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3)4.3행불인 수형자 10명 재심청구 심문 진행... 현경아·김을생·이상하 어르신 법정 증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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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남편 신체를 못 찾고 이수다. 비석 하나가 무슨 소용이우꽈. 나 죽기 전에 시체 찾고 무덤 하나면 이제 죽어도 소원이 어시쿠다”

꼬박 한 세기를 모질게 살아오신 어르신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법정은 순간 숙연해졌다. 유족들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방청객들은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렸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14일 오전 10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한 故 오형률씨 등 행방불명인 수형자 10명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 심문 절차를 진행했다.

현장에는 고인이 된 피고인들을 대신해 배우자와 형제, 자녀 등 재심 청구인 10명이 참석했다. 심문기일이 정해지지 않은 재심청구인 등 행불인 유족들도 자리를 지켰다.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가 6월8일 내란실행과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을 상대로 재심 청구에 따른 첫 심문 기일이 열리자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히는 모습.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가 6월8일 내란실행과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옥살이를 한 생존수형인을 상대로 재심 청구에 따른 첫 심문 기일이 열리자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히는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날 재판은 재심을 청구한 전체 행불인 대상자 349명(재심 청구인 342명) 중 6월8일 처음 진행된 故 김병천씨 등 행불인 수형자 14명에 이어 두 번째로 이뤄지는 심문 절차다.

법정에서는 재심 청구인 중 故 오형률씨의 배우자인 현경아(101세) 할머니와 故 김경행씨의 딸 김을생 할머니, 故 이기하씨의 남동생 이상하씨가 증인으로 참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현경아 할머니의 경우 1920년생으로 올해 101세다. 고령의 나의에도 불구하고 29세였던 70여년 전 4.3의 기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 아들, 딸하고 같이 살았어. 1948년 11월이었지. 마을 전체가 불에 탄다고 하니 무서워서 몸만 챙기고 아라동 구산마을에서 이도동 남문통으로 내달렸지.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

양 손에 아이들을 붙잡고 화염을 피했지만 정작 가장인 남편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경찰서에 끌려간 남편이 너무 춥다며 옷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곧 겨울이 찾아오는데 경찰서 안이 춥다는 거야. 아는 사람을 통해 옷을 달라고 인편이 왔더라고. 밭에 갔다 오면 올레에서 방에서 애들이 울고불고. 남편 없이 사는데 사는게 아니었어”  

이듬해 홀로 아들을 출산했지만 4.3광풍 속에서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일이 고역이었다. 밭일을 하며 아이 셋을 키웠지만 그 이후 어디에서도 남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故 김경행씨의 딸인 김을생(86) 할머니는 4.3 당시 14살이었다. 여든을 넘긴 조부모와 부모님, 4명의 동생들과 영평동에서 행복한 가족을 꾸렸지만 한순간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1948년 음력 10월25일. 군경이 마을로 쳐들어와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방에 쳐들어온 이들은 다짜고짜 총을 휘두르며 가족들을 위협했다.

“군방색 옷을 입었어. 한 놈이 총으로 어머니 이마를 내리쳤지. 피가 흥건했어. 어머니는 곧바로 살려달라고 소리쳤지. 그때 군화발로 내 어깨를 내리치더라고. 그리고 순간 총구가 나를 향했어. 그때 밖에서 ‘집합’이라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때 ‘피도 더러운데 그냥 간다’며 나가는거야. 그래서 겨우 살았지”

집은 잿더미로 변하고 산에서 내려온 마을 주민들은 어머니의 이마를 소독했다. 그리고 사흘밤을 돌담 옆에서 지냈다. 밥은커녕 물 한모금도 먹지 못했다.

며칠 뒤 가족들은 다시 경찰서에 끌려갔다. 열흘 만에 집에 돌아온 어머니의 모습은 처참했다. 이야기 도중 김 할머니는 얼굴을 감싸며 오열했다. 기구한 사연에 방청석도 울음바다로 변했다.

“어머니 얼굴이 훌쭉해졌어. 물어보니 손가락에 전기를 연결해서 고문을 했데. 집으로 왔는데 젖이 안나온다는 거야. 불쌍한 막둥이는 엄마 젖도 먹지 못했어. 아버지는 그후로 연락이 끊겼고”

故 이기하씨의 남동생 이상하씨(85)는 4.3사건으로 조부모와 부모, 형제, 조카 등 4대가 몰살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거주지는 서귀포시 회수동이었다.

군경을 피해 집을 나선 형(당시 25세)은 곧바로 연락이 끊겼다. 남겨진 가족들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도 잠시. 경찰은 느닷없이 총을 겨눴다. ‘탕.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가족들이 쓰러졌다. 이른바 즉결심판이었다. 당시 제주는 형무소가 없어 법적 절차도 없이 즉결심판이 이뤄졌다.

“총 소리가 나고 우리 가족들이 다 쓰러졌지. 총알이 날 피해갔어. 그대로 넘어졌어. 얼굴은 흙으로 범벅이었지. 그냥 죽은 채 하고 있었어. 그렇게 나 혼자 살아남았어. 가족 중에 혼자만”

부모와 형제에 이어 조카까지 잃은 이 할아버지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생을 이어갔다. 사망신고 과정에서 ‘총살’이라는 글귀를 써내려갔지만 주변에서는 연좌제를 우려했다.

“나 빼고 다 죽었어. 4대가 몰살 됐다고.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냐고. 힘들게 살아온 내 인생.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4.3 행불인 유족들의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앞선 2019년 6월3일 법원에 행불인수형자 10명에 대한 첫 재심을 청구했다. 올해 2월18일에는 행불인수형자 300여명이 추가로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수형인명부와 재심청구인의 구술을 토대로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여야 70년 전 불법적 재판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정식재판이 비로소 열린다.

법원은 전체 사건을 사안별로 20여개로 구분하고 이중 이날 사건을 포함해 2개 사건에 대한 심문 절차를 마무리했다. 조만간 이들 사건에 대한 사상 첫 재심 개시 여부가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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