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7) 국군 최초 여군 강길화 할머니...“126명의 제주 여성 기억해야 해 ”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나선 제주여성들. 바로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의 여군으로 기록된 해병대 4기 126명이다. 어느덧 허리는 구부러지고 얼굴은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됐지만 ‘해병대 4기’라는 자부심과 나라 사랑은 찬란한 보석처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해병대 4기 중 여성 용사 126명 가운데 한 명인 강길화(89) 할머니를 만난 날은 7월 28일. 마치 할머니에게 군 입대 소식이 전해진 1950년 8월 24일 여름날처럼 후텁지근했다. 

“(서귀포) 강정천은 그때도 물이 참 좋았어. 그곳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학교 직원들 친목회를 했는데 오후가 되니까 급사 직원이 막 뛰어오더라고. ‘강 선생! 여교사 회의가 있으니 준비하세요’라고 했어. 그래서 모이니 (입대) 준비를 하라는 거야.”

법환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는 강 할머니를 포함한 여교사 3명이 해병 소집 명령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북한군이 부산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한 땅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던 위급한 상황이라 여교사들도 나라를 구하는데 참여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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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4기 강길화 할머니. 당시 18살 나이에 법환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제주의소리

입대 절차는 이것저것 따져볼 여유도 없이 빠르게 이뤄졌다. 제주도립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제주동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제식훈련도 받았다. 곧바로 31일 제주북초등학교 교정에서 해병대사령관 앞에서 입대 선서를 하고 군번을 부여받았다. 한국 군 최초의 여군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와 관련해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은 자서전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에서 “우리나라 여자 군인 역사는 1948년 간호장교 후보생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일반 여자 군인으로 범위를 좁혀 보면 6.25전쟁 발발 후 해군·해병대에 입대한 해병대 4기 여 해병 126명이 그 출발”이라며 “육군의 여자 군인이 같은 해 9월 5일 탄생했으니 해군·해병대가 6일 가량 빠른 셈”이라고 설명한다.

초등학교 교사라고 했지만 20세도 안되는 어린 나이였다. 본인도 “철부지였다. 어린 나이였으니 산지항을 떠날 때만해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컸다. 평소에도 엄격하시던 아버지는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짧은 인사만 남기셨다”고 기억했다.

9월 1일 제주 산지항을 떠나 2일 저녁 진해항에 도착한 여군들을 기다리는 것은 고된 기초훈련이었다. M1소총을 들고 제식교련, 총검술, 사격 훈련, 포복 훈련, 실제 사격까지 남자 병력과 동일한 훈육 과정을 거쳤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여자 교관의 엄격한 ‘군기’였다.

“지금도 교관들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네.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오느라고 집합에 늦은 사람을 벌을 줬어. 빠따(방망이)로 엉덩이를 때릴 만큼 무섭게 군기를 잡았는데 지금도 잊히지가 않네. 돌이켜보면 전시 중인 교육이었으니 조금 과했지만 그리 나쁘다곤 생각하지 않아. 그것도 기억나네. 사격장에 갔는데 어떤 남자가 눈을 가린 채 두 손이 묶여있었어. 아마 간첩인 것 같아. 군인 세 명이 그 사람에게 총을 겨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살하더라고. 그 장면을 왜 우리들에게 보여줬는지 의아했는데 아마도 탈영병이 생기지 않도록 신신당부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 물론 우리 126명은 한 사람도 이탈하는 사람 없이 열심히 훈련을 받았지.”

해병대 4기들이 진해 경화초등학교에서 가진 첫 기초훈련은 9월 20일부터 해군 신병훈련소 특별분대로 이어진다. 해군 특별분대 훈련은 여자 교관이 아닌 남자 교관이 담당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기록이 《제주와 해병대》(1997)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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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4기생들이 진해에서 전투복을 착용하고 훈련받는 모습. 출처=제주와 해병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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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통제부 헌병대에 배치된 해병대 4기생들. 왼쪽부터 김정희, 송경애, 좌은순. 출처=제주와 해병대. ⓒ제주의소리

“특별분대로 넘어가니까 ‘그렇게 좁데다게(좋을 수가 없었다)’라고 피교육자들은 술회했다. 귀엽고 아리따운 처녀들을 대하니 남자의 강한 군인 정신이 누그러져서 일까. …… 그러나 고된 훈련이기에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그때마다 남자 교관에 의해 기합도 많이 받아 울었다고 한다. 조금만 기합을 줘도 그때마다 못하겠다고 응석을 부리는 통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당시 교관들은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여성의 근면, 착실, 온순한 특유의 성격은 고된 훈련도 변함없이 무난히 참아주었다고 한다.”
- 《제주와 해병대》 가운데 일부.

