런 의례이기도 했던 것이다. 

역사는 전수된다. 그것이 어떤 여건에서든 후세에 전승되었을 때, 또 다른 역사를 만드는 기원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4.3의 역사적 진실을 하나둘 알아가면서 상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진실의 파편들이 전해주는 그 놀라움과 공포, 그리고 누를 수 없는 분노로 치 떨었다. 그리고 파편적 단편적으로 알아가던 4.3의 전모를 어느 정도 알게 된 것도 사실 한참 지나서의 일이다. 그 당시는 제대로 된 역사논문도, 유족들 역시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 할 수 없었기에 제대로 된 증언채록집도 없었던 시절이다. 유족들이 봇물 터지듯 증언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래도 4.3연구소 등에서 겨우겨우 찾아낸 용기를 낸 유족이나 체험자의 증언은 그 당시 4.3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실마리였다. 

레비 이후, 예술은 아직도 가능한가?

필자는 4.3에 대한 인연 덕에 같은 상처를 지닌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주변국들의 현장을 돌아 볼 기회가 있었다. 국경선을 넘어서 낮선 땅에도 슬픔은 산더미 같았다. 특히 제국주의시대를 거치면서 아시아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은 지독한 것이어서 죽음의 형태마저 최악이었다. 그야말로 증오의 시대 산물인양 증거와 증언들은 넘치고 넘쳤다. 그것들은 마치 “이것이 인간이야!”라고 강변하듯이 남아있었다. 

5·18의 땅 광주에서, 대전 골령골에서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난징에서 오키나와에서 베트남에서 동아시아의 20세기의 ‘남아 있는 것들’과 ‘남겨진 자들의 증언’들은 인간 또는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보면, 곳곳에 속살을 드러내는 아시아판 아우슈비츠들. 아우슈비츠 이전에 시작되어 아우슈비츠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아시아에서 벌어진 야만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명멸해 간 인간의 모습들 속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전 세계 여느 지역과는 다른 이질적인 정치체인 사회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가 공존했던 20세기 벽두, 사회주의체제에서 유래했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진화(?)하고 있는 예기치 않았던 세계적 차원의 체제모델링이 진행 중인 변태와 진화의 공간. 우리는 가능할까? 20세기 증오와 야만의 시대를 넘어 21세기 공존과 연대는 가능할까? 이 모든 질문 속에 남겨진 세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4.3평화기념관 앞에서 대만 2.28기념관 앞에서, 베트남의 증오의 비 앞에서, 난징의 대도살기념관 앞에서, 광주의 망월동 앞에서, 우리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프리모 레비의 절망과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이 여전히 해야 할 무엇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아도르노가 설파했던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라는 논쟁적인 발언 이후, 그 자신에 의해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쓸 수 없다”는 입장과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야한다”는 두 해석 모두를 수긍했던 모순적인 가능성 위에 기실 예술의 존재론적 모순이 얽혀있다. “아직은 가능한가?”라고.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시는 쓰일 것이고 증언은 지속될 것이다. 예술가들 역시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유지한 채 남겨진 자로서의 일을 할 것이다.  

* 본 원고는 2018년 5월 24일 열렸던 ‘포스트 트라우마 콘퍼런스: 기억투쟁과 평화예술을 향하여’에서 발표되었던 원고로 글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해 다시 게재했음을 밝혀둔다.

박경훈 작가는 제주대학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사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4.3목판화를 중심으로 미술운동을 했으며, 각 출판사를 설립해 200여종의 인문학 서적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탐라미술인협회 회장,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비영리예술공간 포지션민제주 운영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4.3を描くこと
朴京勳(パク·キョンフン) 

