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미디어 발제문] 고영철 언론개혁제주시민포럼 대표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7월 31일 제주4.3 72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제주언론학회(회장 최낙진)와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이 ‘4.3과 미디어’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공동 개최했다. 그 중 3부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불온삐라 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발표(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발표 내용 중 제주4.3에 대한 일부 오류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의 요청으로 토론문 전문과 고영철 명예교수의 발제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애매모호한 기록들이 사실왜곡을 가증시키고, 이 사건의 윤곽을 잡는데 도움을 주기보다 혼란을 가증시키고 있다.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한국 언론사상 첫 번째로 희생당한 언론인은 1961년 12월 21일 서울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에서 처형당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김삼웅, 1998, 91쪽)가 아니고, <제주신보> 제2대 편집국장 김호진이다.

김호진은 1948년 10월경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대정부 선전포고문과 토벌대에게 보내는 호소문(이하 삐라)등을 동료들과 함께 인쇄해준 혐의로 계엄당국에 체포되어 10월 말경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인쇄해준 선전포고문 등은 10월 24일 제주읍내에 살포되었다고 한다. 그가 처형당시 어떠한 유언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승만정부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4·3의 제물로 사라진 것이다.

김호진 편집국장이 무슨 죄로 어떻게 처형당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9년 3월까지의 국내 20개 중앙지(제주신보와 광주에서 발행한 동광신문 포함)가 보도한 제주 4·3사건 관련기사들을 분석해 본 결과, 이에 관한 기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20개 신문 중에, 좌익계 신문들조차 이 사건을 뉴스기사로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스터리의 하나로 남는다. 당시의 신문들이 이 사건을 묵살해 버린 이유가 합법적 폭격기구의 회유와 압력 때문인지, 아니면 물론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해버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제주 4·3기간 동안 제주도 인구(약 30만)의 약 10%에 해당하는 25,0000∼30,000명 정도가 희생당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2001, 537쪽). 이 가운데 절대 다수가 왜 죽임을 당해야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처형당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되듯이, 그동안 흔적도 없이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져가던, 이 일화가 맨 처음 문자화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3년 일본 오사카 문우사(文友社)에서 출판된 김봉현과 김민주의 공편(共編)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를 통해서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간행된 것들 가운데 제주민중항쟁의 실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유일한 자료집이다. 김호진이 제주신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는 사실을 맨 처음 알린 것도 바로 이 책자이다.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1978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출간된 김봉현의 저서‘濟州島 血の歷史-4·3武裝鬪爭の記錄’와 1981년 동경 평론사에서 출판된 문국주의 ‘朝鮮社會主義運動史 事典’에 실린 ‘濟州島の 4·3 鬪爭’을 통해 이러한 사건들이 재차 알려지면서, 여기에 서술된 내용들이 정설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이 사건의 내용들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 간행된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와 김봉현의 저서가 1988년에 아라리연구원에서 펴낸 ‘제주민중항쟁’ <1>과 <2>권과 노민영의 ‘잠들지 않은 남도’(1988)에 소개되면서부터다.

4·3 무장항쟁이 일어나고  4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나서야 외국에서 출판된 도서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이렇게,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은 정부의 강권에 의해 잊혀 지길 강요당해왔던 4·3에 관한 논의가 1987년 6· 29 민주화 선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세를 타고 1989년 5월에‘제주사삼연구소’가 문을 열면서 제주도에서도 4·3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4·3 민중항쟁에 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국내 학술논문과 여러 문헌에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에 관한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등장하고, 김호진 편집국장에 관한 일화도 이 사건의 곁가지로 한 두 줄 정도 소개되기 시작한다.

국내의 출판물 가운데 김호진 편집국장 등이 처형당한 일화를 처음 알린 것은 1984년에 출판된 강용삼·이경수의 편저 ‘大河實錄 濟州百年’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서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신보는 김호진 편집국장을 비롯하여 공무국장, 공무국 차장 등 간부 3명이 계엄군에 의해 처형되는 끔직한 사건을 치렀다. 재산공비의 불온삐라를 신문사 공무국에서 인쇄하다 계엄당국에 적발됐던 것이다(강용삼・이경수, 1984, 999쪽).

4·3 논의가 본격화 된 1990년대에 들어서도 국내의 저술가와 연구자들은 김호진 편집국장과 관련 이와 유사한 절음발이식 반쪽짜리 지식들을 이렇다 할 의문제기 없이 재생산해 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결과,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김호진 국장이 인쇄해주었다는 유인물이 무엇이고, 무슨 이유로 그것을 인쇄해 주었는지 그리고 언제 처형당했는지 등등, 이 사건과 연관된 각종 의문에 대한 궁금증 해소보다, 어떤 문헌의 기록들이 보다 더 정확하고 옳은 것인지조차 분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있다. 대다수가 새로운 증거 사료(史料)도 없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기도 하고, 무비판적으로 과거의 기록을 그대로 베껴서 전달하다보니 오류가 반복되고, ‘역사소설’같은 기록들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껍데기 역사기술로 인해 통일조국건설과 미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독립신보’에서 필봉을 휘두르던 김호진 기자는 존재하지도 않고, 이 사건의 조연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대한민국역사상 최초의 동족상잔 비극으로 알려진 4·3 항쟁당시, 그 이유가 어째든 대한민국 언론역사상 처음으로 희생당한 한 언론인의 생애를 될 수 있으면 좀 더 정확히 조망해 보기위해 이 연구가 출발하였다. 이것은 초창기 제주언론사의 빈 공백을 메꾸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일단 국내외에서 간행된 각종 문헌과 자료에 수록되어 있는 김호진과 이덕구 명의의 삐라 인쇄 사건과 관련된 기록들을 모두 모아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똑같은 하나의 사건(fact)에 대한 기존의 내용들(기록)이 어떻게 진화 또는 퇴화하는지 비교 고찰할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위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역사적 연구방법을 이용했다. 역사적 연구 방법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관찰자들의 보고(報告)를 찾아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정확히 기술하는 동시에 그 일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연구과정을 말한다(차배근, 1990, 350쪽).

이러한 논의에 앞서 우선 김호진 기자가 제주신보 편집국장이 되기 이전까지의 공백기 이력을 정리하고 난 후에, 4·3무장봉기를 주도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체계와 심리전 전담기구의 역할 및 활동을 먼저 살펴보겠다. 이러한 절차는 샛별처럼 살다간 한 언론인의 짧은 생애와 4·3 당시 뿌려진 수많은 삐라들의 생산주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토대로 여기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질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연구문제 1. 김호진 편집국장(이하 김호진) 등이 인쇄해 주었다는 유인물은 무엇인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는가?
연구문제 2. 이 유인물 또는 삐라들은 언제 인쇄되고 언제 살포되었는가?
연구문제 3. 10월 24일에 살포되었다고 한다면, 그날을 택한 특별한 이유나 배경은 무엇인가? 
연구문제 4. 김호진 등이 이를 인쇄해 주었다고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연구문제 5. 김호진 등은 언제 어디서 처형당했는가? 
연구문제 6. 삐라의 인쇄 사건이 신문사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2.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의 조직체계와 심리전 기구

1)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의 조직체계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남로당 제주도당→남로당 제주도 구국투쟁위원회→남로당 제주도 혁명투쟁위원회)는 4·3무장봉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무력전과 심리전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무력전은 군사부가 담당하였고, 심리전은 선전부가 맡아서 수행하였다(고영철의 미발표 논문).

선전부의 역할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의 조직체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 및 편성체계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김봉현·김민주의 공편 ‘제주도인민들의 4 3무장투쟁사’(1963), 미군의 자료(1945년 6월 20일) 그리고 제주경찰서의 문서(1948년 2월 25일; 1948년 10월 24일)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이들 문헌을 통해 제주도당의 조직체계를 간략히 살펴보겠다.

① 『제주도인민들의 4 3무장투쟁사』

‘제주도인민들의 4 3무장투쟁사’에 소개된 <4·3 무장봉기> 전후시기에 편성된 제주도당의 조직체계와 도 당부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 <도 당부>책임= 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 <도당 군사부>책임= 김달삼(본명 이승진), 김대진, 이덕구 
△ 총무부= 이좌구, 김두봉 
△ 조직부= 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 농민부= 김완배 
△ 경리부= 현복유 
△ 선전부= 김은한, 김석환 
△ 보급부= 김귀한 
△ 정보부= 김대진 
△ 부인부= 고진희(89쪽)

제주도당의 조직체계를 보면, 도당은 도당 책임자 밑에 군사부를 비롯한 9개 부서를 두고, 각 분야별로 업무를 분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 총무부 △ 조직부 △ 선전부에는 두 사람 이상의 책임자를 두었다. 군사부 다음으로 이들 조직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부서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부서의 명칭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② 미군의 조사보고서: 일명 헝거(R. Hunger)의‘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

‘제주도 남로당’의 조직체계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문서로는 제24군단 정보참모부 상사 헝거(R. Hunger)가 작성한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가 있다(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2015, 183-185쪽). 이 문서는 제주 주둔 미군사령관 브라운(R. H. Brown) 대령의 명령에 따라 작성되어 1948년 6월 20일자로 보고되었다.

이 보고서에 제시된 정보의 대부분은 제주도 심문(審問)팀이 작성한 다양한 평가가 내려진 심문보고서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이외의 정보는 방첩대 제주지구대, 국립경찰 정보과, 경비대 제11연대, 그리고 현재 제주도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억류된 포로들이 갖고 있다가 발견된 서류와 유인물이다. 이 보고서는 제주도 남로당의 당과 군사조직 양쪽의 현재 상황과 조직, 지휘체계 등에 정보를 요약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보고서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남로당 조직’은 △전라남도위원회, △제주도위원회, △제주읍위원회, △면위원회, △마을위원회, △인민위원회로 구성돼 있다.

전라남도위원회는 제주도위원회에 지시를 내리는 상부기관이다. 제주도위원회는 면과 마을에 있는 하부위원회, 군사부의 인민해방군, 관련 모든 좌익단체에 지령을 내리는 상부기관이다.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는 위원장(김유환), 부위원장(조몽구), 간부부장(현두길)과 7개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간부 부장은 다음의 7개 부장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조직부장 김달삼, △선전부장 김용관, △농민부장 이종우, △청년부장 김광진, △여성부장 김금순, △재정부장 김광진. 

제주읍 위원회는 이 섬에 있는 11개의 다른 면 조직 형태와는 다르다. 이곳에는 2개의 독립된 위원회인 일반위원회와 특별위원회가 조직돼 활동하고 있다. 이 두 위원회 모두 제주도위원회를 통해 당의 모든 지령을 받으며, 그 기능은 다음과 같다.

△제주읍 위원회(일반위원회)는 읍내 당의 합법 활동에 대한 사법권을 갖는다. 이 위원회는 이 섬에 있는 다른 11개 면 위원회와 같은 기반에서 활동하고 구성이 같다. 조직원들은 위원장: 강규찬,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 총무부장: 고갑수, 간부부장: 강대석, 선전부장: 고칠종, 청년부장: 임태성. 

△제주읍 특별위원회는 제주읍에만 있는 당의 지하조직을 지휘한다. 이 위원회는 제주읍 위원회(일반위원회)와 같은 노선에 따라 조직되고 제주도위원회로부터 모든 명령을 받는다. 

임무는 군정청, 국립경찰, 경비대, 학교, 우익단체 같은 전략적 정보청취소에 프락치를 심는 일과 위에 언급된 조직 내에 소규모 비밀 ‘세포’를 증강해 당의 사업을 계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이런 비밀 세포들은 제주읍 특별위원회 위원장에게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 특별위원회는 남로당이 불법화하면, 이와 관련한 일상적인 비효율성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제주도위원회의 기능을 맡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측면에서 제주읍 특별위원회는 임무를 확대하는 한편 제주도 지하조직의 최고위원회가 될 것이다. 

제주읍 특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인물로 구성돼 있다. 
△위원장 김응환 △조직부장 강대석 △선전부장 이창수 △학생부장 한국섭 △재정부장 이창욱. △면위원회들은 제주도의 최고위원회와 같이 여러 부서로 조직돼 있다. 또 모든 하위 군사조직과 준군사조직처럼 구성돼 있으며 한 조직원이 담당한다.

△마을위원회는 한 조직원이 여러 부서의 임무를 겸한다. 그러나 심문팀 보고서는 마을위원회가 최소한 조직원 3명, 즉 위원장과 선전부장, 조직부로 구성된다고 밝히고 있다. △인민위원회는 최소한 한 마을에서 폭도들이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지명해 환호하는 방법으로 위원장을 선출한다. 이 사례에서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조직됐던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던 사람이 선출됐다. 이런 선거절차는 무장한 폭도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현재 제주도 민간인 수용소에 수감된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폭도들이 마을을 떠난 뒤 그들의 명령에 따라 선전 및 조직부장으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 남로당은 최고결정기구인인 제주도 위원회에서부터 제주읍 일반위원회와 제주읍 특별위원회 그리고 기층 조직인 면위원회와 마을위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위에 선전부를 두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 남로당이 게릴라전과 함께 심리전 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③ 제주경찰서 정보2과의 문서

제주4·3 당시 가장 다양한 정보채널을 통해 각종 정보를 수집 분석했던 제주 경찰서 정보과에서 작성한 구국투쟁위원회(남로당 제주도 도당)의 조직체계와 간부는 다음과 같다. 이 기록 문서를 보면, 1948년 2월 25일 조천면 선흘리에서 조몽구(反), 김달삼, 김완배, 고칠종, 김용관, 강규찬(反), 고학 외 7명 등이 모여 남로당 제주도당을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한 것으로 되어있다.(고재우, 32쪽: 고영중, 32쪽).

이 당시 꾸려진 구국투쟁위원회의 조직도를 보면 <표 1>과 같다. 구국투쟁원회는 결정기관(김용관·김달삼·강규찬)과 상임위원회(강구찬·김용관·김달삼·김양근·김완배·고칠종·고영수)를 최고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 중앙파견 Org(이두옥)· 전남파견Org (조창구) 강창욱을 두고, 그 밑에 위원장 강규찬(註: 보좌역 비서 박태전과 경비대장)·부위원장(김용관)을 두고 있고, 그 아래의 산하조직으로 △군사부(김달삼) △총무부(이좌구) △부녀부(김양근) △농민부(김완배) △청년부(고영수) △선전부 (고칠종) △조직부 (김양근) 7개 부서를 두었다. 구국 투쟁위원회의 △군사부(김달삼)는 부연대장(김희탁)·경리과(김보규)·정보과(양경운)·병기과(김대진)·통신과(?)·의무과(김만례) 등으로 편성되었고, 군사부의 산하에 5·10지대(김종수) <조천 구좌 성산 표선 남원> 2·7지대(한국섭)(제주·서귀·본부 수비>, 4·3지대(고성욱) <애월·한림·대정·중문·안덕>등 3개의 행동대를 두었다. 각 지대는 정치부원 1명과  50-60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총무부(이좌구)는 보급과(이귀환), 재정과(이순우)로 업무가 분담되었고, △부녀부(김양근)에는 여성동맹(이재옥)·조직부(김정선)·선전부(김진현)를, △농민부(김완배)에는 농민위원회(백창원)·조직부(양지홍)·선전부(이재만)를, △청년부(고영수)에는 도민애청(강열)·조직부(김을생)·선전부(김영추)를, △선전부 (고칠종)에는 출판과(김규석)·선전선동과(김석환)를 두었다. 그리고 △조직부 (김양근)에는 연락부(문창현)·비서과(이경훈)·지도과(최성돈)·특별부○○과(양경운)를 두었고, 특별부○○과는 직장(양문필)·도(이정석)·경찰(이기도)·군대(문중위) 등으로 편성되어 특별업무를 담당하였다. 

