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 작가 참여, 다양한 예술 시도 돋보이는 '2020 4.3미술제'

70년도 넘는 과거의 역사를 예술로서 구현하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창작자의 상상력과 감성, 그리고 역사 인식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올해로 27년 째. 탐라미술인협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제주의 미술인들은 매해 각자의 방식으로 제주4.3을 기억하며 세상에 알린다.

올해 <4.3미술제>는 공동체 집단에게 뿌리 깊은 트라우마를 심어준 비현실적인 삶과 죽음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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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덕 작가의 '애기꽃' ⓒ제주의소리

제주4.3 동안 벌어진 학살과 폭력은 제주 섬 전체를 아울렀다. 최재덕 작가가 제작한 테라코타 작품은 눈을 감고 웅크린 모습이 갓 태어난 물애기에 가깝다. 어미의 자궁에서 나온 물애기는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나 아기들은 머리만 남아있거나 일부가 깨지고 잘라진 손상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다. 아기를 잉태한 여성의 머리 하나도 비참하게 훼손돼 섬 중앙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아기 모형들로 채워진 <애기꽃>은 제주가 생명들이 태어나난 섬이자, 생명들이 참살당한 섬이라는 이중적 사실을 선명하게 주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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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우 작가의 '피를 마시는 꽃' 출처=탐미협. ⓒ제주의소리

4.3 당시 동굴은 제주도민들이 선택한 피난처 중 하나다. 박주우 작가가 작품 소재로 선택한 ‘청미래덩굴’은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기에 4.3 피난민들이 사용했던 식물이다. 덩굴 하나까지 신중하게 고르고 작은 인기척이라도 새어나갈까 내내 긴장하며 버텼고, 그렇게 곳곳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도민들은 희생자들의 몫까지 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오늘 날 ‘힐링의 섬’ 제주를 만들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박주우는 땅에서 솟아올라 인간 형태를 띤 청미래덩굴을 통해 “제주는 많은 이의 피를 머금은 땅”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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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작가의 '곡기' 출처=탐미협. ⓒ제주의소리

한 생명이 살아가려면 영양 공급은 필수다. ‘먹어야 산다’는 말은 간단명료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삶의 기본 원칙이다. 엎어지고 나뒹구는 사발 속에는 하얀 쌀알이 담겨있다. 쌀과 작은 화산석 돌멩이들이 섞여있는 그릇도 있고, 어느 것은 돌멩이 뿐이다. 김영훈 작가가 흩트린 그릇은 한 명 한 명의 입으로 치환된다. 불타버린 집 안을 뒤져 남은 곡식을 털어 넣었던 입, 동굴 안에서 숨죽이며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집어넣었던 입. 생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의 곡기마저 어쩌면 사치였을 선조들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는, 매끄럽게 빚어진 기성품 도자기 보다 <곡기> 작품 속 투박한 그릇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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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석 작가의 '상여' ⓒ제주의소리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인 상여. 그러나 강문석 작가의 <상여>는 괴이하게 뒤틀리고 구부러진 녹슨 철의 형태로, 흡사 신체 뼈를 연상케 한다. 이런 모습은 고인을 마지막 안식처로 모시는 본래 기능과는 거리가 꽤 멀어 보인다. 그 아래는 화약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짙고 탁한 흙으로 제주 섬이 만들어져 있다. 비참하고 억울한 일방적이었던 죽음들은 상여에 태울 시간도 여유도 배려도 없었다. 죽음을 위한 추모마저 입을 틀어막고 손가락질 하며 상여는 한동안 만신창이로 방치돼 있었다. 그렇게 <상여> 속 망자, 즉 4.3희생자를 포함한 제주4.3 자체는 상여에 오르지 못한 채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그리고 진실과 왜곡 사이에 머물러 있다. 뒤틀린 채 멈춰있는 상여가 온전히 제 모습을 찾고 망자를 안식처에 내려놓는 순간은, 바로 제주4.3 희생자에 대한 온전한 배·보상과 함께 4.3의 정명까지 달성하는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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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재 작가의 '남겨진 이야기' ⓒ제주의소리

상자에서 새어나오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심장박동 소리. 박건재 작가는 테두리를 철제로 마감한 관 모양의 나무 상자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심장박동 소리를 바깥으로 끊임없이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비록 이승을 떠났지만 한으로 남아있는 억울함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죽음을 후세들에게 전하고 싶은 4.3 영령들의 강력한 의지로 다가온다. 그것은 바로 ‘기억하라.’ 나를 포함한 수 만 명의 양민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기억해 달라, 다시는 이 땅에 학살이 반복되지 않게 우리를 기억하라는 이야기가 바로 박건재의 <남겨진 이야기>다.

이처럼 <2020 4.3미술제>에서는 4.3을 둘러싼 삶과 죽음에 대한 예술가들의 고민을 만날 수 있다. 4.3학살의 책임에서 피할 수 없는 이승만을 필두로 한 정치·군사세력을 정면으로 지목하는 작품(박은태·방정아·백주순 등), 국가 폭력이란 공통된 아픔을 보여주는 인도네시아 작가들(만구푸트라·F.X.하루소노·아라마이아니 페이잘), 여성의 시선으로 주목한 작품(박주애·장유진·박지원 등) 등 4.3과 국가 폭력을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도 함께 채워져 있다.

이 밖에 제주·DMZ·대만·오키나와를 연결하며 전후 동아시아의 흔적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담은 양동규, 이덕구에 대해 고찰한 고경화, 실존 해녀의 몸을 통해 고단했던 제주의 현대사를 압축한 김산, 제주4.3의 역사를 압도적인 스케일로 화폭에 담아낸 이명복 등 참여 작가들의 작품은 저마다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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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복 작가의 '광란의 기억2'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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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3미술제 전시장 풍경.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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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3미술제 전시장 풍경. ⓒ제주의소리

더불어 <4.3미술제>가 처음인 도외 참여 작가들을 모으고, 서울뿐만 아니라 최대한 활동 지역을 고르게 배분하는 등 탐라미술인협회는 관객들이 4.3을 표현하는 다양한 예술을 접하도록 이번 행사를 구성했다. 

“4.3미술제는 반성이 아니라 각성(覺醒)이다. 어느 날 문득, 마주한 낯선 경험(4.3, 역사, 섬, 타자의 상처, 고통)은 이전의 나를 완전히 쓰러뜨린다. 각성은 나와 타자의 연결로서 동형, 동류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연결이 아니라 타자의 공간에서 내가 출몰하고 나의 공간에서 불현 듯 타자가 출몰하는 던져진 불편한 덩어리이다.”

- 2020 4.3미술제 소개의 글

역사를 직시하는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진부하지 않은 새로움이 무엇인지” 또 다른 예술적 표현 방식을 고민하는 탐라미술인협회의 <2020 4.3미술제>는 멈추지 않고 진화하는 4.3 예술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2020 4.3미술제>는 8월 2일까지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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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3미술제 전시장 전경.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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