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74. 한림화, ‘The Islander’, 한그루, 2020.

한림화, ‘The Islander’, 한그루, 2020. 출처=알라딘.
한림화, ‘The Islander’, 한그루, 2020. 출처=알라딘.

1.
책 표지에 시선이 한참 사로잡혔다. 표지 디자인은 단촐하다.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제주도와 그 위에 놓인 한 송이 동백꽃이 피어 있는 가지 하나가 전부다. 검정색과 흰색이 주조를 이루는 바다와 섬, 그리고 섬 위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선홍색의 동백꽃으로 어우러진 이미지의 책 표지는 ‘바람섬이 전하는 이야기’란 책의 부제목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준다. 여기에는 과작(寡作)의 작가 한림화(1950~)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림화가 《The Islander》에서 들려주고 싶은 ‘바람섬이 전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들려주고 있을까.

2.
《The Islander》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제주어를 아주 중요한 표현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제주의 지역성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한 창작의 고육지책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 짧은 지면에서 이에 대한 제주문학의 도정과 그 성취를 상세히 언급할 수 없지만, 제주문학에서 힘겹게 일궈내고 있는 제주어의 미적 성취와 그 문학적 가치를 결코 폄훼할 수 없다. 하지만 뚜렷이 해두고 싶은 것은 제주어를 무작정 활용한다고 해서 제주문학으로서 ‘좋은 문학’의 가치가 절로 보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토착주의에 대한 맹신과 타지역에 대한 배타주의가 버무려지면서 특정 지역주의가 고착되는, 그래서 자칫 제주중심주의로 자기구속되는 폐쇄적 지역문학 내지 고리타분한 향토문학의 미망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점을 두루 생각해볼 때, 한림화의 《The Islander》가 거둔 문학적 성취는 주목되어야 한다. 특히 《The Islander》의 ‘글머리에서’ 작가가 “‘제주 섬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 긴 시간, 어쩌면 나의 온 생애가 필요했다”고 고백하듯, 12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는 70여년을 살아온 작가 한림화의 ‘제주 섬사람’에 대한 간절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의 세목은 각양각색이되,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의 밑자리에는 “무사 경 탁 터놩 말 곧기가 힘든디사…”(254쪽; “왜 그렇게 탁 터놓고 말하기가 힘들었는지…”)에 녹아들어 있는, 이루 다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제주 사람들과 함께 한 역사와 일상의 간난신고에 대한 기억의 투쟁을 간과해서 곤란하다.

한림화는 이 기억의 투쟁을 구술서사의 방식으로써 실행하고 있다. 한림화의 구술서사에서 눈여겨볼 것은 제주 여성의 주체적 시선이다. 《The Islander》가 제주의 역사와 삶의 풍정에 대한 구술서사를 적극화한 기록으로 손색이 없는바, 이 기록의 대상은 제주 섬사람들을 망라하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은 제주 여성의 삶이 본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3.
먼저, <그 허벅을 게무로사>를 주목해보자. 이 작품에는 여성 3대가 주인공이다. 타향에서 십여 년을 살다가 잠시 고향 제주를 방문한 손녀는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3대가 함께 ‘물구덕’을 지고 산전(山田)밭에 오줌거름을 주러 간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오랜 세월 제주의 일상 풍습에서 ‘물구덕’을 지는 데 익숙해 있지만, 시쳇말로 현대여성인 손녀는 ‘물구덕’을 지는 게 몹시 낯선 데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손녀가 제주 태생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식 상수도 시설이 잘 갖춰진 시기에 애오라지 ‘물구덕’을 힘겹게 예전처럼 질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녀는 ‘물구덕’을 지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뒤를 따라나선다. 그리고 손녀는 할머니가 자신을 4.3 때 희생을 당한 할머니의 막내딸로 잘못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으며 4.3의 참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는 지금, 이곳에서도 4.3의 그 순간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90을 넘은 노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무슨 환타지게임에 등장하는 여전사(女戰士) 같기도 하고 신화 속의 설문대 여신 같기도”(17쪽)한 것처럼 “기어코 간장 허벅을 산에 가져가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듯”(18쪽)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여기서, 할머니의 이 결연한 의지를 4.3의 트라우마에 기인한 치매로만 간주할 수 없다. 정작 우리가 읽어야 할 행간의 진실은 할머니의 이 병리학적 치매 질환으로 환기되는 4.3의 피해상이 아니라, 4.3을 일으킨 무장대는 물론, 무자비한 국가폭력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제주 사람들이 한라산에서의 생존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 중 하나가 흡사 소금 역할을 맡는 ‘간장’을 갖다주는 일의 막중함이다. 이렇게 할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 즉 당시 군경의 소개령에도 불구하고 산사람들의 투쟁과 생존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간장’을 산사람들에게 갖다주기 위한 ‘물구덕’ 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 짧은 소품이 본격적인 4.3문학에서는 살짝 비껴나 있지만, 할머니의 ‘물구덕’과 연관된 치매에 얽힌 사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제주 여성의 숱한 일상이 4.3문학에서 소홀히 다뤄진 부분을 좀 더 내밀히 살펴볼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한국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성찰과 갱신의 문제의식으로까지 심화 확산될 수 있다. 가령, <그 허벅을 게무로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머니는 할머니의 4.3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말에 다음과 같은 맞장구를 친다. 