悲しみの代筆者、作家たち

悲しみがあまりに深く、恨みが胸に残っていると、沈潜した記憶は決して元には戻らない。重い口を開く人たちも、その大半は幼年期に体験した者である。真に生涯を貫くような地獄絵を見た人には、それを思い出すことさえも生々しい現在の苦痛となるからだ。そのため、歴史の真実は迂回路を探す。4.3でほんとうに苦しんだ者がその生々しい真実と真相を語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後代にこの仕事をやり遂げさせる。まるで何らかの宇宙的原理があるかのように。死者と、言葉を吐き出すことのできない体験者たちが残した4.3の声は結局、他者や非体験者によって描かれる。そして彼らが不明瞭な他人の体験を自己に内面化した不完全な真実が、芸術的想像力によって組み合わされるパズルのように歴史を徐々に復活させる。

4.3を表現した作家たち。左から小説家・金石範(キム·ソクボム )、小説家・玄基栄(ヒョン·ギヨン)、画家・姜堯培(カン·ヨベ)、詩人・李山河(イ·サンハ)

生きた歴史を墓や博物館に送るのは歴史学だが、埋もれた歴史を今日に引き出して生命を吹き込むのは文学であり、芸術だ。金石範、玄基栄、姜堯培、李山河がそうだ。しかし、アイロニカルなことに、彼らの共通点は、芸術家であるという点、直系に4.3の直接的な被害者がいないという事実がある。これは決して偶然ではなく、むしろ「涙でも筆舌でも尽くせない」直接的な苦痛の当事者ではなかったからこそ、それについて語ることができるのだ。だからこそ、利他的な悲しみの代筆者となり、真実の担い手役とな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ことだ。

作家にとって歴史とは

歴史的出来事を当事者として体験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後代の作家にとって、歴史とは何だろうか。「物語」。そうだ。それは「語り継がれる話」だ。前の世代の生の来歴の話が私にまで到達したというあるシグナルだ。少なくとも4.3の歴史はむやみに口にしてはならない禁断の話だったため、聞きやすいとか聞いて楽しい英雄談や武勇談ではなかった。それは息を殺して探し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宝探しのようなものであり、発見された宝物のかけらを合わせて認識の地図を描かねばならない至難のパズルでもある。また、聞きとるためにより隠密になる必要のある秘儀でもあったのだ。

  歴史は伝授される。どんな条件下であれ、後世に伝承された時、それはまた違う歴史を作る起源ともなる。筆者は4.3の歴史的真実を一つ二つ知るにつれ、想像の限界を越える真実の破片が伝えるその驚きと恐怖、そして抑えられない怒りに全身が震えた。そして、断片的にしか知らなかった4.3の全貌をある程度知ったのも、しばらくしてからのことである。その当時はまともな歴史論文もなかったし、遺族が「涙でも筆舌でも」表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にまともな証言採録集もなかった時代だ。遺族らが堰を切ったように証言を吐露し始めたのは、しばらく後のことだった。それでも4.3研究所などがやっと見つけた、勇気ある遺族や体験者の証言は、その時点で4.3を理解する上で貴重な糸口になった。

プリーモ・レーヴィ以降、芸術はまだ可能か
(レーヴィはイタリアの化学者・作家。アウシュヴィッツ強制収容所からの生還者)

筆者は、4.3の縁のおかげで、同じ傷を持つ韓半島と東アジアの周辺国の現場を視察する機会があった。国境線を越えた見知らぬ地にも、悲しみは山のように堆積していた。特に、帝国主義時代を経てアジアで発生した事件は酷いもので、死の形までも最悪だった。まさに憎悪の時代の産物であるかのごとく、証拠や証言があふれていた。まるで「これが人間だ!」と強弁するかのように。5.18の地・光州で、大田の骨嶺谷で、慶山のコバルト鉱山で、南京で、沖縄で、ベトナムで、東アジアの20世紀の「残留物」と「残された者たちの証言」は、人間や文明に対する根本的な問いを投げかける。

東アジアに目を向けると、あちこちに顔を出すアジア版アウシュビッツがある。アウシュビッツ以前に始まり,アウシュビッツが終わった後も長らく続いた、アジアで繰り広げられた野蛮の歴史,そしてその中で明滅していった人間の姿の中で、問わざるを得ない。社会主義体制が、資本主義体制と共存しながらも、資本主義市場経済の導入によって進化していった20世紀に端を発した、意外な世界レベルでの変容と進化の次元がまだ続いている。私たちには可能なのか。20世紀の憎悪と野蛮の時代を超えて、21世紀の共存と連帯は可能なのか。これらの問いに取り残された世代として何ができるのか。