이 조직표에 따르면, 남로당 제주도당은 출판과 선전선동활동 등을 총괄적으로 전담하는 선전부 이외에 부녀부·농민부·청년부 그리고 면단위에까지 별도의 선전부를 두었다. 이것은 각 부서와 지역별로 현지 사정과 필요에 따라 각종 선전 활동을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948년 10월 말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제주경찰서의 또 하나의 문서에 따르면, 남로당 제주도당 구국투쟁위원회는 1948년 8월 위원장 강규찬과 군사부장 김달삼이 월북함에 따라, 1948년 10월 24일 제주읍 월평리에서 회합하여 남로당 제주도 구국투쟁위원회를 혁명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위원장에 김용관, 군사령관에 이덕구를 선임하고 9연대 탈주병들을 기용하여 조직을 다시 개편하였다(고재우, 1998, 38쪽; 김영중, 2011, 33쪽).

새로 개편된 조직체계를 보면, △부녀부△농민부 △청년부 등은 사라지고 그 대신 인사과와 군사부의 전투력을 보강하기 위한 제주읍 특별지구대가 새로 신설되었다. 3개 부서에 두었던 선전부는 사라졌지만, 조직부의 출판과와 선전선동과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 2월에 개편된 조직체계와 비교해 선전부 규모가 줄어든 것은 토벌대의 공격으로 각 면단위 마을에 남아 있던 선전부원들의 희생이 많아지고, 이를 보충할 인력이 제때에 충원되지 않은 관계로 여러 곳에 선전부를 별도로 둘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4.3 민중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군사부를 비롯한 여러 부서 외에 선전부 등을 두고 무력전과 함께 심리전 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9개의 부서 중에 군사부가 전투를 담당했다면, 선전부는 집회, 데모, 삐라, 포스터, 벽보 부착, 신문발행 등의 활동을 통해 심리전을 주도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2) 선전부의 역할과 활동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남로당 제주도당은 그 산하에 무력전을 전담하는 유격대와 별도로 심리전을 담당하는 선전부를 두었고, 선전부는 출판과와 선전선동과로 구성되었다. 선전부를 기층 조직인 면과 마을단위에까지 두었다. 이들이 어떤 업무를 전담하고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들의 업무 분장표와 활동 내역 등이 문서로 남아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항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전부가 어떤 활동 등을 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나마 알아보기 위해 4·3당시 체험자들의 이야기와 이와 관련된 신문보도 내용을 추적해 보고자한다. 우선 4·3당시 제주도당 선전부에서 활동했던 몇몇 증인들의 경험부터 들어 보겠다. 

①  조천중학원 1회(당시 1963년 3월 19살에 입학)(48-50쪽)

△중학원에 다니실 때 직접 경험했던 일을 말씀 좀 해주십시오?
당시 중학원에 세포가 있어 그러믄 도당에서 명령이 내려오주. “언제. 어디에 무슨 삐라를 붙이라, 시위를 허라” 허는 명령이 내려오매(오거든). 우리한테도 그 세포를 통허연 명령이 떨어지는 디 안 헐 수가 없주게. 만약에 명령에 안 따르믄 “비판이여 뭐여 해야 되니까, 삐라를 만들어. ”미군정 물러가라 이승만 물러가라” 책 몇권 소비해 가멍 책장에 먹으로 삐라를 쓰주.

△산에 올라가고 난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산에 가니까, 난 선전부에 배치 된거라. 등사기로 삐라도 만들고…… 당시는 나같이 쫓기던 학생들이 많이 올라간 있었주. 간부들에게 교육도 많이 받았는데, 이름도 몰라 그 사람덜이야 다 가명을 쓰고 했어.

우리는 주로 삐라만 작성하고, 만들고 했는디, 하루는 밤에 선전활동을 나가게 된거라. 나는 조천에는 못 가고, 신촌이나 함덕, 북촌 쪽으로 갔주. 마이크를 들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의 000자식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뭐 이런 식으로 선전을 하면 다니는 거라.  그러고 나면, 뒷날 그 동네는 난리가 나지, 그 사람덜(우리들) 잡아들이지 않았젠, 경찰에서 나와서는 다 밟아버리는 거주게. <이하 생략>

△그러면 그런 선전활동을 하고 다닐 때 … 동네사람들은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습니까? 

어떻게 신고를 허여! 모두 다 자기네 아들, 딸인디, 그때야 경찰이 잡으러 오면, 어디 가서 숨으라고 오히려 숨겨주었지.

△ 토벌대가 올라올 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는 선전부에 있었으니, 토벌대가 산에 올라올 때에는 우리는 제일 앞에 도망갔지, 다음에는 당, 총무부, 다음에는 군인들…… 이런 식으로 도망 다니는 데 피난민들은 군인들하고 뒤섞여서 도망갔지. 

백록담에도 두 번이나 올라갔어. 선전부가 제일 안전지대로 가야 된다고, 등사기, 무전기들을 짊어지고 제일 멀리 도망치는 거라. 재미있는 건, 경찰토벌대가 올라오믄 거꾸로 아래로 내려간 숨고, 군인 토벌대가 오믄 산으로 도망가는 거라. <생략> (제주 4·3연구소, 1989, 48-50쪽)

② 조천중학원 2학년(53-54쪽)

△산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삐라사건 후 신촌에 숨어 있으나 연락이 왔어 선흘에 가난, 도 선전부에 배속됐다고 허데, 그 다음부터는 다른 2-3명과 같이 등사 삐라작성 그리고 배포도 허고 … 난 등사를 담당헌거라.

거기서 좀 있단 북촌으로 다시 내려갔어. 한 15일 가두 선전허고 다니다가 다시 선흘로 와서 좀 있었을거라.  도당이 용강으로 옮긴다고 허데. 사태가 터지게 되난 자주 옮기는 거라. 1948년 겨울쯤에 명도암으로 옮겼다가 토벌이 심해가난 어승생으로 또 옯겼지. 어승생에서 두 달쯤 산 것 닮아. 겨울 내내 구상낭(구상나무)밭에 같이 비행기 못볼 디에, 나무를 깔고 천막을 지고 허연 살았어. 누더기에, 모자 만들어 쓰곡 했주. <이하 생략> (제주 4·3연구소, 1989, 53-54쪽)

③ 강 아무개의 증언(인터뷰 당시 70세, 조천면 조천리, 입산시절의 가명은 강신일)

조천중학원생이던 강씨는 삐라를 붙이다 토벌대에게 쫓기게 되자, 1948년 11월께 입산해 선전부에 배치됐다. 강씨는 1949년 3월께 헌병대에 붙잡혔지만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라 방위군에 편성됨으로써 목숨을 구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도당 사령부는 어승생 오름 서쪽 밀림지대에 있었습니다. 도당 산하에는 선전·조직·총무· 군사부가 있었지요. 당책과 각 읍· 면책 등 소위 ‘캡’들의 모임 때 습격 일시와 장소 등이 결정됐습니다.

난 선전부 소속돼 ‘샛별’이란 신문을 주간마다 발간했습니다. 16절지 크기(註; A4보다 약간 작다)의 마분지 2장 분량이었는데 약 5백부를 등사했습니다. 주로 ‘노랑개 ○○ 명 섬멸, 검은개 ○○명 사살’ 등  전과를  적었고, 중산간 대학살을 알리면서 봉기를 선동하는 문구로 썼습니다. 그런데 당시 무장대 병력은 미미했습니다. 또 도당 비밀 아지트가 발각되는 바람에 여러 번 쫓겨 다녔습니다. 무장은 군사부만 갖고 있었습니다. 군사부는 모두 4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제1지대(조천면 관할)는  이덕구(신촌리 출신), 제2지대(구좌면)는 김대진, 제3지대(남원면)는 김의봉(와흘리 출신) 제4지대(대정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 아무개가 각각 맡았습니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423-424쪽).

④ 애월면 어음리 김모(당시 18세)씨의 증언

<제주4·3연구소>에서 1989년 8월에 발행한 ‘이제야 말햄수다’ 2권에 등장하는 한 증인은 자기 동네 사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해방 후에 여기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까? 
김 모) 그때만큼만 해도 사람들이 깨질 못하니까, 인민위원회가 공산진영에서 하는 것인지, 민주진영에서 하는 건지 몰라도 구성되긴 돼나서. 거기 구성된 인원들은 부락민 전체나 다름없어주게(없었지).

하여튼 좌익운동으로 논 사람은 엄쟁이 사람이여. 백창원이라고. 또 좌익으로 활동했던 사람 중에 이재만씨가 있주게. “기무라, 기무라”행 유도도 잘 허고, 애월국민학교 시절에 선생인디, 그 사람은 결국 산으로 올라가서 <인민일보>라는 거, 그때는 활판소가  없으난 ‘가리방’으로 긁엉 신문을 거기서 만들언 부락에 뿌리곡 뿥이곡, 허더구먼. 그 사람이 그걸 맡아서 해났댄 헌 말이 있었어. 하여튼 우두머리랐주. 그리고 어도에 가민 강창하, 양군보가 있주(제주4·3연구소, 1989, 173쪽).
   
다음은 중앙신문에 보도된 기사내용들이다.

① 자유신문 1949년 4월 19일자 기사내용

동란의 제주를 찾아/ 불안정한 도민 생활 / 물심양면의 구제가 긴급
<…전략…>
체포된 폭도한테 다음과 같은 산 생활 상태를 들었다.“현재 총지휘자는 이덕구(李德九․37· 도당 부위원장)이며 무장폭도는 약 150명, 비무장폭도는 800명 정도이다.……무전기· 라디오 등도 있었는데 밧데리가 없어 못 쓰고 있다. 그러므로 작년 말까지 도외지와 연락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연 두절되었다 한다. 

그리고 산에서는(註: 확인불가)이라는 4면지 일간신문과<인민통신>이라는 수시 발행의 간행물이 있다. 또 수첩을 보았는데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작은 글씨로 치밀하게 비밀공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활동동태의 그래프까지 기입되어 있다(자유신문 1949년 4월 19일).

② 조선중앙일보 1948년 5월 6일자 기사내용

편의대(便衣隊) 활약으로 곤란 / 제주도에서 김 공보실장 귀환담.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씨는 ……폭도들의 연락 같은 것은 전화를 이용하는 경찰 측보다도 빠르고, 상당한 지도급의 인물 1-2인이 체포되었으나 일체 함구하여 말하지 않는 것과 신문 <혈화(血火)>, <정보(情報)> 등이 무수히 배포되고 있는 것 등을 보면 상당한 훈련을 받은 것 같다고 하며 폭도들과 국방경비대와 대전하고 있는 중간부락민들은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있다고 한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5월 6일).

③ 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30일자 기사내용

동란의 제주현지답사(2) / 산사람 요구는 경찰의 무장해제 / 김봉호 경찰청장과 일문일답). 일행은 다시 제주도 경찰청장 김봉호(金鳳昊)씨를 찾아 본도 난(亂)에 관하여 일문일답하였다.

(문) 금번 사건의 발생원인은 무엇인가?
(답) 대요(大要)해서 세 가지 있다고 본다. (1) 과거 경찰관의 도민에 대한 비행 (2) 관공리의 악질배 도량(跳粱) (3) 모당(某黨) 모략에 주민이 선동되고 있는 것.
(문) 산사람들측의 요구조건은 무엇인가?
(답) 그들이 산에서 「혈서(血書)」라는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데 그 신문을 통해 보면 요구조건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본다. 
(1) 경찰관의 무장해제 (2) 단정반대의 자유 허여(許與) (3) 일체 사설단체의 즉시 해산 (4) 제주도내에 모든 행정관리의 기용은 풍속과 관습을 이해하는 본 도민으로 하라는 것 등이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30일). 

이상의 증언과 신문의 보도내용을 종합할 때, 남로당 제주도당의 선전부에서는 주로 학생 조직원들을 동원해 각종 삐라를 수시로 간행해서 뿌리고, 담벼락과 전봇대 그리고 큰 바위에다 부착하고, 거리 선전전을 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기록자들이 받아 적은 표면적인 정보로 보면 선전부에서‘샛별’, (註: 확인불가)이라는 4개면 일간신문과 <인민통신>, <인민일보>, <혈화(血火)>, <정보(情報)>, <혈서(血書)> 등과 같이 다양한 이름의 신문을 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제호들 가운데 <인민통신>, <인민일보>, <혈화>, <혈서> 등과 같이 비슷한 이름이 두 개씩 있는 것은 정보전달과정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여러 곳(또는 부서)에서 신문처럼 비슷한 제호를 붙여서 삐라와 같은 유인물을 발행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한다. 

이들 신문은 오늘날 일간지들처럼 블링킷(Blenket)판이나 그 절반 크기인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된 것이 아니고, 당시 등사기의 크기를 고려해보면, 16절지 크기나 대학노트 크기로 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내에는 이들 신문 중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때문에 신문의 크기와 무슨 내용을 주로 보도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한 증인에 의하면, 신문의 내용은 대부분 무장대의 전과와 토벌대의 잔인무도한 학살행위를 알리고 유격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에서 이와 같은 신문을 발행하게 된 배경을 김봉현은 ‘제주도 피의 역사’에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 좌절은 지배자와 미국에게 정치적인 대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미국은 남한을 아시아 침략의 천초기지로 구축하기 위해서도 또 이제 막 출범한 이승만 정권을 육성시키기 위해서도 하루 속히 민중항쟁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면에 이를 예견한 무장대는 장기전의 태세를 갖추고 전조직력을 동원하여 식량이나 무기류를 비롯한 모든 전투물자를 비축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시시각각 다가오는 토벌에 대비하였다. 도당위원회도 조직을 보위하기 위해 제1선에서 제2선으로 이동시켜 조직을 견고히 하는 한편 <혈화>, <인민통신> 등의 기관지를 발간하여 민중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기 시작하였다”라고 서술하였다(김봉현, 1978, 169쪽).

이 내용에 의하면,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삐라 등과 같은 선전선동용 유인물 이외에 인민들의 교육용으로 기관지를 발간하기 시작은 아마도 <5·10선거 반대투쟁>의 승리이후 부터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제주도당 선전부가 보유했던 주요 인쇄 장비는 등사기와 기라방 등이었다. 인쇄기를 갖추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신빙성이 매우 낮아 보인다. 4·3 체험자들의 증언가운데 속에 삐리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가리방 등사기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49년 3월 4일 김녕초등학교 교사이던 강중빈(康仲斌, 37세) 이응우(李應雨, 25)는 학교 등사판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끌려가 처형됐다(4·3은 말한다 ⑤, 36쪽).

△구좌 중앙국민학교에서 차량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이 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던 김기○였다. …밤이면 자취집 지붕위에 올라 마을의 약도를 그려 공산도배들에게 제공했고, 숙직날에는 남몰래 불온 책자를 등사기로 제작 배포하였다. 그 후 그 사실들이 발각되어 동료교사의 죽창에 의해 월정리 선창가에서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박서동, 1990, 173쪽).

