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김헌범 논설위원·제주한라대 교수

‘소리 시선(視線)’은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쓰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매주 수요일 외에도 시시각각 벌어지는 주요 이슈에 대해선 비정기적으로 싣습니다.

일본의 ‘졸개’에 안주하는 세력의 여전한 힘을 과시한 올해 광복절 행사

제 발 저림

일흔 다섯 번째 광복절을 보냈다. 해마다 맞이하는 수많은 국경일 중 하나지만 올해는 유별히 분위기가 뜨거웠다. 밋밋한 ‘쉬는 날’로만 여기던 두터운 타성을 깨고 그날 선조들이 느꼈을 순수한 감격의 기쁨이 올해 들어 새삼 ‘처음처럼’의 마음으로 온전히 다가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격이 떨어지는 말일지 모르지만, “퀴퀴한 방귀를 뀌고도 도리어 성을 내는 놈들”이 많아서였다. 둔감한 필자의 눈에는 이번 광복절이 제 발 저린 도둑놈이 잔칫상에 재를 뿌린 매우 특별한 국경일임이 분명했다. 

일찌감치 적반하장의 분위기를 띄운 것은 일본 아베 정부였다. 그들이 트집을 잡은 것은 강원도 평창의 한 민간 식물원에 ‘영원한 속죄’라는 작품명의 동상이 설치된 것. 위안부 소녀 앞에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의 동상이다. 일본의 주장은 그 남성이 아베 총리가 아니냐는 것. 동상은 상징적인 표현에 가까워서 구체적인 해석을 도출하는 것은 관찰자의 보기 나름일 것이다. 제작자는 아베를 특정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찔리는 놈이 범인”이라던가. 일본인들의 눈에는 동상의 남성이 아베로만 보였던 게 이해는 간다. 

영원한 속죄

아무리 몰염치한 자기부정을 하더라도 내심으론 자신들이 인간으로서 차마 몹쓸 짓을 저질렀던 과거를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아베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오랜 일제 암흑기에 우리 민족에게 저질렀던 무수한 만행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한낱 시골구석의 자그마한 민영 미술관의 동상까지 트집을 잡으니, 이게 충분한 반성을 했다고 우기는 가해자의 태도인가. ‘영원한 속죄’의 동상은 고통의 한(恨)을 운명으로 감내하며 해학과 풍자의 예술로 승화시켜왔던 ‘백의(白衣)의 민족’이 보내는 평화의 손짓이자 외교적 난국에 대한 절묘한 해법으로 해석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이런 억지와 옹졸함이 일본이 한때 경제적으로 세계 2위로 성장했으면서도 진정한 대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이제는 초라한 ‘왜국(倭國)’의 길로 들어선 이유이리라. 흔한 말로 사과를 백 번, 천 번 한들 어디 덧나나. 하기야 각종 비리와 내정(內政) 실패가 부각될 때마다 시의적절한 혐한 발언으로 정권을 연명해왔으니 아베가 괜히 ‘흙 파서 장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년 우리나라에 가한 수출규제는 일본에게 분명히 ‘자뻑’에 불과한 악수 중 악수일 터. 당파적 이익을 위해 국가적 대사(大事)를 망치고 있으니 개혁 없는 일당 장기집권으로 ‘정치인’이 아닌 ‘정치꾼’만 득실대는 일본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강원도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에 설치된 '영원한 속죄' 동상. 사진=한국자생식물원.
강원도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에 설치된 '영원한 속죄' 동상. 사진=한국자생식물원.

꼴찌의 근자감

몇 년 전 일본의 골프장에서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 벙커에 미끄러져 모래바닥에 발라당 나뒹구는 바람에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바 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미일 정상의 특별한 교분을 과시한 골프외교”라는 멋들어진 헤드라인으로 뽑아 보도했다. OECD 국가 중 일본의 언론자유지수가 거의 꼴찌로 추락한 실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박근혜정부 시절 신년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입도 벙긋 못한 채 대통령의 말씀만 경청하던 ‘군대 열병’식 회견이 끝나자 어느 기자가 대통령에게 다가가 “너무 안고 싶었어요”라는 애교를 떨며 포옹을 애걸했던 우리 언론의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때는 우리도 언론지수가 꼴찌였다. 

미국의 2등 국가임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일본이 유독 우리에게만 터무니없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도 모자라 혐오감까지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착각은 자유”라, 선의의 경쟁보다 상대방 깎아내리기에 자족하며 쇠락의 길을 걷는 일본의 비뚤어진 심중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자체에서도 일본이 여전히 상국(上國)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하다. 한마디로 친일의 역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밝힌 십여 년 전 어느 일본 중진 정치인과의 경험담은 큰 울림을 준다.

신공(神功)

“노무현 정부 당시 일본의 정치인을 만나 독일처럼 진심으로 과거청산을 하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일본 정치인은 ‘국립현충원에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전범의 졸개들이 묻혀있더라. 당신들은 왜 그곳을 참배하는가? 우리더러 과거청산을 하라고 하지 말고 당신들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와 관련해 이번 광복절 행사는 왜 우리가 아직도 친일역사 청산이 어려운지를 잘 보여줬다. 지극히 당연한 광복회장의 기념사는 ‘제 발 저린’ 보수야당 정치인들에게 ‘도리어 성을 내는’ 빌미가 되고 보수언론들에게는 ‘섬뜩한’ 식사(式辭)라며 특종이 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역사 청산의 ‘청’ 자(字)만 나와도 일부 지도층 인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보이는 민감한 반응은 “찔리는 자가 범인”이라는 속설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반증한다. 이에 대한 그들의 ‘일본가의 보도’는 본질을 흐리며 국민들의 머릿속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 대독(代讀)한 광복회장의 기념사에 대한 원희룡 지사가 지나칠 정도로 발끈한 모습이 가관이었다. 

“태어나보니 일본 식민지였고 일본 식민지의 신민으로서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경로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15일 오전 10시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15일 오전 10시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어쩌다 친일파

본질을 흐리는 전형적인 물타기에다 일본 강점기의 모든 선조들을 친일파로 끌어내리는 물귀신 수법까지 동원된 원 도정다운 대단한 신공(神功)이었다. 나라를 팔아 호의호식하던 친일파들이 광복 후 미군정에 빌붙어 반공 애국투사들로 변신한 것은 지배층으로 재진입하기 위한 교활한 생존의 방편이었지만, 원 지사는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것은 위대한 결단”으로 추켜세운 바 있다. 그렇게 제주 4.3사건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구실로 제주양민들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 잔인무도하게 학살한 냉전시대 친일파 정권의 산물이었다. 원 지사의 숱한 공언에도 4.3에 대한 진상규명이 왜 아직도 겉돌고 있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5공 정권의 후손에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맡기는 격이라고나 할까.

친일잔재는 아직도 맹목적인 반공주의 속에 숨어 엄존한다. 하지만 친일청산은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4.3 학살과 같이 이념만으로 국가가 억울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비극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물이 피보다 진한’ 모순된 사회에서 ‘피가 물보다 진한’ 올바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또한 수천 년을 지켜온 한민족의 정기(精氣)와 자존심을 되찾고 일본과 동등한 관계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다. 그러나 ‘졸개’에 안주하며 단물을 빨아먹는 세력의 저항은 역시 막강했다. ‘어쩌다 친일파’를 볼 수 있었던 올해 광복절이었다.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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