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제주도를 꼬닥꼬닥 걸어가는 올레길 위엔 다양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있다. 이번 일화에서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연이 있는 시누이와 올케의 올레길 완주기를 소개한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닥쳐와서 참으로 끈질기게 모든 국민들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는 코로나 19,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대급으로 길고 긴 장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꺼내기가 어색할 만큼 안녕하지 못한 나날들이 계속된 올해 상반기였습니다.

허나, 인간의 무지함과 탐욕도 끝이 없는가 하면 인간의 순수한 의지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 또한 무한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머가 발달했던 시기와 공간이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의 절정판이었던 유태인 수용소였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불려나가 가스실에서 처형될지도 모르는 그 공간에서도 인간은 살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늘 직면하고 사는 이들의 용기와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지요.

지난 몇 달 간 저도 그런 지혜를 발휘하는 수많은 올레꾼들을 길에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주 관광을 와서 짜여진 프로그램의 하나로 올레길을 한두 시간 걷고 가는 단체 올레꾼들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개인적으로 올레길을 찾는 올레꾼들은 물론 올레 완주자들도 다달이 더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전보다 더 절절한 심정으로 더 근본적인 질문을 가슴에 품고, 자연에 대한 더 뜨거운 경외심을 안고 길을 찾는 분들이 많아졌음을 그분들과의 대화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저 혼자서만 듣고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실 전형적인 아날로그 파여서 sns나 페이스북, 트위터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직접적인 만남이나 책, 감사 엽서 등으로만 올레꾼과 후원자들과 소통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의 감동적인 사연을 하루 빨리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리고 이 위안 없는 코로나 19 시대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드리고 싶다는 바람으로 제 오랜 습관을 한 번쯤은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시누이와 올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완주.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시누이와 올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완주

7월 초 어느 날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1층 펍에 약속차 들렀습니다. 막 들어가려는 순간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두 중년 여성과 딱 마주쳤는데, 그들은 판초 우의를 다시 입는 중이었지요. 아, 온종일 비를 맞고 걸었겠구나 싶었고, 순간 13년 전 판초 우의를 입고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걸었던 산타이고 길에서의 고생이 생생히 소환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녀들 뒷전에 대고 말을 걸었습니다. “오늘 너무 고생하셨겠네요.” 그러자 그녀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서 저를 보더니 “아 어머, 혹시?” 그러더군요. 제가 맞다고, 이 길을 낸 사람이라고 얼른 자수를 했습니다. 이 길을 내서 오늘 당신들 엄청 고생시킨 바로 그 사람이라고. 

그러자 그녀의 눈에 반짝 이슬이 비쳤습니다. 와락 저를 껴안더군요. 이렇게 만날 줄 몰랐다면서. 많은 분들이 이 아름다운 길을 내줬다고 감사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눈물까지 비치는 건 드문 일인지라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두 여성은 이날 35일에 걸친 제주올레 길 완주를 마쳤답니다. 친구나 선후배 사이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시누 올케 사이라더군요. 더한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사실은 눈물을 비친 그 여자분의 남편이 전직 대학교수인데 여행광이었고 무엇보다도 골수 올레꾼이었답니다. 2018년에 부부가 제주올레 길을 이미 완주했다면서, 남편되는 분과 제가 길에서 만나 찍은 사진도 핸드폰에서 찾아서 보여주었습니다. 

왜 이번엔 남편분은 안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안 오신 게 아니라 못 오셨답니다. 올해 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하늘올레로 떠나셨다고. 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로구나. 오빠를 잃은 시누이와 남편을 잃은 올케가 오빠와 남편을 추억하면서 완주를 시작한 거로구나. 

그녀들은 길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그분의 조끼와 모자를 시누와 올케가 하나씩 나눠서 입고 써서 올레길을 완주했노라고, 그러니 셋이 완주한 거나 다름없다고요. 그리움은 여전하지만, 슬픔과 아쉬움은 길에서 많이 내려놓았노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노라고. 

그분들과 헤어지면서 참으로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그분들의 동의를 얻어서 돌아가신 올레꾼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분은 전 목원대 교수 이규금 님입니다. 시누와 올케의 완주는 올해 6월 3일에서 7월 9일까지였습니다. /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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