△결국 좌익세력에 의해 교장선생님이 쫓겨난 셈이 되었다. 그 후부터 좌익계 불온 문서들은 학교 등사판에 의해 자유로이 제작되었고, 그 등사판은 산으로 이송되어 공비들의 선전도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박서동, 1990, 219쪽)

△이런 회오리에 동생이 죽자 김문경은 사건 후 7일간 조수국민학교에 조사본부를 두고 유지와 청년들을 조사한 후 1948년 10월 21일 정오에는 학교 싸이렌을 울려 온 마을 사람을 학교 마당에 집합시켰다. 이 자리에서 등사판을 빌려줬거나, 연루된 혐의가 있는 조수교 교사 양공옥, 김창심, 이성률, 조철남, 조용길, 급사 조종수, 일반인 조기완 등이 총살되었다(오성찬, 1988, 48쪽).

△홍 아무개 씨는 당시 성산읍 동남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이 학교에서 밤중에 등사판을 잃어버린 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받고 잡혀가 고문을 당하다, 사살 직전에 구출된 바 있다.

등사판을 도난당한 것은 특별 중대가 주둔해 있던 그 해 음력 11월말께, 밤중의 일이었다. 당시 게릴라들은 삐라 제작을 위해 등사판을 절취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당시 이 학교의 교사는 12명이었는데,  교장과 홍씨를  포함한 교사 5명, 이웃 학교인 성산국교의 교사 2명 등 모두 8명이 연행되어 고문을 당했다(오성찬, 1988, 93쪽).

3. 김호진과 이덕구 명의의 삐라 인쇄 사건과 관련된 기록들 

1) 국외 문헌의 내용들

여기서는 국외에서 출판된 각종 문헌 등에 수록된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들을 연대기 순으로 먼저 살펴보겠다.

제주신보 김호진 주필(편집국장) 등이 인민유격대 총책임자 이덕구 명의의 이승만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과 모든 토벌군과 통치기관에게 보내는 호소문(이하 문건 또는 삐라로 표현)를 인쇄해 준 혐의로 처형당했다는 일화를 맨 처음 문자화시켜 세상에 알린 것은 김봉현·김민주의 공펀『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1963)이다. 

김봉현과 김민주는 이 책자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64-172쪽).
 
그들의 졸당인 <김달삼-강규찬>은 아무런 승산도 없는 지시를 받아가면서 적아(敵我)간의 힘 관계, 입지적인 조건, 무력투쟁의 준비 체제, 사후 처리에 대한 대책도 고려함이 없이 …<중략>… 다만 <북반부로부터 원호를 구한다>는 잡소리를 대중들 사이에 유포시키면서 마치 승리자인 듯이 월북한 극좌 모험주의자의 뒤를 이어 받은 것은 <김용관 – 이덕구>이였다. …<생략>… 그리하여 <국방군 14연대>의 반란이 일어나자 곧 지휘부는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정세 판단 아래에 전투대오(戰鬪隊伍)를 일층 기동성 있고, 강의성 있는‘전투대’로 진출케 하기 위하여 종래 연대(聯隊)조직이었던 것을 부대로 축소 재편성(10. 23)하고 전투태세를 조직 강화하였다. … <중략> …
 
이에 따라 濟州島 人民遊擊隊는 총책임자 이덕구 명의로써 동년(1948년) 10월 24일 괴뢰정부에 대한‘선전포고문(宣戰布告文)’과 일체의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호소문’을 광포하였다.

이들의 문건은 당시 제주신문(註: 당시 명칭은 제주신보임)의 주필이었던 <김호진>을 비롯한 3명이 내일 없는 목숨을 내걸고 인쇄하였다. 이것은 미제(美帝)와 이승만(李承晩)역도들에 대한 전체 도민들의 가슴에 쌓이고 또 쌓인 적년(積年)의 울분과 원한이 하나로 집중된 화산과 같은 기세가 놈들의 권토중래(捲土重來)에 대한 은인자중(隱忍自重)의 폭발인 것이었다. 즉, 무권리와 인간 생지옥에서 헤어나서 삶의 광명을 찾으려는 30만 도민의 절실한 의사와 열망의 집중표현이었다. ‘국방군과 경찰원들에게’의 ‘호소문’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장병과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뿌리란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마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 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濟州島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에서 쫓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악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뿌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를 지켜주는 빨찌산들과 함께 싸우라 !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는 자리를 차지하라(註: 글자 수, 띄어쓰기 포함 396자).

이와 같이 인민 유격대는 당당히 <선전 포고문>과 <호소문>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8·15>, <8·25>, <9·9> 투쟁을 총화 분석하면서, 10월 20일 국방군의 무장 폭동을 점화로 하여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일시에 재연된 유격전투(遊擊戰鬪)의 가열화는 적들의 꿈꾸었던 단기 토벌작전(討伐作戰)을 근저로부터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남조선 일대에서  버러진 빨치산들의 토벌계획과 내란도발(內亂挑發)준비에 광분하고 있던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김봉현·김민주, 1963, 164-166쪽). ……<중략>…… 또한 <선전 포고문>을 인쇄한 김호진 이하 7명은 유격대를 따라 입산하던 도중 동광양(東廣壤, 속칭 박성내)에서 살인귀들에게 체포되어 야만적인 테러를 받아 살해(10월 24일)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여 버렸기 때문에 나중에는 뼈만 남고 노두(路頭)에서 돌멩이와 함께 대굴대굴 구르고 있더라고 한다(김봉현 김민주, 1963, 171쪽).

김봉현(1978).‘濟州島血の歷史-<4·3> 武裝鬪爭の記錄.’. 일본대판: 도서관행회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1978년에 출간된 김봉현의 저서 ‘濟州島血の歷史-<4·3> 武裝鬪爭の記錄.’ 에서는 앞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완 서술하고 있다. 

여순 지방의 병사들의 폭동은 그 기세가 죽어가고 있던 제주도의 무장 세력에게 일대활력을 불어 넣었다. 게릴라 부대는 국면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 곧바로 공격태세를 취했다. 우선 조직을 재편하고 도당책임자에 김용관, 군사부 책임자에 이덕구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6·10 투쟁이후 장기 전략을 취하고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대하여 군경토벌대도 유래 없이 증강되었다. 새로운 9연대 외에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가 파견되어 왔다. 또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을 비롯한 이형석, 최치환이 이끄는 경찰전투부대가 투입되었던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당시 제주도 경찰국장은 홍순봉이었다.

한편 게릴라 부대의 군사부에서는 언제라도 토벌대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기동력을 지닌 전투대를 갖추기 위해 종래의 연대편성을 몇 개의 부대로 세분하고 ‘신속, 유연대응의 전략’을 확립하였다.

이와 같이 조직을 재편하고 전투태세를 확립하자, 1948년 10월 24일 제주도 인민유격대 대장 이덕구 명의로 이승만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토벌대와 도민에게 호소문을 보내어 제주도 민중의 단호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이들 문서는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金昊辰) 및 공무국장, 차장의 3인이 비밀리에 인쇄한 것으로, 그들은 그 후 그것이 발간되어 송요찬(宋堯讚)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 호소문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학정에 대한 30만 도민의 가슴에 쌓여진 분노가 응결된 것이며, 거기에는 공포에 전율하며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전도민의 절실한 요구와 원망(願望)이 담겨있다(김봉현, 1988, 200-201쪽; 노민영, 1988, 207쪽).

친애하는 국방군 장병과 경찰관 여러분!
총구를 보십시오. 그 총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그 총은 우리의 고혈을 쥐어짜낸 세금으로 산 것입니다.  영웅적인 항쟁에 떨쳐 일어선 여러분의 부모, 형제, 자매들에게 그 총구를 돌려서 안 됩니다.  소중한 총과 탄환을 동포를 향해 함부로 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와 여러분들을 지켜주어야 할 그 총을  싸우고 있는 인민들에게 돌려주십시오. 

모든 도민은 당신들을 마음으로부터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귀한 피를 보람 없이 흘리지 않도록! 
미국 침략자를 조국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도! 
매국노 이승만 도당을 타도하기 위해서도!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도! 
여러분들은 총구를 놈들에게 향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미국군과 앞잡이 권력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도민의 편에 서주십시오. 
우리나라, 우리가족, 우리부모, 우리형제를 지켜줄 항쟁의 전열에 함께 하십시오. 
친애하는 여러분!  
언제 어떠한 때에도 인민의 이익을 지키는 인민의 군대가 되어 주십시오!(註: 글자 수,  띄어쓰기 포함 543자).

여순 국방군의 반란의 보고에 기세를 올린 게릴라 부대는 도처에서 결렬한 공세를 취하고 군경토벌대를 긍지에 몰아넣었다. 48년 10월 어떤 전투대는 주민들의 강력한 지원 하에 안덕면 도순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5명을 단죄하고, 10명의 구금자를 석방시킴과 동시에 무기와 장비를 탈취한 후 관사를 불태워 버렸다(김봉현, 1988, 207∼208쪽).

John Merrill(1980). 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2, 
 
제주 4·3민중항쟁을 주제로 논문을 쓴 첫 번째 외국인은 존 메릴(John Merrill)이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1975)은 워싱턴 대학에서 발간하는 ‘한국학 저널’ 2호(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2, 1980.)에 ‘제주도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이 논문을 통해 서방세계에도 4ㆍ3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 논문에 실려 있는 이덕구 명의의 문건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발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순 반란은 제주도에서 진행되던 대게릴라 작전 수행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정부가 본토에서 늘어나는 게릴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함에 따라 그 만큼 반공태세가 강화되었다. 제주도 사태 역시 정부의 합법성에 도전하는 심각한 문제로 되어갔다. 

일단 여순 반란이 진압되자, 자연히 제주도 폭동이 그 다음의 관심사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제 정부는 제주도 내의 게릴라 토벌작전에 있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순 반란이 제주도에 미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게릴라들의 용기를 크게 고무하는 것이었다. 여수반란이 시작된 지 4일 후 제주도당 군사위원회의 한 위원인 이덕구는 정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발하였다. 이 성명은 남로당이 지하에서 발행하던 <제주통신>(the Cheju Press)에 게재된 바 있는데, 제주도에 있는 병사들에게 제14연대를 본받아 게릴라 활동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노민영, 1988, 58-59쪽; 아라리 연구원, 1988, 343-344쪽). 

경애하는 군인, 경찰관 여러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총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총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산 것입니다. 
그 총으로 여러분의 부모, 형제를 쏘지 마십시오. 그들을 보호하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총을 진정한 주인에게 돌려주십시오. 
제주도 인민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동포를 희생시키지 않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미제국주의자와 그 주구인 이승만에 대항해 싸웁시다.
여러분은 인민의 편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의 조국과 가정과 부모형제를 지키고 있는 우리 유격대와 함께 싸웁시다. 
여러분의 애국심과 명예에 호소합니다(김봉현, 1960, 166쪽; 아라리 연구원, 1988, 343-344쪽).

여순의 반란군들이 제주도의 게릴라를 보강하기 위해 곧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학생들이 시위를 하며 북조선의 깃발을 흔들어대자 제주도의 학교들은 휴교상태에 들어갔다(USAFIK, G-2Periodic Report, Dec.2, 1948; 노민영, 1988, 59쪽).

문국주(1981). ‘朝鮮社會主義運動史 事典’. 동경: 評論社.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의 내용을 맨 처음 문자화시켜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문국주(文國柱)라고 생각한다. 그는 1981년 일본 동경에서 간행된 자신의 저서‘조선사회주의운동사 사전’(1981, 동경: 평론사)에 실린 <제주도의 4·3 투쟁>이라는 소논문에서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과 관련된 사건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험악한 상황 하에서 남로당원(南勞黨員)들은 그해 (1948년) 8월 25일에 북조선에서 실시하게 된 조선최고인민회의(朝鮮最高人民會議) 의원선거의 임무를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남조선인민대표자인 대의원을 선출하는 지하 간접선거 결과, 안요겸(安堯儉, 별명 安世勳), 강규찬(姜圭讚), 김달삼(金達三, 본명 李承珍), 고진희(高珍姬) 등이 선출되어 북조선으로 갔다. 그 후 더욱 엄격해진 경비태세하의 제주시내 20수(數)개소의 직장세포가 건재하고 있어서, 인민유격대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布告文) 약 3,000매를 시내의 동서남북의 요소에 산포(散布)하였다.

잔인무도한  경찰관들이여!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개(犬)들이여! 
너희들은 무고(無辜)한 도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있다. 
하나님(天人)도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범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너희들의 극악비도(極惡非道)한 악사(惡事)를 동족이라고 해서 부끄럽지만 참고 견디어 왔지만, 은인자중(隱忍自重)도 이제는 한도에 달하였다. 
우리들은 인민의 원한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너희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가까운 시일내 권토중래(捲土重來)하기로 결정하였다.   
인민군사령관(人民軍司令官) 이덕구

이러한 포고문(布告文)의 인쇄에 대해 당내에서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우선 인민군이 실제로 적의 아성(牙城)을 공격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의문과 솔직히 말해 단지, 보이기 위한 허세(虛勢)의 삐라에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걱정과 제주시내에  인쇄소가 2개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쉽게 인쇄 장소가 탄로될 것과, 또한 건재하고 있는 당세포 조직의 파괴로 연결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민군이 전시 하의 명령이라고 해서 인쇄를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주신문>(註: 당시의 명칭은 제주신보 임)의 주필이었던 남로당원인 김호진(金昊震) 등이 죽음을 결의하고 포고문을 인쇄해서 그것을 각 세포에 배포하여 산포했던 것이다. 그 즉시 김호진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산 쪽으로 탈출하는 도중에 추격당하여 독자(一人息子)인 그는 노부모를 걱정할 틈도 없이 이 젊은 유능한 청년의 일생은 끝나고 말았다(고문승, 1991, 410∼ 412쪽). 

2) 국내 문헌의 기록들

앞에서는 국외에서 출판된 책자와 논문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문헌들을 대상으로 본 연구주제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강용삼・이경수 편저(1984). ‘大河實錄 濟州百年’. 서울: 태광인쇄사.

김호진 편집국장 등이 불온삐라를 인쇄해준 혐의로 처형당했다는 내용을 국내에서  맨 처음 언급한 책자는 강용삼과 이경수의 공저 ‘大河實錄 濟州百年’(서울: 태광인쇄사)이다. 이 책은 불온삐라와 김호진 편집국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 해(1948년) 10월 2일 송요찬(宋堯讚)휘하 증원군이 사태진압을 위해 증파되고 10월 8일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도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註: 계엄령선포일이 사실과 다르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신보는 김호진(金昊辰) 편집국장을 비롯하여 공무국장, 공무국 차장 등 간부 3명이 계엄군에 의해 처형되는 끔직한 사건을 치렀다.  

재산공비의 불온삐라를 신문사 공무국에서 인쇄하다 계엄당국에 적발됐던 것이다. 언론기관에까지 좌익 프락치가 침투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신보는 창간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강용삼・이경수, 1984, 999쪽).
 
