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72.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역, 열린책들, 2011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역, 열린책들, 2011. 출처=알라딘.

1. 무엇이 ‘나’를 무너뜨리는가

신종 코로나는 보편적인 재앙 속에서도 개별적으로 자행되는 악은 멈추지 않고 일어난다. 최근에도 한 어린이가 부모에 의해 여행용 가방 안에 갇혀 사망했다. 심한 고문에 시달리던 한 여자 어린이는 부모의 학대를 피해 옆집 발코니를 통해 다행히도 도피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어린이의 삶은 학대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어린이집의 아동학대 사건은 잊을 만하면 다시금 사회면에 등장한다. 한 택시 기사는 응급 환자를 태운 차를 막고 시비를 벌여 끝내 환자를 숨지게 했다. 주민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던 아파트 경비원은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한 철인삼종 경기 선수는 감독과 팀 닥터 그리고 선배 선수들의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런 일들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이런 일들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의 내면에 악마적인 본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지속적인 고문과 학대를 자행하는 사람들의 잔인한 수법을 보면 그들은 마치 피해자의 자아가 어떻게 하면 무너질 수 있는지를 연구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악당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의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배신하게 하고, 2+2=4가 참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었듯이 말이다. 어린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의 사랑일 것이다. 환자를 이송하는 보호자가 가장 바라는 것은 시간일 것이다. 격무와 차별에 시달리는 경비원이 바라는 것은 배려와 친절일 것이다. 운동선수는 아마도 극심한 훈련으로 지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가해자들은 그들에게 정 반대의 것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 역시 섣부른 면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고, 그들이 무엇에 고통을 느끼는지를 쉽사리 추정하는 것은 그의 자아를 또 다시 고통에 빠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타고난 기질이 다르고, 자라난 환경이 다르다. 각자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면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환경에 맞추어 적절한 자아의 경계를 형성한다. 그 경계는 외부의 공격을 견디며 확장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겠지만, 내부에서는 욕망과 신념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자아가 직조된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거부될 때, 그리고 내가 궁극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정될 때, 자아라는 그물은 너덜너덜해질 것이고 끝내 해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추정하는 것이 섣부른 일이 될 수 있으므로 할 수 없이 부끄러운 나의 이상한 성격을 예로 들자면, 나는 명랑하고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다. 어디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웃는 얼굴로 상대를 추켜세우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사회생활을 잘하는 소위 ‘인싸’들이다. 나는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모욕감을 느낀다. 그의 가벼운 인사치레의 칭찬이 마치 힘들게 살아온 나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잘 하지 않게 된다. 굳은 얼굴로 불친절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이 되어 버렸다. 이런 성격은 이해되거나 권장되기는커녕 끊임없이 교정을 강요당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칭찬을 들어도 불평을 한다고 나를 욕할 것이다. 물론 욕을 먹거나 비난을 받는 것이 칭찬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 그러나 가벼운 명랑성에 대한 거부감은 나의 유소년기의 경험과 관련된 무의식적 욕망과 관련된 것일 수 있으므로 쉽사리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게 강요가 지속된다면 나는 나 자신의 자아를 직조해 나가는 일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세상에는 ‘나’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념과 욕망으로 직조된 ‘자아’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 자아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 위태롭게 걸쳐 있을 수 있다. 내게는 사소하게 보이는 어떤 것이 그의 자아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세상의 공격에 맞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중요한 사소한 것을 계속해서 직조해나갈 방안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행위가 우리를 선이나 악으로 밀어 넣는다.