 4.3平和記念館の前で、台湾2.28記念館の前で、ベトナムの憎悪の碑の前で、南京大虐殺記念館の前で、光州の望月洞の前で、私たちは自殺で生を終えるしかなかったプリーモ·レーヴィの絶望と、それでも生き残った者たちが相変らず為すべき何かの間で、悩むしかない。 アドルノの「アウシュビッツ以後に詩を書くことは野蛮だ」という論争的な発言以後、彼自身も「アウシュビッツ以後に詩を書く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立場と「アウシュビッツ以後も詩を書くべきだ」という二つの解釈の両方を受け入れたという矛盾の可能性の上に、実際の芸術の存在論的矛盾が絡み合っている。「まだ可能なのか?」と。明らかなことは、それでも詩は書かれ、証言は続くだろうということだ。芸術家も、人間の限界と可能性の間の緊張を保ったまま、残された者としての仕事をするだろう。

* 注:この原稿は、2018年5月24日に開かれた<ポストトラウマ·カンファレンス:記憶闘争と平和芸術に向けて>で発表したもので、文章の問題意識が依然として有効であると判断し、部分的に修正して再掲載することを明らかにしておく。


悲傷的代言者,藝術家

樸景勳

悲傷可以用一般的含淚的嘆息表達,也可以用言語表達。但是,4‧3的悲傷不能用眼淚或言語來完成。欲哭無淚的人們,訴說他們遭受的傷心。

玄基榮,摘錄自 《渴神》

當悲傷如此之深,以至於我的胸膛積蓄怨恨時,我沉沒的記憶就再也不會消失。大多數張開嘴的人也在童年時期經歷過。對於那些看過真實經歷過地獄的人們,甚至還記得那是當今的痛苦。因此,歷史真相是繞道而行的。那些真正觸及4.3的人將無法說出生動的真理,因此子孫後代將做到這一點。似乎冥冥中有某種宇宙原理。死者和無言以對的經驗留下4.3的聲音最終會被他者或沒有經驗的人刻畫出來。他們將他人的不清晰經驗內化到自己中的不完美的感悟中逐漸復興了歷史,就像藝術想像力相結合的難題一樣。

4‧3的藝術表現參展藝術家。從左至右依次是小說家金石範,小說家玄基榮,畫家姜堯培,詩人李山河

歷史是將活生生的歷史傳給墳墓和博物館的原因,而文學和藝術則是將埋藏的歷史賦予生活的現實。金石範,玄基榮,姜堯培和李山河都是如此。具有諷刺意味的是,他們都有一個共同點,那就是他們都身為藝術家,並且沒有任何人是4.3事件的直接受害者。這不是巧合,而是我們可以談論它,因為我們不是遭受直接苦痛的群體“無論是眼淚還是言語都無法做到” 。這就是為什麼我能夠以無私的悲傷和真正的創作者的身分來承擔這一切。

我的整個童年時代就已經存在4‧3

小型獨裁者朴正熙是日軍佔領期間日軍的日本軍官。他建立了18年的軍事獨裁統治時代,是在我上任時首次發動5.16軍事政變,這是第一次憲政悲劇。在我的童年和成長時期,他是唯一的總統。 「總統是朴正熙,朴正熙是總統。」一個在1979年在公車上獲知朴正熙遇難的消息,我流下了哀悼的淚水,但是上大學不到一年,我的嘴裡突然冒出了「朴正熙是XXX」。對於一個在不知道世界的情況下長大的男孩來說,很快就意識到韓國社會是錯誤的社會。而且,憤怒的感覺比那幾年更強烈。