(2) 제주 4·3연구소(1989. 8).‘이제사 말햄수다’2권. 서울: 한올

제주신보사에서 삐라를 인쇄해준 사람의 실명(實名)과 성씨를 맨 처음 구체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제주 4·3연구소에서 1989년 8월에 간행한 ‘이제사 말햄수다’ 제2권이다. 이 책의 인명색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공○○(공성수씨의 동생)(278쪽)
  - 북교 30회
  - 48년 제주신보 조판공장장 
  - 48년 제주신보 프락치 양경운의 부탁으로 삐라를 인쇄해 주었다가 들통 남
△ 양경운(285쪽)
  - 1948년 제주신보 영업국 사원, 제주신보 프락치
  - 공성수씨의 동생(조판공장장)에게 부탁하여 삐라를 인쇄하여 나가다 들킴
 
이 책에 서술된 제주신보사 직원과 삐라인쇄 사건과 관련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이 내용에 따르면, 제주신보의 프락치 양경운(영업국 직원)이 조판공장장 공○○(공성수씨의 동생)에게 부탁하여 삐라를 인쇄해 나가다가 들통 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인쇄해 주었다는 삐라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쇄해준 날이 언제인지,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특히 이 책자에는 인민군사령관 이덕구(또는 이덕구), 선전포고문이나 호소문 그리고 김호진 편집국장 등등의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내용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 또는 도용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3) 고창훈(1989). 4ㆍ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최장집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4)’ (245-340쪽). 서울: 한길사.
 
고창훈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제4권에 발표한‘4ㆍ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이라는 논문에서 이덕구 명의 선전포고문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전략>. 한편 10월 19일 제주도 진압을 거부한 여수의 제14연대가 군인봉기를 일으켰고,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10월 24일 정부에 선전포고 고창훈도 “제주도 인민유격대가 10월 24일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였다”라고 주장하면서, 존 메릴처럼‘호소문’을 소개하고 있다. 이 호소문은 김봉현 등이 적시한 호소문과 동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를 하였다(제1출처 김봉현·김민주 편, 1963, 166쪽). … <선전포고문 중략>… 위에서 보듯이 미군정과 단독정부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좌익세력을 척결하기 위하여 제주도의 끈질긴 항쟁을 전면적으로 진압하는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북조선 지지의 봉화불을 올린 제주도 민중과 무장대의 투쟁은 그들의 전면적인 대토벌에 직면했다(295∼296쪽).

(4) 제주신문사(1995). ‘濟州新聞50年史’.

‘제주신문 50년사’(1995)는 김호진(金昊辰) 편집국장의 처형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48년 4월 3일에는 <4·3사건>이 발생하였다.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익세력이 파출소 등 관공서와 우익단체 사무실을 습격, 방화하는가 하면 우익인사·경찰관·관공리에게 테러를 가하고, 다시 그에 대한 보복테러를 감행되는 등 제주 전역의 치안이 온통 마비되었다. 그 와중에 신문사를 비롯한 도내 인쇄시설은 문이 닫히고, 따라서 제주신보도 20여일간 휴간하였다. 이 사건 이후 좌·우 대립이 심회되면서 제주신보에는 양쪽으로부터 비난·협박이 가해졌다.

이 해 8월에는 당시 제주신보의 제2대 편집국장이던 김호진이 산사람 쪽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인쇄해주었다는 혐의를 받아 군부에 의하여 처형당하고, 공무국 간부 孫모와 梁모 등도 처형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제주신문사, 1995, 295쪽).

(5) 제민일보 4·3 취재반(1997. 3). ‘4·3은 말한다’(4). 서울: 전예원

1997년에 출판된 ‘4·3은 말한다’ 제4권의 68페이지에는 “무장대, 선전포고문 발표”라는 중간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순사건은 제주도 사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장대 쪽에서 보면, 진압군으로 출동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이 이에 반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무장대는 총지휘자 이덕구(李德九)의 명의로 1948년 10월 24일 정부에 선전포고를 했고, 토벌대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장병과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마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 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濟州島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에서 쫓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악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뿌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를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출처: 김봉현· 김민주, 1963, 166쪽)
 …<중략>…
1948년 10월경 제주읍내 유지들과 함께 언론인들도 줄줄이 농업학교로 끌려 들어갔다. 맨 먼저 경향신문 제주지사장인 현인하(玄仁廈)가 잡혀갔다. 일본서 대학을 나온 현인하는 학병출신으로 해방 후엔 경찰에도 잠시 몸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강순현의 증언) ……뒤이어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인 이상희(李尙熹)가 끌려가 희생됐다. 제주읍내의 유명한 모자점인 갑자옥 사장이기도 한 이상희는 무장대 총책이었던 김달삼과 친척간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던 터였다(강순현의 증언).

이처럼 유지들 대부분이 농업학교(9연대 본부)에 수감돼 긴장이 고조되던 때에 토벌당국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 삐라가 읍내 곳곳에 뿌려진 것이었다(출처: 김봉현·김민주, 1963, 164-171.).

당국의 수사결과 삐라는 제주신보사에서 이 신문 편집국장이던 김호진(당시 28세)에 의해 인쇄된 것으로 밝혀졌다(강순현ㆍ최두길의 증언).

당국의 수사결과, 삐라는 제주신보사에서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이자 주필이던 김호진(金昊辰, 당시 28세)에 의해 인쇄된 것으로 밝혀졌다(출처: 姜淳現·崔吉斗의 증언). 개인적인 인쇄물을 부탁하러 신문사에 갔다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는 한 증언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註: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인적인 인쇄물을 신문사에서 인쇄를 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오전 11시경 칠성로 제주신보사 윤전실로 갔더니 김호진 편집국장과 직원 몇 명이 무언가를 열심히 인쇄하고 있었습니다. 두 종류인데 하나는‘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또 하나는 ‘혁명군사령관 이덕구’의 명의로 된 삐라였습니다. 난 깜짝 놀라 “자네 목숨이 몇 개라도 되나?”하고 만류했지만, 김호진은 “산군들의 부탁이야”라며 대담하게 인쇄를 계속 했습니다. 신문사 윤전실은 서북청년단 사무실과도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입니다(姜淳現의 증언).

  김호진은 삐라 인쇄 후 신변이 노출된 기미가 보이자 입산을 시도하다가 잡혀 농업학교로 끌려왔다. 서귀포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김호진은 본래 <白鹿日報 > 창간멤버였으나, 백록일보와 제주신보가 통합됨에 따라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재직중이었다(姜淳現의 증언).

김호진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한 증언자(최두길; 崔吉斗)는 이렇게 말했다(170-171쪽). 내가 탁성록 대위에게 끌려온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김호진이 같은 천막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나보다 2살 아래였지만 서로 문학을 하는 데다 사람됨이 좋아서 매우 친밀한 사이였지요. 그는 수재로서 시를 즐겨 쓰는 문학청년이었습니다. 키가 작고 눈이 아주 나빴지요. 처음 농업학교에 끌려 왔을 때 어디선가 심하게 구타를 당했는지 행색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안경이 없으면 봉사나 다름없던 사람인데 안경테도 없이 안경알 한 개를 겨우 실로 묶어 매달고 있었습니다. 잡혀온 경위를 물으니 “‘선전포고문’을 인쇄한 후 입산하다가 관음사 부근에서 포위망에 걸려 잡혔다”라고 말하더군요(제1출처: 최두길의 증언 제2출처: 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71쪽)

농업학교 수감자 중에서도 김호진은 가장 심한 고문을 받았다. 강순현(姜淳現)씨는 “거구의 송요찬 연대장이 왜소한 김호진을 구둣발로 마구 차니까 김호진은 곧 초주검이 됐다”고 말했다. 이 책의 164쪽에 따르면 강순현은 1948년 11월 초순경에 농업학교 수용소로 끌려갔다.

곧이어 제주신보사 박경훈사장과 신두방 전무가 끌려 들어왔다. 박사장과 신전무는 곤욕을 치르기 했지만 삐라 제작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져 무사했다(註: 이 주장의 출처를 알 수 없음).

그러나 김호진은 곧 즉결처분됐다. 최길두씨는“김호진이 천막에 들어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에 보초가 들어와‘김호진 석방’하고 불러내더니 끌고가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김호진의 사망일자는 정확치 않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10월 말경으로 추정된다. 같은 천막에 갇혀있던 임재현(任才贊·88세. 당시 제주도 수산과장)는 김호진이 이관석 제주중교장과 같이 10월 31일 함께 끌려가 처형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김호진의 뒤를 이어 제주신보의 편집국장이 된 김용수씨는 현인하 경향신문 지사장도 이관석 교장이 희생될 때 함께 처형된 것으로 기억했다(김용수의 증언).

(6) 진성범(1997. 6월). 제주반세기: 다큐멘터리 그때 그 사건, 제민일보사, (69-71쪽).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신보 김호진(金昊辰) 편집국장과 공무국장, 공무국 차장 등 간부 3명이 군당국에 전격 구속당했다. 유격대의 선전삐라를 인쇄했다는 혐의였다. <……> 불온삐라 인쇄사건에 연루돼 군 당국에 구속된 이들 신문사 간부들은 그로부터 제주시 남문로 옛 KBS제주방송국에 자리한 합동수사본부에서 연일조사를 받았다. 당시 시중에 나돌았던 불온삐라는 당국의 감정결과 윤전기에서 인쇄된 것으로 판명됐다. 이에 군 당국은 “윤전기가 설치된 곳은 제주신보 밖에 없다”며 이들을 지목한 것이었다.

군수사당국은 이들을 군 막사에 가둬놓은 채 <재산(在山)무장대>와의 관련 여부 등을 캐는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이 같은 군 당국의 수사는 급기야 제주신보 기자들에게까지 확대돼 제주신보는 마치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쑥밭이 됐다. 자연히 신문발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진성범, 1997, 70쪽)

이즈음 제주신보의 창간멤버의 일원이었던 박광훈(朴光勳)이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조천포구에서 검거돼 김호진 국장과 함께 수사를 받게 된다. …군 당국은 1개월 이상 계속된 장기수사에서 이렇다 할 혐의를 찾아내지 못하자 朴을 “좌익 활동을 하다 밀항하려던 자”로 결론짓고 그를 처형키로 했다. 이에 따라 박은 좌익 밀항 범으로 몰려 한 달 반 만에 천막에서 나와 처형장인 사라봉으로 호송케 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극적으로 김국장을 조우하게 됐다.

천막 앞에서 박은 김국장과 함께 수갑을 차고 포송 줄로 묶인 채 사라봉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도중 김 국장은 군수사관에게 <나는 아무 죄도 없다. 살려달라. 정말 억울하다>며 <살려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애원했다.

그러자 군 수사관은 <정말 사실대로 다 불테냐> 며 오르던 발길을 돌려 다시 합동수사본부로 이들을 끌고와 재수사에 들어갔다. 그 후 朴은 1948년 11월 17일 법적 토대없이 선포된 군계엄령하에서 군재판에 회부됐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훗날 박광훈씨는 <그로부터 더 이상 김 국장을 볼 수 없었는데, 나중에야 김국장이 제주신보 공무국 차장과 함께 밤중에 재산공비 최고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신문사에서 인쇄했다>는 혐의로 억울하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술회했다(진성범, 1997, 69-71쪽).

(7) 이문교(1997. 11월). <제주언론사>. 서울: 나남출판.

1947년초(註: 1946년을 잘못 표기 한 것 같음) 백록일보를 흡수 통합할 때, 이 신문의 제작진으로 활동하다(제주신보에) 입사한 기자로는 김호진金昊辰·조수인趙壽仁·정기준鄭基俊·고봉효高奉孝 등이 있다. 이들은 제주신보내의 좌경세력으로 맞서다가 역부족으로 물러났다. 

그 중 김호진은 1948년 봄 제2대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여 편집을 주도하다가 그 해 8월 좌익 무장대 최고 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신문사에서 인쇄해 준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계엄령하의 군정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쇄를 담당했던 공장장 孔모와 梁모도 함께 처형되었다(출처: 제주신문사, 295쪽).

(8) 돌아본 제주 20세기<39> (제주일보, 1999년 11월 3일, 6면)

<기획 시리즈 4·3 (3)>는 삐라인쇄와 김호진 편집국장이 처형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4·3을 진압하기 위한 군과 경찰의 토벌이 강화되고 있던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대정부 선전포고문과 군과 경찰에 보내는 호소문이 제주읍내 곳곳에 뿌려졌다.

군과 경찰은 빨치산에 의해 삐라가 작성돼 살포된 것으로 보고 제주읍내 인쇄소를 상대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조사결과 제주신보에서 제작됐으며 편집국장이던 김호진(金昊辰 당시 29세 안팎)과 조판공장장인 공(孔)모, 영업국 직원이던 양경운에 의해 인쇄됐다는 혐의를 포착했다.

김호진 편집국장이 빨치산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공장장과 문선공 몇몇이서 10월 24일 오전 제주신보에서 인민군사령관과 혁명군 사령관 명의로 된 두 종류의 삐라를 인쇄했다는 것이었다. 

군과 경찰의 수배에 쫓긴 김호진 국장 일행은 한라산으로 들어가려다가 관음사 근처에서 매복중인 군경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뒤 며칠 지나 지나지 않아 실종됐다. 

그런데 그에 대한 혐의내용만 알려졌고(註: 사법당국에 문의 결과, 조사주체와 조사내용은 존재하지 않음) 정식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될 뿐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총살형이 집행됐는지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의문에 쌓여있다. 다만 그가 처형(또는 실종)되기 직전에 극적으로 잠시 얼굴을 스친 친구인 최두길(崔吉豆·당시 31세)이 살아남아 당시 처참한 상황을 전해줄 뿐이다. <…중략…> 그러던 10월 말의 어느 날 대낮, 조그마한 체구의 한 남자가 그 같은 정적을 깨며 군화 발에 차이는 처참한 모습으로 농업학교 임시 수용소의 천막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맨발에다 여기저기 살점이 터져 유혈이 낭자했고 쓰고 있던 두꺼운 안경은 깨져 안경알 하나를 경우 실에 얽어 매달고 있었다.

그를 끌고 온 군인이“이 자식 네가 제주신보사 주필이야”하고 소리를 찌르고 나갔다. 그는 제주신문(당시 제주신보)의 편집국장 김호진이었다. 그에게는 빨치산의 삐라를 인쇄해 제주읍내에 뿌렸다는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워져 있어서인지 어느 누구도 그를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호진은 아는 얼굴인 최길두(83세 제주시 도평동, 당시 미군정 직속 재산관리처 총무과 직원)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최씨는 “그는 나에게 아는 체했지만 나는 살기위해 그를 꺼렸다. 죽음의 벼랑 앞에선 그토록 친한 친구도 안중에 없었던 짐승 같은 시절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또 최씨는 “그는 산군(빨치산)들의 부탁으로 신문사에서 삐라를 인쇄해주고 산에 오르려다 관음사 절터에서 잡혔어”라며 “내가 묻지도 않은 것을 스스로 말했다”고 기억했다. …<중략>…그가 수감된 지 사흘째 되던 날 밤 카빈총을 멘 군인이 들어오더니 “김호진 나와” 하며 데리고 간 후 그를 본 사람은 아직껏 아무도 없었다. 또 제주신보사 삐라인쇄 사건으로 조판공장장인 공모씨와 영업국 직원 양경운도 김호진 국장과 함께 즉결 처분된 것으로 전해진다.  삐라중 하나인 문제의 호소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호소문 생략>…

이 사건으로 당시 초대도지사를 지냈던 박경훈 제주신보 사장(47년 7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공동의장 역임)과 신두방 전무도 농업학교 임시천막수용소로 끌려간 심한문초를 당했다. 또 군·경은 도내애서 운영중이던 제주인쇄소, 광문사 등 인쇄소를 모두 폐쇄하고 제주신보 인쇄시설만 운영을 허용했다. 이와 함께 박경훈 사장–김호진 편집국장체제는 이후 김석호-김용수 편집국장 체제로 전환됐으며, 군·경의 입김에 의해 제주신보의 보도는 군경 토벌대의 홍보지로 바뀌었다.

