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3) / 제주시 애월읍 ‘그리고 서점’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 고봉선 시인이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시인을 통해 듣습니다. [편집자 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내가 어릴 때 부모님께선 “과납”이라고 불렀다. 알려진 바로는, 이곳에 사람이 머물기 시작한 건 1300년 경(고려 충렬왕)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을을 이루며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건너편 금악봉 때문이라고 여겼다. ‘납읍’, 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금산공원. 사람들은 돌무더기뿐인 이곳에 나무를 심었다. 금악봉을 가리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액막이로 나무를 심은 것이다. 물론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때 심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어서 1993년 8월 19일에는 천연기념물 제375호로 지정되었다. 애월문학회에서 총무로 있을 때, 선인들이 글을 짓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는 송석대에서 시낭송 행사가 있었다, 그때 만난 후박나무를 잊을 수 없다.

송석대(松石臺) 후박나무 / 고봉선

이곳에 오백 년을 터 잡고 살았네요 
간신히 외과술로 목숨 건진 후박나무 
삭신이 쑤신다나요, 등허리를 굽힌다

오늘만은 모기에 물려도 좋다네요
장르별 나무들이 둘러앉은 금산공원
등 굽은 후박나무가 설화 낭송하네요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금산공원 내 송석대(松石臺) 후박나무. 오랜 세월을 견디었다는 듯 수술 자국 위로 콩짜개난이 뻗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아마 꽃들도 제각각 소원 하나쯤은 있겠지. 그렇다면 이 녀석은 새가 되어 지저귀고 싶은 게다. 아니지, 저 어여쁜 옷을 입고 조잘대는 부리를 보면, 책 읽는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앙탈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상가리 교차로를 지나며 골목길로 우회전했다. 감귤창고였던 듯싶은 건물 벽에 ‘이음 문방구’란 글자가 보인다. ‘서점이 아니라 문방구?’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췄다. 그곳 입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간판, ‘그리고 서점’을 만날 수 있었다. 세이지 몇 송이가 새인 듯 아이인 듯, 어서 오라고 반기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서점 앞에 핀 핫립세이지. 지저귀는 새처럼 조잘대는 아이처럼 달려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그리고’와 ‘이음’, ‘너 그리고 나, 우리 그리고 너희, 사람 그리고 자연, 농촌 그리고 도시, 어른 그리고 아이…….’ 보다시피 앞과 뒤의 ‘이음’ 자리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처럼 접속어 ‘그리고’가 있다. 이처럼 ‘이음’과 ‘그리고’가 손에 손을 잡고 오순도순 어린이들의 꿈을 키워가는 곳,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그리고 서점’ 책방지기 정현덕 씨를 만났다.

“커피를 드릴까요, 주스를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습관처럼 “커피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예상하는 커피는,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는다던가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으면 그만인 손쉬운 커피였다. 그런데 아니다. 책방지기가 커피 메이커를 챙기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짙은 향이 번진다. 잠시 후,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책방지기와 마주 앉았다. 

“온몸이 저릿하다”
“어릴 때 꿈이 서점 주인이었습니다.” 아, 책꽃이 있다면 아마 책방지기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커피 향과 책방지기의 음성이 어우러지는 순간 온몸이 저릿했다. 책방지기의 이 한 마디에서, 꿈이란 얼마나 애틋한 존재인가도 알 수 있었다. 차분하고도 잔잔한 음성이 책꽃의 향기인 양 다가오며 내 몸을 휘감았다. 이내 귓바퀴가 팽팽하게 조여왔다. 