那時我遇到的是玄基榮的叔叔順義,透過一本簡短的手稿。那是我第一次接觸4‧3。但事實並非如此。如果思考一下,我成長過程中就已經遇到了4‧3。我只是不知道這是4.3的結果。當我還是個孩子的時候,住在烏德(Uddr)的松當村(Sangdang Village),我經常看到山上的南原村(Nawon),那裡有一個男人只有在飲酒和喝酒的那一天才喝酒,一些瘋女人失去了我的頭腦,還有山腰。沒有。當時,每個村莊都有瘋子。在他們被引入4.3之後很長時間,他們了解到由於歷史上的創傷,他們變得精神錯亂,無法承受4.3的後果。 “ Kamegi的不知情的螃蟹”也是如此。我以為只有屋子裡的人吃飯是一種禮節,但這與意識到這是一種不能帶家人或鄰居的叔叔的秘密禮節是一樣的。

此外,由於年輕時在春季旅行中經過一條名為``金善奈''的美麗小溪,由於4.3而被廢棄,這是最後一個共黨五毛在這裡被捕獲的事實,也是它旁邊的一個村莊。於4.3年被廢棄,並成為了李承晚政權統治下的松當牧場,其規模超過400萬坪,在4.3行動中被赤害以及隨後的5.16政變部隊滅絕。 ``我後來知道情況就是如此。只有了解了4.3,我的家鄉周圍的歷史景象才開始出現。直到我遇到4.3的真相時,才發現家鄉的風景確實被4.3曲射了。

濟州島上的4.3爆炸不僅僅傷及了村民,甚至大自然的風景也在吹撫著。在不了解4.3的情況下是未知的,我會通過經驗來描述它。在濟州島,4.3之後的任何事物都必須通過4.3才能達到其本質。

即使喝醉的人說「4.34」,村民們也遮住孩子的眼睛和耳朵。他說:“這很重要。”所以4.3已經和我的童年有關。但是,很可能是從那時起,我與順義叔叔認識了4.3,我認識到4.3是我一生中不可避免的紐帶。順義叔叔是個強大的大錘,啟發了我。 這也是一生難忘的回憶。

對於作者來說,歷史是什麼?

對於後來無法參加聚會的歷史事件的作家來說,歷史是什麼? “故事”。而已。這是一個傳世的故事。這標誌著我已經了解了上一代的出生地。至少4.3的歷史是一個禁止的故事,不應不必要地談論它,因此它不像一個容易聽或不舒服的故事也不是有趣的英雄故事。這就像您必須喘息著去尋找尋找寶藏碎片一樣,這是一個拼圖遊戲,需要您比對所發現的寶藏碎片來映射感知。這也是一個艱鉅的難題,您必須在認知中找到所發現的寶藏。這也是一個謎,需要進一步保密才能傾聽。

歷史傳承。無論如何,當傳給後代時,它也是另一個歷史的起源。當我了解到4.3的一兩個歷史真相時,我感到震驚,恐懼和無法控制的憤怒而顫抖,這些情緒,讓真相的碎片超出了想像的界限。而且,距離我在某種程度上了解4.3的整個方面已經很長時間了,這是我從片段和片段中學到的。那時,當時沒有適當的歷史文獻,也沒有死者家屬的倖存者。倖存者們開始像爆炸一樣作證很久了。儘管如此,在4.3研究所幾乎找不到的倖存者或有經驗的勇氣的證詞是當時理解4.3的寶貴線索。

普里莫•萊維(Primo Levi)之後,藝術仍然有可能嗎?(萊維是義大利化學家兼作家,奧斯威辛集中營的倖存者)

多虧了4.3的連結,我才有機會參觀了朝鮮半島和東亞鄰國了解同樣的創傷的景象。即使在越過邊界的陌生土地上,悲傷也像山一樣堆積。特別是在帝國主義時期亞洲發生的事件是可怕的,甚至死亡的形式也是最糟糕的。拯救仇恨時代的證據和證言氾濫成災。他們彷彿在說:“這是一個人!” 從5月18日的光州,到大田的高露果谷到南京的鈷礦,到南邊的沖繩,再到越南,東亞20世紀的“遺存物”和“證人證言”提出了有關人類或文明的基本問題。