(9) 金潤玉(2000). 『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 - 허공에 탑을 쌓을 수는 없다』. 서울: 도서출판 21기획, 194∼195.

김윤옥은 자신의 저서『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 - 허공에 탑을 쌓을 수는 없다』에서 김호진 편집국장의 삐라인쇄 사건과 관련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신보 김호진(金昊辰) 편집국장과 공(孔)공무국장, 양(梁) 공무국 차장 등 간부 3명이 군 당국에 전격 구속돼 충격을 던졌다. 유격대의 선전삐라를 인쇄했다는 혐의였다. <…중략…> 불온삐라 인쇄사건에 연루돼 군 당국에 구속된 이들 신문사 간부들은 그로부터 제주시 남문로 옛 KBS제주방송국에 자리한 합동수사본부에서 연일 철야조사를 받았다.

당시 시중에 나돌았던 불온삐라는 당국의 감정결과, 고급 인쇄기에서 인쇄된 것으로 판명됐다. 이에 군 당국은 “고급 인쇄기가 설치된 곳은 제주신보 밖에 없다”며 이들을 지목한 것이었다.

군수사당국은 이들을 군 막사에 가둬놓은 채 <재산(在山) 무장대>와의 관련 여부 등을 캐는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이 같은 군 당국의 수사는 급기야 제주신보 기자들에게까지 확대돼 제주신보는 마치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쑥밭이 됐다. 자연히 신문발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하 생략>

훗날 박광훈씨는 “함께 수사를 받은 후로 더 이상 김 국장을 볼 수 없었는데, 나중에야 김국장이 제주신보 공무국 차장과 함께 밤중에 재산공비 최고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신문사에서 인쇄했다>는 혐의로 억울하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술회했다(김윤옥, 2000, 194∼196쪽),

그리고 1947년 11월 1일부터 제주신보사 통신원으로 근무했던 김윤옥씨는 이 사건의 여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1947년 12월 6일자 사령).

설상살상으로 좌익세력이 신문사 인쇄시설을 이용, 당시 김호진 편집국장 주도하에 좌익 쪽의 포고문과 담화문 등 불온 문서를 인쇄해준 사건이 터져(註, 언제인지 명시안 함), 신문사를 곤경에 빠뜨리면서 신문사경영에도 일대타격을 주었다. 신문사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한 처지에서 김호진 등 몇몇이 저지른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김석호에 이어 제2대 사장(註: 법인화 이후)으로 취임했던 박경훈 등이 신문사 경영진으로 참여한지 6개월 채 못돼 큰 곤욕과 진통을 겪게 된다. 이 어려운 고비를 돕기 위해 윤성종이 제3대 사장에 취임 짧은 기간 동안 사태를 수습하고 김석호에게 사장 자리를 넘긴다(김윤옥, 66쪽).

(10)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2015).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15년 12월에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가을경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제주농업학교에는‘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인사가 아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제주도의 법조·행정 교육·언론계들 대표하는 인사들이 감금돼 있었다(381쪽). 당시 농업학교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언론계 인사는 다음과 같다.

△언론계 
박경훈(朴景勳, 제주신보 사장· 전도지사 ·민전 공동의장 역임), 신두방(申斗玤, 제주신보사 전무), 김호진( 金昊辰, 제주신보사 편집국장), 현인하 (玄仁廈, 경향신문 기자겸 지사장), 이상희( 李尙熹, 서울신문 지사장)

그리고 이 보고서의 <자료편> 554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1948. 10. 24 △무장대, 이덕구의 명의로 정부에 선전포고. 토벌대에게 호소문 발표.

(11) 신상준(2002). ‘제주도 4·3사건’ 하권. 한국복지 행정연구원

2002년 출간된 신상준의  ‘제주도 4·3사건’ 하권에는, 국내에서 출판된 책자 가운데 유일하게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살포된 호소문과 포고문 내용이 전부 실려 있다. 아래의 글은 이 책자(596-599쪽)에 실려 있는 내용 가운데 본 연구주제와 관련 있는 해당 부분만 발췌한 것이다.

이덕구는 제주도의 남조선노동당의 간부로서 활약했으며,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에 김달삼과 더불어 핵심적 역할을 하고, 그 후 인민유격대 지대장(支隊長)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덕구는 재편(再編) 제9연대가 강경토벌작전을 전개하는 가운데 1948년 10월 24일에 정부와 토벌군경에 대한 선전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김봉현·김민주 공편의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자료집’에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김봉현·김민주 공편, 1963, 166-167쪽 所載).

<국방군, 경찰원> 들에게의 호소문을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註 이하의 내용은  김봉현과 김민주의 저서 내용을 소개할 때,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동 <선전 포고문>을 인쇄한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28세)은 신변에 불안을 느껴 입산을 시도하다가 관음사 부근에서 잡혀 제주농업중학교에 수용되어 있다가 10월 말경에 즉결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69-171쪽)

동 <선전포고문>의 살포와 관련하여 문국주의 ‘사회주의 운동사 사전’(제주도의 4·3 투쟁)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598-599쪽). <……> 그 때문에 남조선인민대표자인 대의원을 선출하는 지하 간접선거 결과, 안요겸(安堯儉, 별명 安世勳), 강규찬(姜圭讚), 김달삼(金達三, 본명 李承珍), 고진희(高珍姬) 등이 선출되어 북조선으로 갔다. 그 후 더욱 엄격해진 경비태세하의 제주시내 20수(數)개소의 직장세포가 건재하고 있어서, 인민유격대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布告文) 약 3,000매를 시내의 동서남북의 요소에 산포(散布)하였다. …<포고문과 이하 내용 생략>…

<제주신문>(註: 당시의 명칭은 제주신보 임)의 주필이었던 남로당원인 김호진(金昊震) 등이 죽음을 결의하고 포고문을 인쇄해서 그것을 각 세포에 배포하여 산포했던 것이다. 그 즉시 김호진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산 쪽으로 탈출하는 도중에 추격당하여 독자(一人息子)인 그는 노부모를 걱정할 틈도 없이 이 젊은 유능한 청년의 일생은 끝나고 말았다(제1출처, 문국주 ; 제2출처, 고문승, 410-411쪽)) …<중략>… 

이덕구의 선전포고문의 발표는 소련의 10월 혁명을 기념하고, 특히 1948년 10월 20일에 일어난 여수· 순천반란사건(제주도로 파견될 제14연대의 반란)에 고무되어 단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소련의 10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서 인민유격대는 1048년 10월 1일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였다. ……1948년 10월 11일에는 제주도에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향보단의 후신이 민보단이 결성되어 재편 9연대가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편 준비를 하고 있었다(신상준, 2002, 599쪽).

(12) 김관후(2018). ‘4·3과 인물’. 제주문화원

김관후는 2018년 9월에 간행된『4·3과 인물』에 실린‘김호진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호진 편집국장과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 사건과 관련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친애하는  장병과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마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 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濟州島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에서 쫓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악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뿌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를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는 자리를 차지하라. 
-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 - 

1948년 10월 24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 제주신보사에서 인쇄되고 뿌려진다는 정보를 서북청년회가 입수하였다. 경찰은 기자들을 잡아들였다. 김호진 편집국장과 공무국장, 공무국차장 등이 군 당국에 구속되었다. 또 제주신보 창간멤버였던 박광훈(朴光勳)이 일본으로 밀항하다가 조천포구에서 검거돼 김호진과 함께 수사를 받았다. 군 당국은 박광훈을 ‘좌익 활동을 하다 밀항하려던 자’로 결론짓고 그를 처형키로 했다. 박광훈은 1948년 11월 17일 군계엄령 하에서 군 재판에 회부됐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김호진은 전단 인쇄 후 신변이 노출될 기미가 보이자 입산을 시도하다가 잡혀 농업학교로 끌려왔다. 김호진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거구의 송요찬 연대장이 왜소한 김호진을 구둣발로 마구 차니까 김호진은 곧 초주검이 됐다. 김호진은 그해 10월 31일에 처형당했다(김관후, 2019, 198-200쪽).

① 『대하실록 제주백년』(1984) ② 『이제야 말햄수다』(1989.8.) ③‘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고창훈, 1989) ④ 『제주신문50년사』(1995) ⑤『4·3은 말한다』④(1997. 3). ⑥ 『제주반세기: 다큐멘터리  그때 그 사건』(1997. 6). ⑦ 『제주언론사』(1997. 11) ⑧  <제주일보> (돌아본 제주 20세기<39>, 1999년 11월 3일, 6면) ⑨ 『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 - 허공에 탑을 쌓을 수는 없다』(2000). ⑩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2015). ⑪『제주도 4·3사건』 하권.(2002) ⑫ 『4·3과 인물』(2018)

4. 비교 분석결과 및 논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김호진 편집국장등이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 또는 무장대 최고지휘자의 불온삐라(선전삐라) 등을 인쇄해 준 혐의 등으로 처형당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본 연구에 필요한 기록(또는 사료)이 담겨 있는 문헌은 16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6개 가운데 4개 자료는 국외에 출판된 책자에 서술되어 있고, 나머지 12개는 국내에서 출판된 문헌(신문기사 1개 포함)에 실려 있다. 

이들 문헌에 실려 있는 이 사건과 관련된 3가지 사실들을 중심으로 그 하나하나에 대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위인지 알아보기 위해, 주어진 각 연구문제와 관계된 모든 자료들 사이의 일치점과 상위점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다.

1) 유인물의 명칭과 그 내용의 적시 여부 
  
우선 국내외에서 출판된 16개의 문헌 가운데 우선 국외 문헌을 대상으로  김호진 편집국장(이하 김호진) 등이 인쇄해주었다는 유인물의 명칭을 무엇이라고 명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의 적시여부를 알아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국외의 문헌 가운데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와 ‘제주도 피의 역사’는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 존 메릴은 ‘선전포고문’, 문국주는 ‘포고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김호진 등이 인쇄해 주었다”라고 주장하는 삐라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각 문헌에 그 내용의 적시여부를 조사하였다. 

김봉현과 김민주의 공편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1963)와 김봉현의 ‘제주도 피의 역사’(1978)는 “인민유격대가 10월 24일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동시에 살포했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들 책자에는 <호소문> 내용만 수록되어 있다. 이를 인용한  존 메릴의 논문도 남로당 군사위원회 위원인 이덕구가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내용은 남로당에서 비밀히 발간하는 ‘제주통신(the Cheju Press)’에 실려 있다고 하였다. 그가 ‘제주통신’에 실여있다고 제시한 <선전포고문> 내용을 보면<호소문>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모두가 ‘선전포고문’을  살포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내용을 적시하지 못한 것은 이들도 <선전포고문>의 내용을 직접 보지 못했고, 그리고 제3자를 통해서도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선전포고문은 유령의 삐라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선전포고문은 없어도 그것과 엇비슷한 명칭의 ‘포고문의 내용’은 존재한다. 그것은 1981년 일본에서 출간된 문국주의 저서 ‘조선사회주의 운동사 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이 포고문의 살포일이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봉현과 존 메릴 등이 말하는 <선전포고문>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 여부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문국주가 “제주신문의 주필인 김호진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포고문>을 인쇄하여 살포하였다”라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문맥상으로는 이 <포고문>이 앞서 말한 <선전포고문>과 같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앞으로 검증받아야 할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따라서 김봉현 등이 말하는 <선전포고문>이 문국주가 발굴 제시한 <포고문>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 삐라의 정확한 명칭은 무엇인지는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똑같은 삐라를 놓고 연구자 및 저술가들의 실수로 서로 다르게 표기했다 하더라고, 표면적인 낱말 자체가 다르듯이 두 단어가 제3자에게 전달하는 의미의 강도와 상징성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사회에 유통되는 각종 용어들 하나하나가, 그 개념의 틀을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을 봉쇄해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들이 몰랐을 이가 없다. 

이와 더불어 이상한 것은 존메릴과 문국주는 김봉현 등이 “선전포고문과 함께 뿌려졌다”라고 주장하는 호소문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런 것일까? 자료수집과정에서 포고문(또는 선전포고문)과 함께 살포되었다는 호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이에 관해 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 또한 논의 대상으로 남겨둔다.

따라서 이들 4개 문헌에 따르면 ‘선전포고문’은 그 실체가 없는, 책속에만 존재하는 상징적 용어에 불과하고, 문국주에 따르면 ‘호소문’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서술방식이 쟁점이 되는 이유는 김봉현과 김민주 그리고 존 메릴의 논문을 본 사람들은 호소문의 내용은 알지만 ‘선전포고문’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듯이, 문국주의 책자를 접한 독자들에게는 포고문은 존재하지만, ‘4·3 당시 선전포고문과 함께 뿌려졌다는 호소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삐라가 되기 때문이다. 

국내 문헌을 보면 그 숫자가 많은 만큼 삐라의 종류 및 명칭도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4·3은 말한다’, ‘제주일보’ (돌아본 제주 20세기<39>),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4·3과 인물’ 등은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라고 부르고 있고. <4ㆍ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과 ‘제주도 4·3사건’ 하권은  선전포고문으로  ‘대하실록 제주백년’, ‘이제야 말햄수다’, ‘제주반세기’, ‘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 등은 재산공비의 불온삐라(선전삐라) 또는 삐라로, 그리고 ‘제주신문50년사’와 ‘제주언론사’는 무장대 최고 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이라고 명명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 삐라 내용의 적시 여부를 조사해 본 결과, 신상준의 저서 ‘제주도 4·3사건’ 하권에만 선전포고문(註, 문국주의 포고문)과 호소문의 내용이 모두 수록되어 있는 반면에 ‘4·3은 말한다’제4권, <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제주일보’, ‘4·3과 인물’에는 호소문의 내용만 서술되어 있다. 신상준의 책자를 제외한 이들 4개 문헌의 공통점은 1963년 일본에서 출판된 김봉현과 김민주의 저서와 존 메릴의 논문에서처럼, ‘선전포고문과 호소문’ 또는 ‘선전포고문’을 살포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선전포고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못하고‘호소문’의 내용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존 사료(史料)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 없이 구태의연한 옛날 자료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신상준도 이와 비슷하게 자기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힌 글을 쓰고 있다. 선전포고문과 포고문의 뜻은 표면적인 단어의 겉모습처럼 그 내용도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또한 문국주가 자신의 저서에서‘포고문’이라고 쓴 것은 제멋대로 터무니없이‘선전포고문’이라고 바꿔 쓰고 있다. 즉 사료의 원형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왜곡 변형하는 행위들이 발견되었다. 이런 자료들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이외에 나머지 문헌들(‘대하실록 제주백년’(1984), ‘이제야 말햄수다’(1989.8.), ‘제주신문50년사’(1995), ‘제주반세기: 다큐멘터리 그때 그 사건’(1997. 6), ‘제주언론사’(1997. 11), ‘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2000))은 김호진 국장들이 인쇄해준 유인물을 명칭을 재산공비의 불온삐라, 유격대의 선전삐라(또는 불온삐라), 좌익 무장대 최고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들 문헌에도 포고문과 담화문 그리고 불온삐라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포고문>과 <담화문>의 내용이 무엇이고, 선전삐라(또는 불온삐라)가  어떤 내용의 삐라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역사소설같은 이런 방식의 역사 서술은 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방해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들 문헌의 저술가들 가운데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직접 본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제주도의 4·3투쟁’에 수록된 포고문의 경우 문국주가 직접 실물을 보고 쓴 것인지 아닌지 여부는 알 수 없다.