책이 좋았던 정현덕 씨, 그는 어려서부터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신의 손길이었던가. 10여 년 전, 그는 제주도에서 2년을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 정현덕 씨를 사로잡은 제주도, 그 매력을 잊을 수 없다. 정착해야 할 곳은 정해진 셈이었다. 문제는 ‘때’다

꿈이란 녀석은 아름다우면서도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마주치겠지. 그 언젠가를 위해 정현덕 씨는 야간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목표가 확실한 만큼, 우선 사서 자격증을 땄다. 독서심리상담사 자격증도 땄다. 대도시 서점을 꿈꾼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생각이었기 때문에 귀농학교도 다녔다. 이렇듯 정현덕 씨는 회사에 다니면서 차곡차곡 꿈의 터전을 닦았다. 2016년 3월, 딸의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고향 진주를 떠났다. 제주도의 품에 안긴 것이다. 부산에 있었던 직장과도 안녕을 고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이음 문방구’와 함께하는 ‘그리고 서점’ 간판이 겸손한 모습으로 놓여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 다시 올지도”
‘그리고 서점’을 이야기하자면, 애월교육협동조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애월교육협동조합은 2016년 안재홍 이사장의 이주에서 시작된다. 제주 여행 중 납읍리에 매료된 그가 이주했을 때, 납읍리 교육 환경은 허허벌판이었다. 학교 말고는 배울 곳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안재홍 이사장은, 이 마을 다섯 가족과 함께 납읍리사무소 공간에서 애월교육협동조합 ‘이음’을 출범했다. 다시 2017년, 감귤창고였던 이곳에서 개소식 했다.

왜일까, 불현듯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사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머지않아 다시 개천에서 용이 나올 것만 같은 예감, 애월교육협동조합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출발한 ‘이음’은 납읍리 교육 터전을 연둣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다시, ‘그리고 서점’과 손을 잡으며 점점 더 선명한 초록의 빛을 띠어 갔다. 금산공원이 밀림을 이룬 것처럼, 납읍리 교육 환경 또한 밀림을 이뤄가는 중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자투리 시간을 모아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했다는 책방지기 정현덕 씨가 드립커피를 내리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찾아가다”
제주로 이주하기 전, 정현덕 씨는 한국야쿠르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먹고살 만했다는 뜻이다. 먹고살 만하다고 해서 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늘 허전했다. 자꾸만 뒤를 따라다니는 소리, ‘꿈을 찾아가지 않을래?’

하지만 그 꿈이란 녀석은 어디에 있는지 감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감나무 아래 누워 입을 벌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내면 저 깊숙이에서 잠자는 꿈을 깨워야 했다. 책방지기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찾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3박 4일 동안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꿈벗’ 프로그램에 첨벙 뛰어들었다.

3박 4일 동안의 단식과 함께 정현덕 씨는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애써 외면해오던 꿈의 욕망은 여물대로 여문 씨앗이 되어, 이제나저제나 꼬투리에서 튀어 나갈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책방지기를 향해 손짓하는 동아줄도 보였다. 그 끝에 무언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서점이었다. 하지만 정현덕 씨는 선뜻 그 줄을 잡을 수 없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년 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꿈벗’ 여행에서 돌아온 뒤, 정현덕 씨는 3년을 꿈에 취해 살았다. 취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도로 현실, 취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자칫, 공상이나 망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결론은, 평생을 직장에 묶여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꿈틀, 그의 의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있을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었다. 기껏 찾았는데 불이 켜지지 않는다면? 낭패다. ‘무엇을 할 것인가?’, 호흡을 고르며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마침내 스위치가 잡혔다. 눌렀다. 딸깍,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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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에는 ‘제주 책방 올레 버스’ 안내와 ‘심야 책방’ 안내 광고가 붙어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조합원이 되다”
15년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정현덕 씨는 명품인 꿈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책임감, 두려움과 고마움이 혼재하는 감정은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잡다함이라 여기며, 탈곡기가 낟알을 털어내듯 탈탈탈 털어냈다. 꿈을 향한 욕망엔 거름종이도 필요 없었다. 

