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행안부 ‘군사재판 무효화 조항’ 반대 유감 

101세 현경아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다. 

솔직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그 보다 생사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72년 전 소식이 끊겼다. 4.3의 광풍이 휘몰아친 1948년 11월, 경찰서로 끌려간 게 마지막이었다. 

명예회복이 보다 현실적인 희망이다. 재심을 통해 무고한 남편에게 덧씌워진 법적 올가미(국방경비법 위반)를 걷어내는 일이다.  

이 또한 녹록지 않다. 일단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야 하고, 정식 재판에서 공소 기각 결정이 나야 한다. 백을 넘긴 할머니에겐 하루하루가 시간과의 싸움이다. 남편은 4.3행불 수형인으로 분류된다.

“나 죽기 전에 시체 찾고, 무덤 하나면(하나 만들면) 이제 죽어도 소원이 어시쿠다(없겠습니다)”. 법정에서 울먹인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올 2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송석진 할아버지는 4.3생존 수형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72주년 추념식에 참석해 ‘안타까운 사례’로 일일이 거명한 네 분 중 한 분이다. 세 분은 생전 공소기각 결정이 났지만, 송 할아버지는 재판 날짜만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태평양전쟁 강제징집, 일본 패망 후 내란죄로 형무소 수감, 한국전쟁 때 해병대로 자원 입대(인천상륙작전 참여), 군 제대 후 일본 정착. 말그대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할아버지가 제대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광기어린 4.3의 악몽 때문이었다. 그에게 제주는 고향이라기 보다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공포의 땅이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눈을 감은 뒤에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역시 최근 법정 증언대에 선 이상하(85) 할아버지는 4.3 때 4대(代)가 몰살되는 참극을 겪었다. 이른바 즉결심판에 의해 조부모와 부모, 형제, 조카가 경찰의 총탄에 쓰러졌다. 군경을 피해 집을 나선 형은 연락이 끊겼다. 

“나 빼고 다 죽었어. 4대가 몰살됐다고.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냐고”. 당시 13세에 불과했지만, 이 할아버지에게 72년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감’에 사로잡힌 세월이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현재 재심 개시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들에게 최근 가슴을 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4.3특별법 개정안의 핵심 사항인 수형인 명예회복 방안과 관련, 행정안전부가 군사재판의 무효화 조항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개개인이 형사소송법에 따른 재심 제도를 활용하면 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행안부가 든 이유는 사법부의 권한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 

기가막힐 노릇이다. 행안부의 입장은 말이 재심이지 사실상 각자 알아서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된 이들을 국가가 앞장서 어루만져 주지는 못할 망정 스스로 억울함을 풀라니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되묻게 한다. 

1948년과 1949년 군사재판의 불법성은 이미 드러났다. 더구나 4.3생존 수형인들에 대한 잇단 공소기각 결정은 당시 군사재판의 부당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2018년에는 박상기 법무부장관이 4.3당시 군사재판에 대해 적법절차를 위반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당하게 희생당한 국민에 대한 구제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본질적 문제입니다”. 문 대통령은 올해 4.3추도사에서 국가가 희생자들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진실의 바탕 위에서 4.3피해자와 유족의 아픔을 보듬고 삶과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고도 했다.  

행안부는 대통령의 뜻까지 거스르려 하는가. 

국회 차원의 입법적 결단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21대 총선에서 여당은 물론 야당들도 제주 공약으로 4.3특별법 개정을 내걸 정도로 정치권의 분위기는 어느정도 무르익었다. 

굳이 ‘지연된 정의’를 들먹이지 않겠다. 그러잖아도 4.3 수형인 관련 재판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이면 수많은 4.3수형인들의 재판이 최종적으로 언제쯤 끝날지 기약하기 어렵다. 

이제는 희생자의 1세대 유족들도 여든, 아흔을 바라보고 있다. 평생의 한을 품은 채 돌아가시는 제2, 제3의 송석진 할아버지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 

문득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명예회복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어르신들에게 행안부의 입장은 아무리봐도 가혹하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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