2) 삐라의 인쇄시기와 살포시기

김호진 등이 인쇄해 주었다는 유인물의 명칭이 다양하듯이 이들의 살포시기도 일정치 않다.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은 언제 뿌려졌는가? 김봉현과 김민주에 따르면 10월 24일에 살포되었다. 존 메릴도 이와 마찬가지로 “여수반란(註: 1948년 10월 19일)이 시작된 지 4일 후에”살포되었다고 하였다. 문국주가 말하는 ‘포고문’은 언제 살포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막연하게 인민유격대가 포고문 3.000매를 읍내에 살포하였다고만 서술하였다. 

국내의 문헌에서도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는 10월 24일에 뿌려졌다는 설이 가장 많았다.( <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4·3은 말한다’ ④, ‘제주일보’(1999년 11월 3일),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제주도 4·3사건’ 하권, ‘4·3과 인물’).

나머지 7개 문헌에는 김호진 국장이 인쇄해 준 유인물의 살포시기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를 테면 ‘제주신문50년사’와 ‘제주언론사’에 따르면, 산사람 쪽(좌익무장대의 최고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인쇄해준 시기는 8월인데 이것이 언제 뿌려졌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대하실록 제주백년’, ‘제주반세기’ 그리고 ‘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등도 김호진 등이 유격대의 선전삐라(또는 재산공비의 불온삐라)를 인쇄해주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언제 인쇄되어 뿌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를 종합해 보면 김봉현 김민주 등은 자신들의 저서 서문에서 4·3 당시 현장을 직접 체험했던 여러 관계자로부터 수합한 자료를 토대로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지만, 나머지 저술가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저러한 주장을 펴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면 이 유인물은 언제쯤 인쇄되었을까? 신문처럼 당일 인쇄되어 당일 배포된 것일까? 이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16개 자료 중에 ‘제주일보’(1999년 11월 3일)만 유일하게 이덕구 명의로 된 두 개의  삐라가 김호진 등에 의해 10월 24일 오전에 제주신보에서 인쇄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어느 날 오전 11시경 김호진 편집국장 등이 신문사에서 두 종류의 삐라를 인쇄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강순현)은 있지만, 그가 구체적인 날짜는 말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보다시피 이들 문헌에 서술된 내용만으로는 이덕구 명의의 삐라가 언제 인쇄되어 언제 살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은 한 현재로써는 인민유격대가 10월 24일 살포했다는 김봉현과 김민주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 문건이 10월 24일에 살포되었다는 근거나 이유는 무엇인가? 

3) 삐라의 살포 배경 및 이유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된 이 삐라가 10월 24일에 살포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왜 이날을 택한 것일까? 그 이유 및 배경에 대해 김봉현과 김민주는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긍지에 몰려 있던 무장대가 10월 19일 <국방군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에 크게 고무되어 종합적인 정세 판단 아래에 종래 연대(聯隊)조직이었던 전투대오(戰鬪隊伍)를 부대로 축소 재편성(10월 23일)하고 전투태세를 강화하여, 적들의 무차별 토벌에 대항하기 위해 10월 24일에 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宣戰布告文)’과 일체의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호소문’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김봉현의 저서를 인용한 존 메릴도 <국방군 14연대>의 반란에 고무되어 10월 24일 정부에 ‘선전포고(宣戰布告文)’를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내의 연구자 가운데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의 살포배경 등을 설명한 사람은 두 사람 (신상준과 김영중) 정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이덕구의 선전포고문의 발표는 소련의 10월 혁명을 기념하고, 특히 1948년 10월 20일에 일어난 여수· 순천반란사건(제주도로 파견될 제14연대의 반란)에 고무되어 단행된 것”으로 보고 있다(신상준, 2002, 599쪽; 김영중, 2019, 제3차 강연회 자료집).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장대가 여순 반란사건에 크게 고무되어 이승만 정부에 이덕구 명의로 선전포고를 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왜 종전과 달리 이덕구 명의로 된 삐라를 살포 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배경 및 이유가 무엇인지 더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제주도당 선전부에서는 4·3기간 동안 많은 종류의 삐라를 간행 살포했지만,  ‘인민군사령관 이덕구’라고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살포한 삐라는 이것이 처음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주지역에 뿌려진 삐라들의 주체(제목)를 보면, 제주읍 인민대회(결의문), 구좌면 투쟁위원회(면민에게 호소함), 인민해방군 제5연대(포고령), 제주도 인민유격대(경찰관에게 경고함), 제주도 인민유격대(시민동포에게 드리는 글), 제주도 인민유격대(‘5·10 망국단선 반대’를 위한 무장봉기 성명서)등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차후에 무장대 또는 제주도당이 왜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된 2개의 삐라를 10월 24일에 살포했는지에 대해서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삐라의 인쇄 등과 관련

‘선전포고문과 호소문’등을 인쇄해준 사람은 누구인가? 1963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김봉현과 김민주의 자료집을 보면, 제주신보의 주필인 <김호진>을 비롯한 3명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78년에 출간된 김봉현의 저서에서는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 공무국장, 공무국 차장 등 3인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인쇄자의 명단이 전자에 비해 구체화되었다. 진일보한 것이다. 이 또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주장이기 때문에 앞으로 검증받아야 할 가설에 불과하다. 

‘포고문’을 인쇄해준 사람은 누구인가? 문국주의 주장에 따르면 제주신보의 주필이었던 남로당원인 김호진(金昊震) 등이다. 존 메릴은 이 삐라 인쇄와 관련해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삐라의 인쇄 장소와 일시 그리고 인쇄자 가운데 한 사람이 김호진 편집국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유인물이 어디서 인쇄되었는지 모른다. 단, 편집국장과 공무국장 등의 명칭이 나오기 때문에 이 삐라가 제주신보사에서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 발굴을 통해 이 삐라가 언제, 어디서,누가 인쇄해 주었는지 좀 더 명확히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문헌에서는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누가·언제·어디서 인쇄해 주었다고 하는지 알아보자. 관계문헌 조사 결과, 여기에 대해서는 3개의 설(가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김봉현의 주장처럼, 여전히 김호진 편집국장·공무국장· 공무국 차장 등 3인이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또는 불온삐라)을 인쇄했다는 설이다(‘대하실록 제주백년’, ‘제주반세기: 다큐멘터리 그때 그 사건’, ‘4·3과 인물’).

또 다른 하나는 제주 4·3연구소에서 1989년 8월에 간행한 ‘이제사 말햄수다’ 제2권 <인명색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 책자에 따르면, 어떤 삐라인지 모르지만, 제주신보사에서 삐라를 인쇄해준 사람은  조판공장장 공○○(공성수씨의 동생)씨와 영업국 사원 양경운이다. 이 책자를 통해서 제주신보사에서 삐라를 인쇄해 준 사람의 구체적인 이름과 성씨가 처음으로 문자화되어 세상에 알려진다. 하지만 이 자료에는 김호진이 이들과 함께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인쇄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나머지 또 하나는 ‘이제사 말햄수다’ 제2권이 나온 이후에 탄생한 가설로서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 조판공장장 공모씨와 양경운(양모) 등 3인이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인쇄해 주었다(‘제주신문50년사’, ‘제주언론사’, ‘제주일보’, ‘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는 설 
이다.

이 가설은 첫 번째 가설(‘제주도 피의 역사’)에 등장하는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 및 공무국장, 공무국 차장 등 3인 중에 김호진 국장을 제외한 두 명을 빼고 그 자리에 조판공장장 공모씨와 양경운(양모) 등 집어넣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그림을 맨 처음 제시한 것은 연도별로 보아 ‘제주신문50년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주장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후 부터 너도 나도 의심 없이,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이들 세 사람이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인쇄해준 것으로 고착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또한 앞으로 검증되어야 할 가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국내 문헌을 통해서도, 이들 삐라가 언제 인쇄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이들 삐라가 10월 24일에  도내 각지에 뿌려진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하루 이틀 전에 아니면 당일에  한 두 사람이 아주 비밀히 신문사에 모여 문 걸어 잠그고 인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자료로는 이 삐라가 등사기로 인쇄되었는지 아니면 활판 인쇄기로 인쇄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삐라의 인쇄과정 전반에 대해서 후술할 예정이다.

그리고 김호진 편집국장이 이를 인쇄 주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4·3은 말한다’ ④에 등장하는 강순현은 “제주신보사 윤전실에서 김호진 편집국장과 직원 몇 명이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또 하나는 ‘혁명군사령관 이덕구’의 명의로 된 삐라를 인쇄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라고 했다. 최두길의 증언에 따르면, 농업학교 임시수용소에서 김호진에게 붙잡힌 이유를 물은 즉, “그는 선전포고문을 인쇄한 후 입산하다가 관음사 부근에서 포위망에 걸려 잡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제1출처: 최두길의 증언 제2출처: 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71쪽).

이 내용으로 볼 때, 현재로써는 김호진과 강순현을 제외하고, 이 삐라의 내용(실물)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포고문의 경우도, 문국주가 실물 삐라를 직접 보고, 그 내용을 서술한 것인지 아닌지, 이 또한 알 수가 없다. 만약에 원본을 보았다면 아마도 포고문의 실물을 소개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4·3당시 생산된 미군정 보고서( 제주 4·3 자료집: 미군정 보고서,  제주 4·3 자료집Ⅱ: 미국무성 제주도 관계문서)와  4·3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 채록한 각종 문헌 (‘한라의 통곡소리’, ‘영원한 우리들의 아픔 4·3’, ‘이제사 말햄수다’(1-2권), ‘4·3은 말한다’1-5권 )에도 이 삐라를 직접 보았거나 이에 대해 이야기들을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한 증인은 한분도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5) 김호진 등의 처형 시기 및 장소

이 삐라를 인쇄해 준 것으로 알려진 김호진 편집국장 등은 언제, 어디서 처형당했는가? 국외에서 출판된 책자를 보면, 김호진 편집국장 등 3인이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인쇄해준 후에 유격대를 따라 입산하던 도중 동광양(東廣壤, 속칭 박성내)에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야만적인 테러를 받아 살해(10월 24일) 되었다는 주장(김봉현과 김민주, 1963)도 있고, 막연하게 인쇄 즉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산 쪽으로 탈출하는 도중에 추격당하여 처형당했다는 설(문국주, 1981)과 삐라를 인쇄해준 것이 발간되어 송요찬(宋堯讚)에 의해 처형되었다(김봉현, 1978)는 설도 있다. 
 
팩트(fact)는 하나인데도, 연구자들의 주장이 이렇게 제각각 다른 것은, 외국에 있으면서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한 자료의 추적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국내문헌에서는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처형시기 및 장소에 대해서도  크게 3개의 가설(추론)이 존재한다.  

첫째, 언제인지 모르지만 막연히 처형당했다는 설이다. 이를테면, △ 신문사 공무국에서 삐라를 인쇄하다 계엄당국에 적발되어 처형되었다(‘大河實錄 濟州百年’). △ 신문사에서 삐라를 인쇄했다는 혐의로 억울하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진성범, 1997, 69-71쪽; 김윤옥, 2000, 194∼195쪽). △ 즉결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될 뿐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총살형이 집행됐는지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의문에 쌓여있다(‘제주일보’, 1999년 11월 3일, 6면). △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을 인쇄해 넘겨준 후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산 쪽으로 탈출하는 도중에 추격당하여 독자(一人息子)인 그는 노부모를 걱정할 틈도 없이 이 젊은 유능한 청년의 일생은 끝나고 말았다.(제1출처,  문국주 ; 제2출처 고문승, 1991, 410-411쪽) △ 제주신보의 프락치 양경운(영업국 직원)과  조판공장장 공○○(공성수씨의 동생)가 삐라를 인쇄해 나가다가 들통 났다는 설이다(‘이제사 말햄수다’2권, 1989)(註: 여기서는 김호진 편집국장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둘째, 구체적으로  8월과 10월 말경에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다.
△8월에 산사람 쪽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인쇄해주었다는 혐의를 받아 군부에 의하여 처형당했다(‘제주신문50년사’.1995 ; ‘제주언론사’, 1997.). △김호진의 사망일자는 정확치 않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10월 말경으로 추정된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김호진은 그해 10월 31일에 처형당했다(김관후, 2019, 198-200쪽)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8월과 10월말 또는 10월 31일 처형설”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지만, 이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증언들 때문이다.

‘4·3은 말한다’ 제4권을 자세히 읽어보면, 김호진 국장의 처형 시기 등 여러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중요한 2개의 증언이 실려 있다.

하나는 제주신보사에서 김호진 편집국장 등이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또 하나는 혁명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된 삐라를 인쇄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강순현(당시 관재처 불하과장)의 증언이고 또 하나는  제주농업학교 임시 수용소에서 김호진 국장이 처형당하기 사흘 전에 만났다는 최두길의 증언이다. 이 책자에 서술되어 있는 두 사람의 증언 내용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은 강순현의 증언 내용이다.

① 강순현씨가 농업학교 임시수용소에 끌려 들어간 것은 1948년 11월 초순경이다. 이 책의 164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케리 대위가 업무를 이양하고 떠난 직후인 1948년 11월 초 관재처 사무실에 9연대 정보과 탁성록 대위가 들이닥쳤다. 탁 대위는 그가 위세를 보이려고 할 때면 늘 하던 습관대로 허리엔 권총을 목에는 수류탄을 걸고 나타났다. 관재처 부처장격인 한병택, 총무서장 김인지, 불하과장 강순현, 총무과장 김태호, 그리고 양문수 등 직원 7∼8명이 9연대 본부가 있던 농업학교로 줄줄이 끌려갔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64쪽). 

② 강순현씨는 자신이 수감된 후에  임시 수용소에 김호진이 심한 고문을 받는 것으로 보았다고 했다.

농업학교 수감자 중에서도 김호진은 가장 심한 고문을 받았다.  강순현(姜淳現)씨는“거구의 송요찬 연대장이 왜소한 김호진을 구둣발로 마구 차니까 김호진은 곧 초주검이 됐다”고 말했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71쪽)  

이상의 내용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강순현씨는 과거 어느 날 오전 11시경 김호진 국장 등이 신문사에서 삐라를 인쇄하는 것을 직접 봄→ 강순현씨는 11월 초순경 임시 수용소에 수감됨→그 후 같은 수용소 안에서 연대장이 김호진을 구둣발로 심하게 차는 것을 보았다고 함.

다음은 최길두(崔吉斗)씨의 증언 내용이다.

① 최길두씨가 농업학교에 끌려간 시기는 1948년 11월 중순경이다.
그는 자신이 계엄사령부에 끌려간 시기와  당시 천막수용소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92쪽).

난 11월 중순경 관재처에 근무하던 중 탁성록 대위와 강현 서청 정보부장에 의해 끌려갔어요. 그전에 이관석 교장이 학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또한 해주대회에 참석키 위해 김달삼과 함께 월북한 고진희의 동생 고봉효(당시 28세)가 처형당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끌려가 보니 농업학교 1년 선배인 강재량(신한공사 주정공장장)이 같은 천막에 먼저 잡혀 와 있더군요. 매일 아침 탁 대위가 점호를 했습니다. 탁 대위는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체격이었어요. … 난 제1천막에 있었는데 제2천막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당했어요. … 그런데 무장대 삐라를 인쇄한 혐의로 잡혀온 김호진 편집국장은 나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어요. 그러나 그땐 그가 내 곁에 가까이 오는 걸 꺼렸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와 나를 연관시킬까봐 전전긍긍한 것이지요. 죽음의 공포를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② 최두길이 수감되고 1주일쯤 지난 어느 날  김호진이 같은 천막(註: 제1천막)에 수감되었다. 그는 천막수용소에서 김호진과 만나는 첫 장면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탁성록 대위에게 끌려온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김호진이 같은 천막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나보다 2살 아래였지만 서로 문학을 하는 데다 사람됨이 좋아서 매우 친밀한 사이였지요. 그는 수재로서 시를 즐겨 쓰는 문학청년이었습니다. 키가 작고 눈이 아주 나빴지요. 처음 농업학교에 끌려 왔을 때 어디선가 심하게 구타를 당했는지 행색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안경이 없으면 봉사나 다름없던 사람인데 안경테도 없이 안경알 한 개를 겨우 실로 묶어 매달고 있었습니다. 잡혀온 경위를 물으니 “‘선전포고문’을 인쇄한 후 입산하다가 관음사 부근에서 포위망에 걸려 잡혔다”라고 말하더군요(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70-171쪽). 