책방지기 정현덕 씨가 사는 곳은 납읍리 이웃인 봉성리다. 딸이 ‘이음’에서 댄스와 바둑을 배우게 되며, 그도 자연스레 ‘이음’을 오가게 되었다. 그렇게 오가는 중, ‘이음’을 경계 없는 마을 학교, 모두의 공교육 공간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라는 이사장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정현덕 씨는 두 번째 조합원을 모집할 때 기꺼이 가입하였다. ‘이음’에서  정현덕 씨와 안재홍 이사장의 만남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 ‘이음’에선, 조합원이면 누구나 ‘이음’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2층에는 보호자나 동행인이 이용할 수 있는 ‘이음 작은 도서관’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시간에만 가능했다. 낮에는 ‘이음’의 공간을 활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부족함을, 사서 자격증과 독서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지닌 정현덕 씨가 채우게 되었다. ‘이음’ 한쪽에서 서점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2018년 11월이었다. 

“서점 주인이 되다”
드디어 정현덕 씨는 책방지기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서점 주인이 된 것이다. 이는 애월교육협동조합 조합원들에게도 그 자녀들에게도 모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책방지기는 겸손했다. 서점을 수익의 도구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어릴 적 꿈이었던 서점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벅찼다. 게다가 아이들의 꿈을 키워줄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이음’을 이용하는 정조합원과 100여 가족 준 조합원들이 자연스레 서점을 이용하게 되었다. 

작은 서점, 그래서 책방지기는 더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행복해서, ‘다음’이나 ‘네이버’에 등록할 생각도 못 했다. 2019년 2월, 드디어 ‘그리고 서점’도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인터넷이며 SNS 홍보가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이제 서점을 찾는 손님의 70~80%는 관광객이 되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책방지기의 독서 프로젝트를 알리는 배너.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지기만의 전략”
신화월드와 도서관이 있으면 주저 없이 도서관을 택하는 딸의 아빠 정현덕 씨. ‘그리고 서점’의 시작은, 자신이 읽고 좋았기에 소개하고 싶었던 책 200여 권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은 1,600여 권을 넘어섰다. 때로는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베스트셀러로 입고도 해 봤다. 그런데 이상하다. 잘 팔릴 것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팔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책방지기가 읽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는 책은 추천도 적극적일 수 없었다. 온라인에서 터치 한 번이면 되는 책을 굳이 이곳까지 와서 고객들이 찾을 이유도 없었다. 한정된 공간, 책방지기는 큐레이션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다. 자신이 재밌게 읽고 감동했던 책을 중심으로 꾸렸다. 아니나 다를까, 고객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더불어 책이 주는 즐거움, 위안, 행복도 누리게 되었다.

자투리 시간을 모아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한 책방지기 정현덕 씨. 손님이 오면 그는 바리스타로 변한다. 바리스타의 솜씨가 돋보이는 커피와 함께 손님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진열된 책을 둘러보게 된다. 커피 한 잔이 주는 효과라고 할까, 커피 한 잔의 속도에 맞춰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멍석 위에 깔렸다. 자연스레 판매로 이어지는 확률도 높았다.

왔으나 그냥 가는 손님도 열이면 두 명 정도 있다. 여행이라는 멋에 취해 오는 사람도 있다. 책방 투어에서 도장을 찍으러 오는 분도 많다. 물론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로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차피 서점인 이상, 판매로 이어지면 더 큰 보람이다. 이들이 책을 구매하고 싶어지도록 하는 것 또한 책방지기의 몫이다. 하지만 책방지기는 극구 독서의 중요성을 말로 하지 않는다. 대신, 책에서 좋았던 구절이나 재미있었던 내용을 들려준다. 복사해서 나눠주기도 한다. 활자화된 글을 읽을 때 구매 의욕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말하면서 재미도 경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손님 중에는 ‘서점이 너무 좋다.’고 해 주시는 분이 꽤 많다. 그런가 하면, ‘이것도 서점이냐?’라며 찬바람을 몰고 오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땐 썩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책방지기는 괜찮단다. ‘아, 맘에 드는 책이 없나 보다. 조금 더 고객의 취향을 연구하고 개선해야겠구나.’ 할 뿐,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방지기 역시 서점 탐험을 많이 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사고 싶은 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간단했다. 그들에겐 주제와 큐레이션이 맞는 책방을 소개하기도 한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지역 고객도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도, 프로그램 이용자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금야금 알려지다 보니, 시내에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분들이 종종 계시다. 책방지기가 힘이 나는 이유다.