當您將目光轉向東亞時,亞洲版的奧斯威辛集中營展現出內在的肉體。在人類滅絕的人類面前,亞洲的野蠻歷史始於奧斯威辛之前,並在奧斯威辛結束之後持續了很長時間。儘管20世紀的社會主義制度和社會主義制度與世界其他地區並存的社會主義制度和資本主義制度並存,但由於引入資本主義市場經濟體製而仍在發展,但仍在進行意想不到的全球體系建模。正在進行的變革和進化空間。我們可以嗎?在20世紀仇恨與殘酷時代之後的21世紀,共存與團結是否可能?在所有這些問題中留下的那一代人,我們該怎麼辦?

在4.3和平紀念堂前,在台灣2.28紀念堂前,在越南仇恨紀念碑前,在南京大屠殺紀念堂前,在光州望月洞前,我們死於自殺普里莫•萊維 (Primo Levi)的絕望是唯一可能的,而倖存者仍然必須做的事情仍然要擔心。在阿多諾宣揚有爭議的言論之後,“即使在奧斯威辛之後寫詩也是野蠻的”,他接受了自己的解釋:“奧斯威辛之後我不能寫詩”和“我必須在奧斯威辛之後我寫詩”。在矛盾的可能性上,現實藝術的本體論矛盾交織在一起。 “還有可能嗎?”清楚的是,詩歌仍將繼續書寫,見證將繼續。藝術家還將作為剩餘物工作,以保持人類極限與可能性之間的張力。

*注:該手稿發表在2018年5月24日舉行的《創傷後會議:邁向記憶與和平藝術》 上。
朴京勳(パク•キョンフン) 

悲しみの代筆者、作家たち
悲しみがあまりに深く、恨みが胸に残っていると、沈潜した記憶は決して元には戻らない。重い口を開く人たちも、その大半は幼年期に体験した者である。真に生涯を貫くような地獄絵を見た人には、それを思い出すことさえも生々しい現在の苦痛となるからだ。そのため、歴史の真実は迂回路を探す。4.3でほんとうに苦しんだ者がその生々しい真実と真相を語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後代にこの仕事をやり遂げさせる。まるで何らかの宇宙的原理があるかのように。死者と、言葉を吐き出すことのできない体験者たちが残した4.3の声は結局、他者や非体験者によって描かれる。そして彼らが不明瞭な他人の体験を自己に内面化した不完全な真実が、芸術的想像力によって組み合わされるパズルのように歴史を徐々に復活させる。

4.3を表現した作家たち。左から小説家・金石範(キム•ソクボム )、小説家・玄基栄(ヒョン•ギヨン)、画家・姜堯培(カン•ヨベ)、詩人・李山河(イ•サンハ)

生きた歴史を墓や博物館に送るのは歴史学だが、埋もれた歴史を今日に引き出して生命を吹き込むのは文学であり、芸術だ。金石範、玄基栄、姜堯培、李山河がそうだ。しかし、アイロニカルなことに、彼らの共通点は、芸術家であるという点、直系に4.3の直接的な被害者がいないという事実がある。これは決して偶然ではなく、むしろ「涙でも筆舌でも尽くせない」直接的な苦痛の当事者ではなかったからこそ、それについて語ることができるのだ。だからこそ、利他的な悲しみの代筆者となり、真実の担い手役とな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ことだ。

作家にとって歴史とは

歴史的出来事を当事者として体験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後代の作家にとって、歴史とは何だろうか。「物語」。そうだ。それは「語り継がれる話」だ。前の世代の生の来歴の話が私にまで到達したというあるシグナルだ。少なくとも4.3の歴史はむやみに口にしてはならない禁断の話だったため、聞きやすいとか聞いて楽しい英雄談や武勇談ではなかった。それは息を殺して探し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宝探しのようなものであり、発見された宝物のかけらを合わせて認識の地図を描かねばならない至難のパズルでもある。また、聞きとるためにより隠密になる必要のある秘儀でもあったのだ。