③ 최길두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호진이 제1천막에 들어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에 보초에게 끌려 나가 처형당했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71쪽). 

최길두씨는 11월 중순경 수감됨→ 일주일 후에 김호진이 같은 제1천막에 수감됨→ 3일째 되던 날 밤 처형당함. 따라서 강순현씨과 최길두씨의 증언이 사실이고 정확하다면,  김호진은  최소한 11월 중순부터 11월 25일까지는 살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1월 초순경 농업학교 임시 수형소에 수감된 강순현씨는 그 안에서 거구의 송요찬 연대장이 왜소한 김호진을 구둣발로 마구 차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고(171쪽),  1948년 11월 중순경 수감된 최길두는 김호진이 자신보다 1주일정도 늦게 자신의 천막(제1천막)에 수감되었고, 제1천막에 들어오고 나서  3일후에 처형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6) 제주신보에 미친 영향

이덕구 명의의 삐라 인쇄 사건이 신문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국외 문헌을 보면, 김호진 편집국장, 공무국장 및 차장 등 3인이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인쇄해 준 혐의로 처형당했다는 내용 말고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 국내 문헌을 조사한 결과 이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 2-3개 정도 서술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4·3은 말한다’제4권 171쪽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삐라 인쇄사건으로  제주신보사 박경훈사장과 신두방 전무가 농업학교 수용소로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 했지만, 삐라 제작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져 무사했다.

② 제주일보 1999년 11월 3일자(6면)에 실려 있는 기사내용의 일부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초대도지사를 지냈던 박경훈 제주신보 사장(47년 7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공동의장 역임)과 신두방 전무도 농업학교 임시천막수용소로 끌려간 심한문초를 당했다. 또 군·경은 도내에서 운영중이던 제주인쇄소, 광문사 등 인쇄소를 모두 폐쇄하고 제주신보 인쇄시설만 운영을 허용했다.

③ 진성범의 저서 ‘제주반세기: 다큐멘터리 그때 그 사건’를 보면, 이 사건으로 “군 당국의 수사는 급기야 제주신보 기자들에게까지 확대돼 제주신보는 마치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쑥밭이 됐다. 자연히 신문발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진성범, 1997, 69-70쪽).

④ 이 사건 당시 제주신보사 통신원으로 근무했던 김윤옥씨는 2000년에 출판된‘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설상살상으로 죄익세력이 신문사 인쇄시설을 이용, 당시 김호진 편집국장 주도하에 좌익 쪽의 포고문과 담화문 등 불온 문서를 인쇄해준 사건이 터져(註, 언제인지 명시안 함), 신문사를 곤경에 빠뜨리면서 신문사경영에도 일대타격을 주었다. … 이 사건으로 김석호에 이어 제2대 사장(註: 법인화 이후)으로 취임했던 박경훈 등이 신문사 경영진으로 참여한지 6개월 채 못돼 큰 곤욕과 진통을 겪게 된다(66쪽).

우선 박경훈 사장과 신두방 전무에 대한 이들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948년 7월 15일 제주에 파견돼 와서 그 해 12월 15일 제주를 떠날 때까지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정무의 증언에 따르면 박경훈 사장은 9월 어느 날 국법회의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에 있었다. 그리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다가 부친 박종실(註: 제주도의 최대 거부)의 노력으로 몰래 풀려난 미공군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도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의 235쪽에 실려 있는 김정무 대위의 증언 가운데 일부분이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 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범죄사실도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사형언도를 하라는 겁니다. 사관학교에서 군법회의에 대해 몇 시간 배우긴 했지만 재판을 해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 에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 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골에서 쌀 창고 열쇠는 늘 할머니가 갖고 다니던 게 기억 나 “피고가 직접 쌀을 주었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당시 37― 38세 가량 된 박경훈 지사는 “아닙니다. 저도 구속돼 조사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척이 와서 굶어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도지사 관사에서 쌀이 나왔다 하지만 부인의 행위를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법무관 등 몇 사람과 평의에 들어갔지요. 어떤 사람은 “사형 집행을 하라고 하는데 한 20년 어떻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15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10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고심 끝에 심판관들에게 “이건 무죄이지만 부인을 데려다 사형을 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한 3년 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3년을 언도했습니다. 아직도 무죄인 사람에게 3년형을 언도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어쨌든 재판결과를 연대장에게 보 고했더니 “이 공산당 같은 놈의 새끼!”라며 철모로 나를 갈기는 겁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크게 부었습니다. 같이 재판에 참여했던 최세인 인사참모도 많이 맞았습니다(235쪽). 

그리고 신두방 전무에 관해서도 기록에 차이가 있다. 1947년 11월 1일자로 제주신보사 통신부원으로 입사하여(註: 제주신보, 1947년 12월 6일자 사령 참고) 1950년대부터 일선취재 기자로 활동하며 30여년 동안 언론인으로 살았던 김윤옥에 따르면, 신두방씨가 김석호 사장에 의해 제주신보 제3대 전무로 발탁된 것은 50년 초이다(김윤옥, 17쪽과 338쪽). 즉, 그는 (서청으로부터)경영권을 다시 회복한 김석호는 제주신보 경영진의 보강과 강력한 리더쉽이 있는 보좌진의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초대 전무인 백찬석, 2대 전무이던 김병헌(제주목재회사)에 이어 3대 전무로 과거 일제시 제주읍 사무소에서 같이 근무했던 내부계장의 출신 신두방을 전무이사로 발탁했다(김윤옥, 86쪽)라고 서술하였다.

또한 신문사 경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제주반세기’와 ‘제주일보’는 보다시피 서로가 상반된 터무니없는 막연한 주장을 펴고 있다.

진성범은 이 사건으로 자연히 “신문발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69-70쪽) 반면에 ‘제주일보’는 이 사건으로 군·경이 도내에서 운영 중이던 제주인쇄소, 광문사 등 인쇄소를 모두 폐쇄하고 제주신보 인쇄시설만 운영을 허용했다고 보도하였다(제주일보, 1999년 11월 3일자). 

후자와 관련, 이런 주장이 나오게 배경을 잘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남한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미국과 이승만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정부를 대한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을 신문사에서 인쇄해 준 것은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중대한 반란 행위에 속한다. 이러한 신문사에 오히려 인쇄 독점 특혜를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은 조치다. 이를 근거로 제주 출판 역사자료를 조사해봤지만, 이런 주장을 입증할 내용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참고사항으로 더 붙인다면, 당시 제주신보사의 불온삐라 인쇄사건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는 광문사의 주인은 백형석과 백찬석이었고(1947년 1월 28일자 신문 광고), 백찬석의 경우 1947년 1월부터 제주신보사의 전무와 주식회사 주주모집 발기인 대표(1948년 2월),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1947년 11월 5일 결성) 단장과 경찰후원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 당시의 세력판도로 볼 때 백찬석이 운영하는 인쇄소를 무법시대였지만, 합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폐쇄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온 삐라 인쇄사건으로 신문발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는  진성범의 주장도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동서고금막론하고 신문발행이 중단된다는 것은 중요한 뉴스거리가 된다. 이런 발상으로 20여개 중앙지의 4ㆍ3사건 보도내용을 1948년 4월부터 12월 말까지 검색한 결과, 동년 7-8월경에 제주신보 발행이 일시 중단된 적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는 기사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불온삐라의 인쇄사건과 관계가 없는 내용이지만, 참고로 조선중앙일보의 보도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948년 8월 8일, 8월 11일, 8월 18일)

①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8일
제주 관공서원 피검 / 구국투위(救國鬪委) 관계로
제주경찰 특별수사대에서는 지난 7월 22일부터 활동을 개시하고 제주관재처를 비
롯하여 북국민학교 제주측후소 언론기관등 광범위에 걸쳐 16명을 검거하였다.
체포의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탐문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5월 상순경부터 구국투
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지하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며 전기 16명은 지난 8월 1일
전원 송청되었다. [제주 7일 발 조통]

② 조선중앙일보 8월 11일 
제주관공서원에 벌금형
전번 제주도경찰청 특별수사대에 검속되어 8월 1일 송청된 제주신보 기자를 비롯한 관재처 북국민학교 제주측후소 직원등 16명은 5일 벌금형 최고 1만원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③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18일
쌀이란 구경도 못하는 제주 / 물가고로 도민의 생활고는 극도 / 학교는 교원 없어 황폐
최근 제주도로부터 돌아온 귀환자는 근간의 제주도 사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그리고 교육방면에 있어서도 사태가 완화됨에 따라 각 학교는 재개되어 겨우 아동들은 수업하고 있으나 아직도 교장 이하 교원이 돌아오지 않아 황폐되어만 가고 있는 학교도 있다. 또한 중앙에서 발간하는 신문이란 도무지 볼 수 없으며 도내에서 발행하는 유일의 신문인 제주신보는 지난번 종업원의 검거로 그나마 휴간상태에 빠지고 있다.” [광주 발 조통]

이 3건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제주신보 기자와 직원들이 관재처, 북초등학교, 제주측후소 직원 등과 함께 구국투쟁위원회(註: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의 새로운 명칭)를 조직하고 지하투쟁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제주경찰청 특별수사대에 의해 7월 22일 검거되었다가 8월 5일 벌금을 물고 풀려나는 사건이 있었고, 그 여파로 신문발행이 잠시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사를 제외하고 1948년 12월 말까지 ‘제주신보 기자가 검거되었다거나, 제주신보의 발행이 중단되었다’는 기사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진성범이 말하는 신문발행의 중단 시기는 언제인가? 현재로서는 의문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김윤옥씨의 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건에 관한 기록은 인과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다. 사건을 구체적으로 재현하지 못하는 글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가 없다. 

이 삐라사건이 일어날 당시 신문사에 근무하였던 김윤옥씨는 2000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에서 “신문사를 곤경에 빠뜨리면서 신문사경영에도 일대타격을 주었다”라고 기술하였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 사건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기자출신의 글이 다른 사람들이 쓴 것보다 더 불분명하다. 신문사에 어떠한 타격을 줬을까? 

4. 요약 및 결론

이 연구는 인민유격대가 1948년 10월경 제주읍내에 살포하였다는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와 이를 인쇄해준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 등과 관련된 사건에 관한 기록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위인지 알아보기 위해 시도되었다.

국내외에서 출판된 각종 문헌을 조사한 결과, 본 연구에 필요한 기록(또는 사료)이 담겨 있는 문헌은 16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문헌에 수록된 자료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새롭게 발견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요약 및 결론

첫째, 김호진 편집국장 등이 인쇄해 주었다는 유인물의 종류는 예상외로 매우 다양했다. 그 명칭으로 보면 크게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호소문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포고문 △재산공비의 불온삐라(선전삐라) 또는 삐라 △무장대 최고 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 등 5개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유인물 가운데 그 내용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호소문과  포고문 등 두 개 밖에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종 문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선전포고문’은 그 실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선전포고문은 책속에만 존재하는 상징적 용어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의 ‘불온삐라 또는 선전삐라’라는 것은 당시 시중에 나돌던 삐라들을 통칭하는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종합할 때 김호진 국장 등이 인쇄해 준 삐라는 두 개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따라서 김봉현 등이 말하는 <선전포고문>과  문국주가 발굴 제시한 <포고문>이 같은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 삐라의 정확한 명칭은 무엇인지는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은 언제 뿌려졌는가? 김봉현과 김민주의 주장에 따르면 10월 24일에 살포되었다. 이 또한 정확한 근거가 없지만, 새로운 사료(史料)가 발굴되지 않은 한  현재로써는 이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나 근거는 무엇인가? 

이 문건의 내용과 발표일은 남로당 조직의 방침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로당 제주도당의 행동강령 등에는‘오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그 다음날 공포한다’라고 하는 일종의 규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전례를 들 수 있다.
……긴박한 정세하에 4ㆍ3 봉기 무장투쟁의 총화에 대한 구체적이며 과학적인 분석에 기초하여 앞으로 도래할 <5ㆍ10 망국단서> 보이코트에 대한 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도당부대회(4월 15일)가 항쟁의 불꽃 속에 진행되었다. …… 이에 기초하여 무장대를 한층 강화 발전키 위해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 열렬한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의 소유자 30명씩을 선발하여‘인민유격대(속칭 인민군)’을 조직하였으며 또한 그의 기동성과 민활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하였다.……

<도당부 대회>(4ㆍ15)의 결정에 기초하여 인민유격대의 재편성 계기로… … 제주도인민유격대(총지휘자 김달삼 국기 장훈 2급)의 명의로써 <5·10 망국단선> 반대를 위한 무장봉기 성명(4월 16일)을 미군과 그 주구악당들에게 당당히 선고하였다.  

이와 함께 애국적인 전체 도민들에게 <5·10 단선>보이코트 투쟁에 호응 궐기하여 결사적으로 분쇄할 것을 호소하였다(김봉현·김민주, 1963, 88∼89쪽)

이 내용에서 보듯이 지난 4월에도 이번처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주요 간부회의에서 결정한 향후 투쟁목표 및 방침 등에 기초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선전부에서는 그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만들어 토벌대와 무장대 그리고 지역주민들에게 살포하였기 때문이다.

산사람 쪽(좌익무장대의 최고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이 8월에 뿌려졌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가 없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포고문과 담화문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제주일보의 경우, 유일하게 이 유인물이 10월 24일 오전에 제주신보에서 인쇄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 주장을 입증할  근거가 하나도 없다. 

셋째, 김호진 편집국장이 처형당한 시기는 지금까지 정설 비슷하게 알려진 10월말경이 아니고, 11월 25일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로는 김호진이 처형당하기 직전인 11월초부터 중순까지 신문사와 농업학교 임시 수형소에서 그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는 두 사람들의 증언(강순현과 최길두)을 들 수 있다. 반면에 김호진 편집국장의 8월 또는 10월말 처형설에 대해서는 이를 입증할만한 설득력 있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넷째, 이덕구 명의의 삐라들을 인쇄해준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3개의 설(가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김호진 편집국장·공무국장·공무국 차장 등 3인이라고 하는 설과 또 하나는 ‘이제사 말햄수다’ 제2권이 나온 이후에 탄생한 가설로서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 조판공장장 공모씨와 직원 양경운(양모) 등 3인이라는  가설 
이다. 나머지 또 하나는 막연히 제주신보의 주필이었던 남로당원인 김호진 등이 인쇄해 주었다는 설이다.  