다른 서점과 차별화되는 책방지기만의 전략은, 구본형 작가의 책만 진열한 판매대다. 구본형 작가는 정현덕 씨의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기 때문이다. 책방지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본형 작가가 스승이 되리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개인 대학도, 정현덕 씨가 글을 쓰고 변화를 희망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구본형 작가가 떠난 지금, 연구소는 제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당연히 이곳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출신 작가들의 책도 함께 진열하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이음’ 내부 한쪽에 놓인 서점의 책들. 왼쪽 구석이 구본형 작가만을 위한 판매대다. 드립커피를 내리는 동안 책방지기가 커피잔을 갖다 놓았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기억에 남는 손님”
‘그리고 서점’이 탄생하고 2년 가까이, 기억에 남는 고객이 충분히 있을 만한 시간이다. 책방지기는 최근의 고객 두 명 중, 서울에서 다녀갔다는 청년 이야기부터 들려주었다.

혼자 책방을 찾아온 청년은 서점을 둘러보다가, 정혜진 국선 변호사의 책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책을 펼치더니 움직일 줄 몰랐다. 이 또한 인연이었던가. 마침 이튿날 저녁엔 정혜진 변호사의 강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책방지기는 그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는 듯, 꼭 오겠노라며 청년은 떠났다. 이튿날 강연회에 참석한 청년은, 누구보다 질문도 많이 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강연회를 마치고, 책방지기는 청년을 게스트 하우스로 데려다주게 되었다. 그렇게 책방지기는 청년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청년은 부모의 지도 아래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자사고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교육학과를 다니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된 청년, 청년은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가?’, 시간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입대를 결심했다. 여백의 시간을 붙잡고 청년은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에서 책방지기 정현덕 씨를 만났다.

대학에 진학하고,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터, 엘리트 코스를 거쳐 온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끝을 봐야 알겠지만, 출세 가도를 따라 달려온 길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기도 쉽지 않다. 성적과 명예를 선택하며 살아온 길, 하물며 명문대일 경우 그 길을 버리기는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변했다. 기성세대가 인정하는 출세보다는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많아지는 까닭이다. 기성세대의 의식 앞에서 자신을 희생해 왔던 사람들, 청년도 더 늦기 전에 자신의 길을 찾고자 휴학했을지도 모른다. 청년이 책방지기를 만난 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숙소로 가는 동안 청년은, 의식에 서려 있던 뿌연 안개를 말끔하게 걷어냈을 것이다. 우연이라기보다 행운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행복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즉 자신이 가진 끼를 발휘하며 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살아갈 때 사회나 개인 모두에게 이익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자 디딤돌이 되어주는 이들이 작은 서점 책방지기라는 사실,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이들은 단지 책을 파는 것이 아니었다. 앞이 캄캄한 자들에게 의식의 눈을 뜨게 해주고 있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2층 ‘이음 작은 도서관’에서는 책도 읽고 다양한 놀이도 즐길 수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다음은 도내 손님이다. 어느 날, 40대 후반쯤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 남자는 도움 될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였다.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책이라는 게 개인차가 있다 보니, 성향이 다르면 추천도 소용없게 된다. 게다가 그 남자는, 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좀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작가가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내용을 그대로 담은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함께 책방지기는 성장소설 한 권을 더 추천했다.