“게무로사 난 오줌허벅 지곡 어머님은 곤장허벅 지곡 족은년은 가당 목 마르민 마실 물대바가지 지곡 무사 못 갑니까 게. 낼도 나사 보게 마씀.”
(아무려면 난 오줌허벅 지고 어머니는 간장허벅 지고 막내는 가다가 목 마르면 마실 물대바가지 지고 왜 못 갑니까. 내일도 나서 봐요.)

- 《The Islander》, <그 허벅을 게무로사> 가운데  18쪽.

어머니의 이 맞장구에는 척박한 제주의 자연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온갖 수난을 맹목적으로 인내하는 제주의 여성이 아니라 도리어 이 척박함을 제주 여성 특유의 생의 감각과 생명력으로 함께 살아가는 생의 위엄을 담대히 드러낸다. 그것은 어머니의 첫 어절 ‘게무로사’란 제주어에 응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체념‧회피‧묵인이 어우러진 부정적이고 환멸적인 생에 대한 어떤 낭패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중단된 것처럼 보이나, 끝내 중단하지 않고 다시 하던 것을 이어서 힘껏 한다는, 달리 말해 제주 여성의 주체적 의지로서 기어코 일을 해내는, 단속(斷續)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게무로사’에 담긴 제주 여성의 생의 위엄은 작가 한림화의 구술서사에서 자연스레 전달되고 있다.