2.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

계절학기에 열린 독서세미나라는 과목에서 프로이트의 주저인 《꿈의 해석》(김인순 역, 열린책들, 2011)을 학생들과 함께 통독했다. 프로이트의 사상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학문적인 관심에서 그의 주저를 읽겠다고 참여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의외로 책 제목을 보고 해몽의 방법을 알기 위해 수업에 참여했다고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또 어떤 학생은 인셉션이라는 영화에서 처럼 자각몽을 마음대로 꾸는 방법을 터득해서 원하는 꿈을 마음껏 꿔보고 싶다고도 했다. 그런 학생들은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이 책에서 말하는 테제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것은 바로 “꿈은 소원 성취다”라는 3장의 제목이다. 본문만 714쪽에 이르는 이 책은 이 하나의 명제를 해명하기 위해 서술된 것이다. 정신분석 의사인 프로이트는 신경증에 시달리는 자신의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신경증의 원인을 찾고자 했고, 환자의 무의식에 숨어 있는 억압된 소원, 혹은 억제된 욕망이 아마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그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환자의 꿈 내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꿈은 꿈꾸는 사람의 무의식에 감추어진 억제된 욕망에 이르는 통로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함으로써 신경증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학문적인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이 책은 과학적인 의학서로 인정받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이해하는 철학책으로 평가되었다. 정신분석학이 심리치료의 영역에서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책이 그렇게 읽히는 이유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과 그 무의식에 대한 대담한 가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프로이트의 꿈 해석이 보여주듯이 꿈 해석을 깊이 할수록 우리는 인간이라는 개념의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그 개념을 해체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고 개별적인 인간이 처한 우연성에 주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평가가 어찌되었든 이 책에서 전개되는 프로이트의 학문적인 노력은 매우 끈질기다. 그는 꿈이 갖는 심리적인 가치가 있으며, 기존의 꿈 해석 방법들이 가지고 있는 방법론적인 약점들을 열거하고, 꿈이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꿈 해석의 방법을 체계화하기 위해 다양한 용어들을 만들어냈다. 꿈사고, 꿈출처, 꿈내용, 꿈작업, 왜곡, 전위, 심급, 이차가공, 무의식, 의식, 전의식 등의 용어들이 그런 것들이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꿈사고는 우리의 의식적인 사고와 질적으로 다르다. 꿈사고의 목적은 위에서 말한대로 소원성취다. 꿈사고는 억압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꿈재료를 가지고 주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꿈내용을 만들어낸다. 꿈사고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꿈내용의 재료로 삼는 것은 최근의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들이다. 무의식속에 억눌려 있는 잠재적인 꿈내용들은 최근의 경험들에 의해 자극받고 표현의 통로를 제공받게 되면 외현적인 꿈내용으로 형상화된다. 여기서 잠재적인 꿈내용은 일차심급의 검열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 꿈내용이 무의식속에 침잠해 있던 이유는 그것이 현실적인 억압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므로 꿈사고는 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즉 의식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왜곡하거나 전위시킨다. 꿈에서 등장하는 것들은 따라서 사소하거나 단순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꿈사고에는 “꿍꿍이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230쪽)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꿈내용을 망각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전의식에 의한 이차적인 검열에 의한 것일 수가 있다. 우리가 꿈내용을 기억하더라도 그것은 원래의 꿈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왜곡을 프로이트는 이차가공이라고 부른다. 꿈이 무의식적인 욕망의 표현일 수 있는 이유는 자는 동안 우리의 의식이 행하는 도덕적 검열의 기능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며, 그 사이를 비집고 꿈사고는 소원성취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꿈의 소원성취를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배고픈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으며 발버둥친다. 그러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내적 욕구에서 출발한 충동은 순간적으로 발산되는 것이나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힘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 아이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내적 자극을 종식시키는 ‘충족 체험’을 겪은 다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의 본질적인 구성성분은 특정 지각(예를 들어 음식물)의 출현이며 이 지각의 기억 형상은 출현 순간부터 욕구 충동의 기억 흔적과 결합된다. 같은 욕구가 다음에 또 일어나는 즉시 이미 형성된 결합에 힘입어, 지각의 기억 형상에 에너지를 리비도 집중하여 지각 자체를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즉 이전의 충족 상황을 재현하려는 심리적 충동이 발생한다. 이러한 충동을 우리는 소원이라고 부른다. 지각의 재출현은 소원 성취이며, 욕구 충동에 의한 지각의 충분한 리비도 집중은 소원 성취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 '꿈의 해석' 654쪽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재출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소원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며, 소원 성취를 향한 욕구충동에 의한 리비도적인 에너지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에너지가 꿈에서라도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그 욕구충동의 실현을 가로막는 힘이 초자아와 같은 외적인 힘이라면 꿈사고는 그 힘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우회로를 찾지 않을 수 없고 여기서 불가피하게 꿈내용이 왜곡되거나 전위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206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꿈재료는 최근의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들이지만 거기에 담기는 것은 무의식속에 억압된 유년기의 소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서는 어떤 것도 끝나는 법이 없고 사라지거나 잊혀지지 않는다. …… 30년 전에 받은 모욕이라 하더라도 일단 무의식적 흥분의 출처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어 내면, 30년 동안 항상 새로운 것처럼 작용한다. …… 정신 요법의 과제는 무의식적 과정을 해결하고 망각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667쪽)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의식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로지 꿈만이 그 무의식으로 통하는 문을 살짝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꿈속에서 어린이는 그 충동과 더불어 계속 살아있다”(239쪽)는 프로이트의 말은 우리 자신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 사실은 내 안에 있는 내가 모르는 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나의 이상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여전히 살아서 울고 있는 어린 나를 대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끔찍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그 사람들을 선이나 악으로 분류하고 그 악행의 합리적인 동기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얼굴이 공개된 가해자들의 그 평범성을 볼 때마다 과연 저 사람은 왜 자신이 그러한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희생자의 자아를 파괴하면서 아마도 그들의 자아 역시 알 수 없는 충동에 의해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행동을 정합적으로 짜 맞추기 힘들 것이다. 프로이트는 “미치광이는 깨어있을 때 꿈꾸는 사람”이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126쪽), 이 말은 뒤집어보면 우리는 꿈속에서 모두 미치광이라는 말이 된다. 다만 꿈꾸는 과정에서 우리의 감정은 운동조직에서 감각지각으로 퇴행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실제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프로이트를 읽게 되면 어떤 사람을 천재 혹은 바보로, 정상인 혹은 미치광이로, 선인 혹은 악인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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