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52) 흔들리다/ 최성아

해무에 싸인 성산일출봉 ⓒ김연미
해무에 싸인 성산일출봉 ⓒ김연미

거친 활자 언어들이 호우로 쏟아진다
높낮이 가리지 않고 몰염치로 파고드는
주의보 읽기도 전에
수위 넘는 제보들

산 하나 허물도록 핏대 세운 모다깃비
장마도 질긴 장마 시류를 끌고 간다
묻힌 숲 단서를 찾다 반성문을 쓰는 밤

반듯한 궁리들이 거름인 양 엎드렸는데
가진 자 욕심 앞에 남은 건 얼룩 자국
참 오래 잊고 지내던 책의 서문 펼친다

-최성아,<흔들리다> 전문-

장마가 참 오래 간다. 바쁜 와중에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날씨가 어떻게 변하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유독 이번 장마가 인식되는 이유에는 코로나19 영향도 컷으리라. 뜬금없이 들이닥친 그 작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마비시켜 놓은 이 사태. 초기의 황당함이 지나고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시간, 인간이 저지른 행위들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이 사태를 되짚어 보며 평소 인지하지 못했던 하루하루의 날씨까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날씨 자체도 울퉁불퉁했다. 멀쩡하다가도 불현듯 ‘산 하나 허물도록 핏대’를 세우며 한꺼번에 달려들어 두들겨 패는 주먹들처럼 ‘모다깃비’도 많았고, 그렇게 모다깃비가 오다가도 또 어느 순간 멀쩡한 얼굴이 되어 ‘내가 뭘?’ 하는 표정으로 맑은 하늘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딘가는 마을이 물에 잠기기도 하고, 밤새 잠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아침이면 부스스한 얼굴을 한 채 사람들은 일터로 나가야 했다. 그 아침 길은 또 어땠는가. 아침저녁으로 터줏대감처럼 해무가 마을을 덮고, 한라산을 돌아가며 철벽처럼 진을 친 산 안개 속을 뚫고 하루를 견뎌내야만 했다.  

살을 부비며 살던 사람들이 스스로 두어야 했던 그 거리, 그 틈으로 어색함과 황망스러움이 끼어들고, 황망스러움 위로 반성의 기운도 스며들었지만, 그 반성은 아직 유효할까. 반성의 한 쪽에선 여전히 ‘거친 활자 언어들이 호우로’ 쏟아진다. 너무 쉽게 내뱉는 언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기억. 그러나 행동의 사실들은 시간의 표층에 지문처럼 남아 있을 것이고, 어느 날 문득 또 다른 바이러스를 양산해 낼지도 모를 일이다. 더 많이 내려놓고, 더 깊게 엎드려야...긴 장마와 자발적 격리의 시간에 ‘오래 잊고 지내던’ 책 한 권 펼쳐 들 일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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