4.
《The Islander》에서 제주 여성의 구술서사는 <보리개역에 원수져신가 몰라도>에서 책장을 덮고 눈감은 후 쉽게 가시지 않은 몇 장면을 각인시켜준다. 이 작품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국가권력이 4.3 무렵 가한 국가폭력을 섬사람들에게 반복하는, 그래서 4.3 연좌제에 의해 무고한 사람이 붙잡혀 정방폭포에서 집단 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눈에 밟히는 것은 세 장면이다. 첫째, 제주의 풍습으로 미숫가루를 만드는, 다시 말해 ‘개역’을 만드는 과정에서 ‘고레 가는 소리(맷돌 가는 소리)’를 부르며 일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맷돌을 돌리며 ‘개역’을 만드는 이유는 국가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숨어 있던 아들이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시원한 생수에 ‘개역’을 탄 한 사발을 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머니의 이런 소박한 염원은 깨지고 만다. 둘째 장면이 바로 이 물거품이 되는 장면으로, 아들이 ‘개역사발’을 입에 댄 순간 체포된다. 그때 어머니는 “저 개역 한 모금 들이싸건 예, 아이 어디 돌아나지 안 헙니다.(저 미숫가루 한 모금 들이켜거든요, 아이 어디 도망가지 않습니다.)”(70쪽)란 애타는 말만 할 뿐이다. 얼마나 애타게 아들을 기다리며 정성스레 만든 ‘개역’인가. 전쟁 중인 상황에서 그것도 4.3의 화마(火魔)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상황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모정은 시원한 ‘개역’ 한 사발을 마시도록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 국가권력은 이 소박한 모정마저 불순한 것으로 치부한 나머지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체포된 아들은 그렇게 붙들린 사람들과 함께 정방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집단 학살에 놓인다. 아들은 정방폭포의 비류직하(飛流直下)에 온몸이 내맡겨진 채 “나풀나풀 나비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물보라에 싸여 떨어지기 시작했다.”(72쪽) 그렇게 폭포로 떨어지기 전 아들은 “어멍! 그 개역 정말, 시원하….(어머니! 그 미숫가로, 정말 시원하….)”(66쪽)란 말을 남긴다. 물론, 아들은 어머니의 ‘개역’ 한 사발을 다 마시지 못한 채 붙들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원한이 맺혀 있다. 이 죽음을 맞이한 절체절명의 순간 아들은 어머니가 준비한 시원한 생수에 탄 ‘개역’ 한 모금의 청량한 맛이 전신에 퍼지는 그 감각과 전율의 기억을 지닌 채 생의 마지막 경계를 넘는다. 이렇게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어머니는 폭포의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아들의 손을 찰나 붙잡는다: “어미가 되고서 아들 입에 시원한 ‘개역’ 한 모금 먹이지 못한 게 한으로 가슴에 맺히지만 어찌하랴.”(73쪽) 이것이 바로 내가 주목하는 셋째 장면이다. 사실, 이 세 장면은 <보리개역에 원수져신가 몰라도>에 나오는 개별 장면이되, 제주의 역사에서 이 세 장면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를 넘어 제주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두루 목도되는 섬사람들의 삶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어머니, 즉 제주 여성의 주체적 시선이 이들 세 장면에서 비극성을 포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참담한 역사의 현장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생의 위엄을 섬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5.
《The Islander》에는 이처럼 제주의 역사 속에서 섬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그 생생한 실감을 제주어의 미감을 자연스레 살려내면서 섬의 풍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작중인물 ‘못 뱅뒤 쇠구신’의 희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제주의 목자(牧者), 테우리에 대한 풍요로운 이야기들(<하늘에 오른 테우리>), 제주의 자연생태를 헤치지 않으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냥하는 풍습(모둠사냥) 속에서 다섯 살밖에 안 된 여자 어린이를 사냥 지휘자가 사냥에 동참하도록 하는 이야기(<눈 우읫 사농바치>), 제주의 전통적인 ‘돗걸름(돼지거름)’을 내는 풍경 속에서 성찰하는 제주의 생태문화 관련 이야기(<돗걸름이 제주섬에 엇어시민>), 일제 강점기 남양군도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한 작중인물 ‘행선이 할망’의 반제국주의에 대한 기억투쟁 이야기(<평지눈몰이 지름논몰인거 세상이 다 알지 못헤신가?>), 그리고 한국전쟁 도중 모슬포 수용소에서 중공군 포로 생활을 하며 제주의 한 소녀가 준 ‘지슬(감자)’ 때문에 목숨을 연명한 중국인은, 그 ‘지슬’을 소녀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아름답고도 ‘웃픈’ 기억(<메께라! 지슬이?>) 등속은 이 책의 부제목인 ‘바람섬이 전하는 이야기’의 이야기성을 보증한다. 이처럼 《The Islander》에는 사전에 등재 보존되는 것에 자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박물관과 풍속지에 기록되는 것으로 자족해서는 안 될 제주어와 이야기들, 그리고 제주의 역사 및 풍속에 대한 원로 작가 한림화의 제주에 대한 사랑의 숨결이 휘감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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