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87. 비 온 날 외상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의 한 장면 ⓒ태흥영화사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의 한 장면 ⓒ태흥영화사

* 웨상제 : 외상제, 외상주

농경사회 시절엔 특히 한 가문(집안)이 융성할 것을 선호했다. 집안 대소사에 형제간이 많아야 남의 힘을 빌지 않고도 무난히 일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돈만 주면 척척 해결되지 않아, 크고 작은 일 하나에서 열까지 낱낱이 사람 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자녀 결혼은 마을 잔치로 치러야 했으므로 처리해야 할 일이 셀 수도 없었다. 손님 접대를 위해 음식을 차려야 했는 데다 제일 힘들었던 게 돼지를 잡아 고깃반을 장만하는 일이었다. 잔치는 궤기만 이시민 된다(잔치는 고기만 있으면 된다.) 했는데. 그 궤기를 장만하는 데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가. 

비단 잔치뿐이랴. 갑자기 상(喪)을 당하게 됐을 때, 장례 절차를 따라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형제간이 많아야 서로 도와 가면서 일을 치를 수 있었음은 말할 게 없다.

그래서 예전에는 살림이 궁핍해도 집집마다 아들 너덧에서 대여섯을 두었다. 아들 형제 수가 가세(家勢)를 이뤘을 정도다. 그쯤 돼야 ‘싱싱한 집안’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아이고, 그 집 말가? 그 집인 아덜덜이 여러 성제난 싱싱해영 그만ᄒᆞᆫ 일쯤은 지네덜끼리 갈라 맡앙 ᄒᆞᆫ시에 와작착 해치운다.(아이고, 그 집 말인가? 그 집에 아들들이 여러 형제로 싱싱해서 그만한 일쯤을 자기들까지 나눠 맡아 한시에 와장창 헤치워 버린다.)”
  
‘비 온 날 웨상제’는 형제 없는 외아들이 상을 당해 외롭게 상례(喪禮)를 치르는 그야말로 고적(孤寂)한 모습이다. 외롭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지금처럼 장례식장이 없던 시절을 상상해 보면 어떤 처신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준비에서 일 처리에 이르기까지 혼자 나서서 해야 한다. 가까운 친척이 있다 하나 형제만 하랴. 눈물 날 일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일을 도맡아 하며 의지할 데 없어 쓸쓸함을 어찌하지 못하는데 지적지적 비까지 내리면 일이 더뎌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게 된다. 발인해 장지(葬地)에 가 장례를 치러 봉분을 이룰 때까지 불편한데 의논하거나 성의껏 도와줄 형제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옛 어른들이 아들 여럿을 낳아 와랑시랑(곁으로 보란듯이) 거느리고 살면서 그것으로 위세(威勢)를 떨쳤던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비 온 날 웨상제’
생각만 해도 측은하지 않은가.  자식 하나도 낳이 않을려는 세상이다. 격세지감을 금할 수가 없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