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82. 봉사와 아기 어미는 가물수록 좋다

* 봉서 : 봉사
* 어멍 : 어미
* 거물수록 : (비가 안 와서)가물수록

사람이란 누구나 입장에 따라 좋은 쪽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자신에게 좋아야 편해서 좋다. 이를테면 자기중심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비가 와 질척이고 물웅덩이가 파인 길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면 알 것이다. 걸음걸음 한 걸음이 아쉬울 것이다. 얼마나 힘들 것인가. 더듬으며 걷다 넘어지는 날에는 크게 다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더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아기 어미도 마찬가지다. 어린 것을 손잡고 걸리다 갈 바닥에 나뒹굴기라도 하는 날엔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다. 크게 다쳐 아이를 고생시키게도 되려니와 흙탕에 더럽혀진 옷을 빨아 입히려면 한시가 아쉬운 농촌 삶에 군일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런다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입에서 절로 나온 말이 ‘봉서광 애기 어멍은 거물수록 좋나’라 한 것이다.

사진은 1968년에 찍은 밭에서 아기에게 젖을 주는 엄마 모습. 출처=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사지 말짱한 아이 어미로서는 비가 내려 물이 고인 길도 불평 않고 걸어가는 의지가 필요하다. 사진은 1968년에 찍은 밭에서 아기에게 젖을 주는 엄마 모습. 출처=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한 여름에 비가 계속 내리면 우산 장수는 신이 나 입이 귓불에 걸리지만, 반대로 해수욕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다. 세상사란 게 모두 절대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상대성을 지닌다. 이렇게 좋고 나쁨이, 불편함과 편함이 하고 있는 일이나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상대적일 수 있는 법이다.

오늘날과 달리 옛 선인들의 사고나 의식은 반드시 과학에 근거하지 않았다. 삶 속에서 얻어낸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하나의 인과율로 굳어진 자연스러운 이치의 결과물, 곧 경험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생각 여하에 따라 불편한 삶에서 나오는 가벼운 푸념이나 넋두리일 수도 있겠다.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몸이 멀어지면 정도 멀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먼 데로 떠날 수밖에 없어 물리적으로 거리가 생긴 것이면 마음으로 빈자리를 메우려 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봉사 같은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에게 무리한 요구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지 말짱한 아이 어미로서는 비가 내려 물이 고인 길도 불평 않고 걸어가는 의지가 필요하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니 조신해 걸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게 삶이고 생활인의 자세일 것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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