이 삐라가 신문사 인쇄기로 인쇄된 것이 확실하다면 두 번째 가설이 맞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조몽구, 김달삼, 김완배, 고칠종, 김용관, 강규찬, 고학 외 7명 등 총 14명이 1948년 2월 25일 조천면 선흘리에서 모여 개편한 ‘구국투쟁위원회’의 조직표를 보면, 제주신보사 사원인 양경운은 군사부(부장 김달삼)의 정보과장과 조직부(부장 김양근)의 특별부장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동년 10월 23일(또는 24일) 개편된 ‘혁명투쟁위원회’ 조직도상에는 인사과 정보과에 소속된 남로당 간부였기 때문이다(고재우, 1998: 김영종, 2011. 14쪽과 34쪽).

다섯째,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 인쇄 사건은 신문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 주장(① 삐라 인쇄사건으로 제주신보사 박경훈사장과 신두방 전무가 농업학교 수용소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② 군·경은 도내에서 운영중이던 제주인쇄소, 광문사 등 인쇄소를 모두 폐쇄하고 제주신보 인쇄시설만 운영을 허용했다. ③ 이 사건으로 제주신보 발행이 일시 중단되었다.)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3가지의 주장을 입증할 자료들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 주장을 반격할 새로운 사료들을 발견하여 이미 제시하였다.  
 
그리고 제주신보 편집국장 등이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불온삐라를 신문사에서 인쇄해준 혐의로 처형당하고, 신문발행이 중단되었다고 하는 것은 제주사회와 언론사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충격적인 뉴스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개 달하는 중앙언론사 가운데 이를 보도한 신문은 한곳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보다 못한 자질구레한 사건보도에 열을 올리던 신문들이 이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미군정보기관의 각종 보고서에도 이에 관한 정보를 수집 보고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에 대한 신문의 보도나 정보 보고가 없는 것은 혹시 삐라인쇄도중에 들통이 나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여섯째, 이 사건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1963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판된‘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이다. 이 책보다 20∼30년 뒤늦게 국내에서 출판된 각종 문헌들 속에 서술된 내용들 중에 사실보다 허구에 가까운 것들이 더 많았다. ‘4·3은 말한다’를 제외하고 제대로 된 새로운 자료를 갖고 쓴 글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대다수 문헌들은 김봉현과 김민주의 공편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1963)와 김봉현의 ‘濟州島血の歷史’(1978)에 수록된 내용들이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곳에 실린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예를 들면 이 책자들은 “인민유격대가 10월 24일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동시에 광포했다”라고 주장하면서 <호소문> 내용만 제시하고 있듯이. 이후 출판된 문헌들(존메릴, 1980; 고창훈, 1989; 제민일보 4·3취재반,1997; 제주일보, 1999; 김관후, 2018)도 이와 같이 ‘선전포고’를 했다고 주장하면서 호소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곱째, 국내 문헌의 저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기자출신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논문이나 저서를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그 출처를 거의 밝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결과 여기에 서술된 내용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들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특히 역사나 기사를 쓸 때 육하원칙 (六何原則)의 기본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그 사건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도 이를 거의 지키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그로인해 각 문헌에 실려 있는 내용들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들이 떨어지고 있다.

2) 이 사건에 대한 몇 가지의 의문점 

1) 강순현 씨의 증언 관련

다음의 글은 강순현의 증언 내용이다. 개인적인 인쇄물을 부탁하러 신문사에 갔다가 인쇄 장면을 목격했다는 한 증언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① 오전 11시경 칠성로 제주신보사 윤전실로 갔더니 김호진 편집국장과 직원 몇 명이 무언가를 열심히 인쇄하고 있었습니다. ② 두 종류인데 하나는‘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또 하나는 ‘혁명군사령관 이덕구’의 명의로 된 삐라였습니다. 난 깜짝 놀라 “자네 목숨이 몇 개라도 되나?”하고 만류했지만, 김호진은 “산군들의 부탁이야”라며 대담하게 인쇄를 계속 했습니다. ③ 신문사 윤전실은 서북청년단 사무실과도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입니다(姜淳現의 증언).

밑줄 친 ①번 내용과 관련, 가장 의문시 되는 것은 개인적인 인쇄물을 신문사에서 아무 때나 인쇄해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제주신보사의 주요 임원 가운데 한분인 백찬석씨는 인쇄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인쇄사 사장들은 신문사에서 외간물을 인쇄하는 것을 적극 반대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강순현씨는 개인적인 인쇄물을 부탁하러 윤전실로 갔다가, 우연히 김호진 국장 등이 두 종류의 삐라를 인쇄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제주신보사의 윤전실 직원들이 나와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들어갔다는 것이 된다. 직원들이 나와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신문을 발행하는 요일이라서 아니면 인쇄기의 돌아가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서인가, 이것도 아니면 믿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윤전실로 직행했다가 우연히 삐라를 인쇄하는 것을 본 것인가?

당시 제주신보는 이틀에 한번 발행하는 격일간지였다. 신문사에서 삐라를 인쇄한다면, 기자와 직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신문발행일이 아닌 휴일에 그것도 인쇄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밤에 몰래 인쇄했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삐라를 그것도 대낮에 공장문도 걸어 잠그지 않은 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대놓고 인쇄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쇄단가가 상대적으로 비싼 신문사에서 개인적인 책자나 잡지, 문서, 서류 등을 인쇄를 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② 번 내용과 관련: 김호진 등이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의 명의로 된 두 종류의 삐라를 인쇄해주었다는 것은 여러 문헌을 통해 잘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혁명군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된 삐라도 있었다는 것은 강씨의 증언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이 삐라의 존재를 두 번째로 언급한 것은 제주일보의 기사다(제주일보, 1999년 11월 3일, 6면).

제주일보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김호진 편집국장이 빨치산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공장장과 문선공 몇몇이서 10월 24일 오전 제주신보에서 ‘인민군사령관과 혁명군사령관 명의’로 된 두 종류의 삐라를 인쇄했다는 것이었다.

여러 문헌을 읽어보았지만,‘혁명군 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에 관한 기록은 이외에 더 이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에 관한 기록이 이것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이 삐라는 존재하지 않거나 인쇄도중에 발칵되어 뿌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혁명군사령관 이덕구라는 직함이 나와 있는 자료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명칭이 나오게 된 배경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고재우의 저서를 보면  1948년 8월 위원장 강규찬과 군사부장(인민군사령관) 김달삼이 월북함에 따라 그해 10월 24일 <남로당 제주도당 구국투쟁위회>는 제주읍 월평리에서 회합하여 그 명칭을 <혁명투쟁위원회>로 바꾸고, 그동안 공석으로 남겨두었던 위원장에 김용관, 군사령관에 이덕구를 선임하고 9연대 탈주병들을 기용하여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고재우, 1998, 38쪽; 김영중, 2011, 33쪽).

이를 근거로 추측해보면 ‘남로당 제주도당 구국투쟁위원회’는 10월 24일 간부회의에서 ‘혁명투쟁위원회’로 개편했기 때문에 이렇게 개편된 조직의 새로운 명칭도 알릴 겸 두 개의 명칭이 들어간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근거로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강순현씨가‘혁명군 사령관 이덕구’명의의 삐라를 인쇄하는 것을 본 날은 10월 24일이 지난 어느 날  오전 11시경이  된다. 이 가정이 맞는다면, 지금까지 여러 문헌들이 줄곧 주장해 온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삐라 살포 설은 대폭 수정되어야 한다. 

③번과 관련하여 강순현씨의 증언처럼 당시 신문사는 서북청년단 사무실로부터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1) 제주신보사는 현재 제주시 일도1동 1377-1(칠성로길 14)번지에 있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하이파이 OA가구총판’ 국제금고 대리점이 입주해 있다
2) 서북청년회의 본부는 현재 ‘내셔널지오 그래픽’ 제주점 2층에 입주해 있었다.
3) 두 건물은 칠성통 길을 가운데 두고 약 20m정도 서로 떨어져 있다 
4) 당시 제주신보사의 인쇄기는 활판 인쇄기이었다. 신문을 찍기 시작하면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즉“철거떡 철거떡”하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최소한 20-30m 밖에 까지 들린다.(註: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서 문의 결과).
5) 신문을 찍는 소리는 20m 정도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북청년회 본부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서북청년회는 4ㆍ3당시 살인 폭행 강간 등 가장 악랄한 악행을 도맡아 했다는 우익의 대표적인 단체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가장 악랄했던 사찰기구가 신문사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항시 지켜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불온 삐라를 인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이와 관련된 주인공들이 전부 처형당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왜 그런 일을 했냐고 물어 볼 수가 없다. 

2) 삐라의 인쇄 관련 

이 삐라를 신문사 윤전기(이것은 잘못된 주장, 당시는 활판인쇄기 사용)로 인쇄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어떻게 신문이 만들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활판인쇄기를 이용한 신문의 발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기자들이 쓴 기사 원고(보통 100자 원고지)가 문선부로 넘어간다.
② 문선부에서는 원고의 내용대로 활자 하나하나를 뽑아서 문선용 홈판에 배열시킨다.
③ 조판부에서는 문선부에서 넘어 온 뽑아 놓은 활자를 각 지면의 편집 메모에 맞게 조판을 한다. 
④ 그 다음은 조판된 활자위에 잉크나 먹물을 바른 후에 그에 종이를 놓고 교정쇄를 찍어낸다. 
⑤ 각 면의 교열교정이 끝나면 대장지에 각 면 편집 책임자와 편집국장의 OK사인을 한다.
⑥ 편집국장 OK사인이 떨어지면, 제판한 것을 활판 인쇄기에 고정시켜서 인쇄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 따르면 간단한 한 장짜리 삐라이지만, 비밀히 목숨을 걸고 협조해줄 최소한 문선과 조판 전문가(제판)가 있어야 삐라를 인쇄할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걸쳐야 하는 신문사 활판인쇄기를 이용해 삐라를 인쇄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문시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2백자 원고지로 환산하면 대략 4매 정도 밖에 안 되는 호소문(543자)과 포고문(252자)의 분량이면 당시 선전부가 소유하고 있던 가리방 등사기로 인쇄해도 반나절 정도면 천장 이상은 충분히 찍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당 선전부 또는 무장대에서는 이덕구 명의의 호소문이나 포고문 정도는 필요하면 늘 인쇄하여 배포할 수 있는 장비와 인력을 구비하고 있었음에도 왜 굳이 복잡한 과정을 걸치는 신문사 인쇄기를 이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3) 왜 이 삐라를 보았다는 사람들은 없는가?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 명의의 대정부 선전포고문과 군과 경찰에 보내는 호소문이 제주읍내 곳곳에 뿌려졌다고 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일반시민과 당시 경찰관들 가운데 이를 주어서 보았다는 증인이 있는가? 아직까지는 찾을 수가 없다. 각종 문헌과 미군의 각종 정보보고서에도 제주읍내에 대량으로 살포되었다고 하는 이 삐라에 관한 기록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8월 15일 수립된 이승만정부에 대항해 남로당 제주도당 또는 무장대가 인민군 총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된 선전포고문을 대량으로 읍내에 살포했다고 하면, 군경토벌대와 미군을 초긴장시키는 사건에 속한다. 그리고 이를  인쇄해준 범인이 도내의 유일한 신문사의 편집국장이고 그가 붙잡혔다고 한다면 더 큰 뉴스거리가 된다. 그런데 20여개에 달하는 중앙일간지의 기사를 검색해 본 결과, 이에 관한 단 한 줄의 기사도 찾아볼 수가 없고, 이에 관한 정보가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올라있지 않다는 것은 의혹의 대상이 된다. 

이 삐라가 “대량으로 살포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4) 엇갈리는 주장들 가운데 하나

1997년에 출간된 ‘4·3 은 말한다’④에 따르면, 최두길씨가 탁성록 대위와 강현 서청 정보부장에 의해 계엄사령부 천막수용소에 잡혀 들어간 것은 11월 중순경이다(192쪽). 그리고 김호진 국장은 최씨보다 일주일 정도 뒤에 잡혀 들어갔다.

김호진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최두길씨가 김호진 국장에게 잡혀온 경위를 먼저 물으니 “선전포고문을 인쇄한 후 입산하다가 관음사 부근에서 포위망에 걸려 잡혔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되어있다(192쪽).

2년 뒤에 똑 같은 취재원의 말을 인용했다는 제주일보의 기획 기사에 따르면 김호진 편집국장이 농업학교 임시 수용소 천막에 수감된 것은 10월 말경이다. 또 최씨는 그에게 잡혀온 동기를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스스로 “산군(빨치산)들의 부탁으로 신문사에서 삐라를 인쇄해주고 산에 오르려다 관음사 절터에서 잡혔어”라고 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제주일보, 1999년 11월 3일, 6면).

이 두 개의 기사 중에 하나는 완전 거짓을 보도하고 있다. 만약에 후자의 서술이 거짓으로 판명이 날 경우, 이것은 4·3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온 <제민일보 4·3 취재반>의 노력을 왜곡하고 더럽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우선 ‘4·3은 말한다’④권에 실린 내용부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호진과 절친한 친구였다는 한 증언자(최두길; 崔吉斗)는 이렇게 말했다(170-171쪽).
 
내가 탁성록 대위에게 끌려온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김호진이 같은 천막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나보다 2살 아래였지만 서로 문학을 하는 데다 사람됨이 좋아서 매우 친밀한 사이였지요. … 잡혀온 경위를 물으니 “‘선전포고문’을 인쇄한 후 입산하다가 관음사 부근에서 포위망에 걸려 잡혔다”라고 말하더군요(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71쪽).

최길두씨는 자신이 계엄사령부에 끌려간 시기와  당시 천막수용소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192쪽)

난 11월 중순경 관재처에 근무하던 중 탁성록 대위와 강현 서청 정보부장에 의해 끌려갔어요. 그전에 이관석 교장이 학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또한 해주대회에 참석키 위해 김달삼과 함께 월북한 고진희의 동생 고봉효(당시 28세)가 처형당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이하 중략> 그런데 무장대 삐라를 인쇄한 혐의로 잡혀온 김호진 편집국장은 나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어요. 그러나 그땐 그가 내 곁에 가까이 오는 걸 꺼렸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와 나를 연관시킬까봐 전전긍긍한 것이지요. 죽음의 공포를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제주일보 기획기사에는 이 내용을 다음과 보도하고 있다(돌아본 제주 20세기 <39>.제주일보, 1999년 11월 3일, 6면).

<……> 10월 말의 어느 날 대낮, 조그마한 체구의 한 남자가 그 같은 정적을 깨며 군화 발에 차이는 처참한 모습으로 농업학교 임시 수용소의 천막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그를 끌고 온 군인이 “이 자식 네가 제주신보사 주필이야”하고 소리를 찌르고 나갔다. 그는 제주신문(당시 제주신보)의 편집국장 김호진이었다. 그에게는 빨치산의 삐라를 인쇄해 제주읍내에 뿌렸다는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워져 있어서인지 어느 누구도 그를 아는 체 하지 않았다. …… 최씨는 “그는 나에게 아는 체했지만 나는 살기위해 그를 꺼렸다. 죽음의 벼랑 앞에선 그토록 친한 친구도 안중에 없었던 짐승같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최씨는 “그는 산군(빨치산)들의 부탁으로 신문사에서 삐라를 인쇄해주고 산에 오르려다 관음사 절터에서 잡혔어”라며 “내가 묻지도 않은 것을 스스로 말했다”고 기억했다.

언론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중 하나는 커턴 뒤에 가려진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어느 정도 잘 수행하고 있는지 각 언론과 사가들은 자신을 점거하며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고영철 언론개혁제주시민포럼 대표,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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