기초 훈련을 마친 날짜는 10월 10일. 이들은 학력이나 직업 등을 고려해 장교 4명, 병조장 2명, 일등병조 7명, 이등병조 9명, 삼등병조 5명, 상병 89명으로 임관·임용됐다. 이 중 54명은 본인 희망에 따라 곧바로 제대했다. 나머지 72명은 부산 해군본부, 진해 통제부와 해군병원에서 보직을 받아 근무하고 1951년 말까지 모두 제대했다.

강 할머니는 이등병조(하사) 계급을 받고, 동기생 홍정향·문숙영과 함께 통제부 정훈국에 배치됐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 보조 역할이었지만 고향 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해준 동료 군인들 덕분에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업무는 주로 장부 정리였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쟁통이라 그런지 몰라도, 군 기록들이 엉망이었어. 낮이고 밤이고 계속 정리의 연속이었지. 함께 근무한 장교라고 해도 지금으로 치면 나이가 어린 청년 장교였으니 서투르긴 했을 거야.”

짧지만 최선을 다한 군 복무를 11월 23일 마치고 강 할머니는 곧바로 교단으로 복귀한다.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학교를 지킨 남자 교사들이 마치 자신과 교대하듯 군복을 입고서 전쟁터로 향하는 모습에 복잡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강 할머니는 군 제대 후 교사, 남제주군청, 서귀포시청에 근무하고 서귀포문화원 창립 이사와 부원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사회를 위해 활동했다. 동기들과는 때마다 모임을 가지고 해병대 기념행사에도 참석하며 끈끈한 정을 이어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때때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은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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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4기생들이 전역 후 만장굴을 찾아 촬영한 기념사진. 강길화 할머니는 이 사진을 30대 후반에서 40대에 촬영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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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천지연폭포를 찾은 해병대 4기생.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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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강길화 할머니(왼쪽)와 동기생인 고순덕 할머니.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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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화 할머니의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원증. ⓒ제주의소리

비록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지만 나라의 부름에 기꺼이 따르며 제 역할을 다했던 해병대 4기 여성들. 강 할머니는 본인이 보고 느끼는 한국전쟁의 교훈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바로 다툼과 전쟁 없는 세상이다.

“가정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야. 싸움은 안돼. 비록 남북이 갈라져 있지만 서로 싸우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일방적으로 북쪽에 ‘하지 말자’고 해도 순탄히 되진 않겠지만, 북한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해보여. 우리만 노력하는 게 아니고 이북 사람들도 노력해야지. 서귀포 남원 출신인 중학교 동창이 있는데 고등학교 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북한군에 끌려갔어. 최근 지인이 북한에 사는 그 동창을 만났는데, 죽기 전에 고향 제주에 꼭 오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쟁은 실제 눈으로 보고 경험해야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어. 지금 젊은 사람들은 전쟁을 겪지 않아서 모를 거야. 그러니 후손들에게 설움과 고통을 남겨주면 안될 일이야. 그게 어른들의 역할 아니겠어? 손자-손녀들이 우리처럼 살면 안 되잖아. 앞으로 한반도에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돼. 우리 힘을 지킬 국력은 절대로 있어야 되고말고.”
 

한창 꽃다운 나이였다. 여성이라고 가만 있을 순 없었다. 벼랑 끝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총을 매고 전장으로 뛰어간 용사들이다. 강길화 할머니를 비롯한 한국군 최초의 여군 해병대 4기 126명.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자부심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는 이 여성 용사들은 어린 소녀들이었음에도 젊음을 바쳐 호국혼을 불살랐다. 해병4기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여성 전쟁영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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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화 할머니 집에는 국가유공자의 집 현판이 당당히 걸려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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