얼마 후, 남자는 다시 책방을 찾아왔다. “너무 위안이 되었다, 좋았다, 고맙다.”라고 하면서 조그만 선물까지 사 오셨다. 다행이다. 책방지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졸이던 나도 막힌 숨을 풀었다. 40대 후반, 삶의 굴곡을 따라 앞만 보고 달렸으리라. 허구한 날을 술로 달랬을 수도 있었을 터, 그런 그가 책방지기를 만나면서 심 봉사 눈을 뜨듯 의식의 눈을 뜰 수 있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닐 수 있을까. 그 손님은 이제 정기적으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등 책이 주는 재미에 푹 빠졌다. 고객의 사연을 들려주는 책방지기의 얼굴에서 말간 미소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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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 안에는 ‘이음’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활동 모습이 붙어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다양한 프로그램”
애월교육협동조합 ‘이음’의 프로그램은 조합원 회의에서 정한다. 상반기는 코로나19로 쉬었고, 6월 이후 프로그램은 가야금⸱뮤지컬⸱바둑⸱한국무용⸱중국어 등으로 구성하였다. 1주일에 한 번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전문 강사를 모시고 진행한다.

애월교육협동조합 ‘이음’에서는 심야 책방, 동네 책방, 문화 사랑방 등 여러 행사도 열린다. 주로 저자의 북 토크가 열리는데, 지금까지 20회 가까이 진행되었다. 봉사로 해주시는 분도 계시다. 하지만 작가를 초청하면 강의료는 물론 교통비라도 줘야 한다. 이런 행사들은 대부분 정부 지원 사업을 통해서 진행한다. 물결이 안에서 퍼지듯, 이런 행사와 함께 조합원들을 통해서 ‘그리고 서점’의 소문은 조용히 물 밖으로 퍼지고 있다.

이 외에도 책방지기 정현덕 씨가 스스로 진행하는 수업이 있다. 첫째는 글쓰기다. 책방지기는 책 한 권 출판을 목표로 ‘이음 기자단’을 창설했다. 그런데 의외의 효과를 얻게 되었다. ‘전국 청소년 세금 문예 작품 공모전’에서 모두 입상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은 습관 형성으로 변형되었다. 또 하나는 책 읽기다. 처음엔 삼국지 읽기로 시작했다.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 팀으로 나누었다. 세 나라 팀은 게임도 하고 퀴즈도 풀면서 책을 읽었다. 8회 정도 했더니 1회 완독이 되었다. 삼국지 완독 후 거머쥔 성취감과 함께 지금은 한국사를 읽고 있다. 마지막은, 독서록을 정리하는 것이다. 관심 분야의 책을 읽고, 독서록에 간단한 감상을 적어오면 책방지기는 포인트를 준다. 아이들은 받은 포인트로 문구류를 살 수 있다. 문구류는 서점의 책과 함께 진열돼 있다. 건물 벽에 박힌 간판이 ‘이음 문방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가 문방구다. 그런데 납읍리엔 문방구가 없다. 이런 사실이 안타까웠던 안재홍 이사장이 조치해 놓은 공간이다. 이사장과 책방지기의 철학엔 아이들과 교육, 책을 사랑하는 모습이 철철 넘쳤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은 소설책 읽기를 힘들어하는 젊은이가 많다. 그 이유가 내용을 이미지화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책방지기는 말한다. 나 역시 독서지도를 하다 보면, 이해력은 높아도 책이든 영화든 슬픈 내용이어도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아이가 있다. 공감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음’을 이용하는 아이들의 감성은 충만해 보였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웃 마을 담장 너머로 쭉 뻗은 칸나가 잘 가라고 인사하는 듯 손을 흔든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웃 마을에서 만난 칸나가 훤칠한 키에 쭉 뻗은 몸매로 손을 흔든다. 책방지기가 나를 찾아서 떠난 여행 ‘꿈벗’이나, 책방지기가 기억에 남는다던 청년, 40대 남성 모두 ‘새가 되기 위해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앞이 캄캄하신가요? 지금, ‘그리고 서점’을 찾아보세요.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책방지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동1길 12-1, 개방 시간은 월~금요일 10:30~15:30. 함께하는 곳은 http://instagram.com/and_bookshop입니다.

고봉선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

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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