歴史は伝授される。どんな条件下であれ、後世に伝承された時、それはまた違う歴史を作る起源ともなる。筆者は4.3の歴史的真実を一つ二つ知るにつれ、想像の限界を越える真実の破片が伝えるその驚きと恐怖、そして抑えられない怒りに全身が震えた。そして、断片的にしか知らなかった4.3の全貌をある程度知ったのも、しばらくしてからのことである。その当時はまともな歴史論文もなかったし、遺族が「涙でも筆舌でも」表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にまともな証言採録集もなかった時代だ。遺族らが堰を切ったように証言を吐露し始めたのは、しばらく後のことだった。それでも4.3研究所などがやっと見つけた、勇気ある遺族や体験者の証言は、その時点で4.3を理解する上で貴重な糸口になった。

プリーモ・レーヴィ以降、芸術はまだ可能か
(レーヴィはイタリアの化学者・作家。アウシュヴィッツ強制収容所からの生還者)

筆者は、4.3の縁のおかげで、同じ傷を持つ韓半島と東アジアの周辺国の現場を視察する機会があった。国境線を越えた見知らぬ地にも、悲しみは山のように堆積していた。特に、帝国主義時代を経てアジアで発生した事件は酷いもので、死の形までも最悪だった。まさに憎悪の時代の産物であるかのごとく、証拠や証言があふれていた。まるで「これが人間だ!」と強弁するかのように。5.18の地・光州で、大田の骨嶺谷で、慶山のコバルト鉱山で、南京で、沖縄で、ベトナムで、東アジアの20世紀の「残留物」と「残された者たちの証言」は、人間や文明に対する根本的な問いを投げかける。

東アジアに目を向けると、あちこちに顔を出すアジア版アウシュビッツがある。アウシュビッツ以前に始まり,アウシュビッツが終わった後も長らく続いた、アジアで繰り広げられた野蛮の歴史,そしてその中で明滅していった人間の姿の中で、問わざるを得ない。社会主義体制が、資本主義体制と共存しながらも、資本主義市場経済の導入によって進化していった20世紀に端を発した、意外な世界レベルでの変容と進化の次元がまだ続いている。私たちには可能なのか。20世紀の憎悪と野蛮の時代を超えて、21世紀の共存と連帯は可能なのか。これらの問いに取り残された世代として何ができるのか。

4.3平和記念館の前で、台湾2.28記念館の前で、ベトナムの憎悪の碑の前で、南京大虐殺記念館の前で、光州の望月洞の前で、私たちは自殺で生を終えるしかなかったプリーモ•レーヴィの絶望と、それでも生き残った者たちが相変らず為すべき何かの間で、悩むしかない。 アドルノの「アウシュビッツ以後に詩を書くことは野蛮だ」という論争的な発言以後、彼自身も「アウシュビッツ以後に詩を書く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立場と「アウシュビッツ以後も詩を書くべきだ」という二つの解釈の両方を受け入れたという矛盾の可能性の上に、実際の芸術の存在論的矛盾が絡み合っている。「まだ可能なのか?」と。明らかなことは、それでも詩は書かれ、証言は続くだろうということだ。芸術家も、人間の限界と可能性の間の緊張を保ったまま、残された者としての仕事をするだろう。

* 注:この原稿は、2018年5月24日に開かれた<ポストトラウマ•カンファレンス:記憶闘争と平和芸術に向けて>で発表したもので、文章の問題意識が依然として有効であると判断し、部分的に修正して再掲載することを明らかにしてお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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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 2020-07-15 17:53:37
4.3은이념에따른사건이었지.그리고박정희땜시당신들배부르게살잖아.무슨헛소리하십니까?누리거다누렸으면서
14.***.***.38

제주도민 2020-07-14 19:07:16
작가에 역사란 픽션을 구성하기 위한 소재일 뿐
그것이 팩트일 수 없다는 대명제를 간과하시네
12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