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2)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서귀포에 있는 올레길 7코스를 걷다보면 바다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외돌개’를 만나볼 수 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30여 년 만에 고향 제주로 돌아와서 올레길을 내기 시작한 지도 올해로 13년 차. 12간지의 한 바퀴에 해당하는 12년을 온전히 제주의 남쪽 서귀포에서 보냈다.

열두 차례의 여름, 열두 차례의 장마를 맞이하고 보낸 셈이다. 육지에 비해서도 제주, 그것도 서귀포의 장마는 특별하다. 고온다습한 지역인지라 비가 자주, 많이 쏟아져서 여름이면 온 천지가 습하고 눅눅하다. 요즘은 건축기술의 발달과 소재 개발 그리고 제습기 사용으로 습기를 많이 잡을 수 있지만, 집 바깥으로 나가면 예전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올해 장마는 유독 길고, 징글징글하게 비가 내렸다. 같은 올레길도 습도가 유난히 높은 날 걷는 건 매우 힘들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나도 힘들다고 느껴질 만큼. 한두 시간만 걸어도 금세 온몸이 다 축축해지고 속옷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머리를 감은 것처럼 다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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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매생태공원 전경.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일주일여가 지난 후, 해가 빼꼼하게 얼굴을 내민 7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 이주 5년 차에 접어든 동네 친구이자 여성학자 오한숙희와 시내 올레길을 걸었다. 올레의 근거지인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3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금세 ‘걸매생태공원’이다. 천지연의 모천이나 다름없는 일 년 내내 용천수가 지표 위로 흐르고 천연 하천 주변에 흐르는 곳, 내 주장으로는 ‘청계천 열 개를 줘도 안 바꿀, 뉴욕의 센트럴 파크가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경관을 품은 공간이다. 또한 올레 7-1코스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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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7코스를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칠십리시공원.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걸매생태공원을 지나 칠십리시공원으로 들어섰다(이곳은 올레 7코스). 매화공원을 지나서 ‘천지연 전망대’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 남자의 전동차가 보였다. 그와 함께한 일주일 사이, 키도 몸피도 부쩍 자란 주변의 형형색색 꽃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를 찾아서 둘러보니 저 안쪽에서 엎드려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남자는 꽃들은 어느 정도 다 심었으니, 주변에 잔디를 심는 일을 새로이 시작했단다. 이쯤에서 지난해 발행된 나의 책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읽은 분들은 아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맞다. 그는 ’땅에 엎드려 꽃을 피우는 남자‘ 김영수 씨다. 

제주 이주자 2세대로써 어릴 적 이유 모를 열병을 앓다가 두 다리가 마비된 그. 그는 다리 때문에 정규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아버지 등에 업혀 여호와의 왕국 교회에 다니며 한글을 익혔다. 성장한 뒤로는 서울에서 몇 년간 기숙하면서 시계 수리와 금은 세공을 배운 끝에, 서귀포 시내에 작은 시계 수리방을 가진 각고 끝에 꽤나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허나 그는 일찍이 금은방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전도의 길을 택했다. 전도할 장소로 칠십리시공원 천지연 전망대 근처로 날마다 출근하던 중, 꽃 하나 없이 삭막한 공원 풍경을 조금이라도 바꿔 놓기로 결심했다. 노느니 꽃이라도 심자는 마음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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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엎드려 꽃을 피우는 남자‘ 김영수 씨는 칠십리시공원을 형형색색의 꽃으로 수놓고 있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그의 작업이 몇 해 동안 계속 이어지면서 이 공원에는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심은 꽃나무(관목을 주로 심는다)는 시간이 갈수록 무성해지고,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지면서 지나가는 운동 주민들, 올레꾼, 어쩌다 그곳에 들른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두어 해 전부터 그를 알기 시작했고, 때로는 그의 안부가 궁금해서 일부러 그 공원을 찾는 일도 많아졌다. 

그날 그에게 말했다. 영국의 ‘타샤의 정원’이 참 유명한데, 제겐 타샤의 정원보다 김 대표님의 정원이 더 멋져요. 타샤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에 꽃과 나무를 심어서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소로 만들었지만, 김 대표님께선 시민의 땅인 공원에 꽃을 심어 자신의 정원을 만들었으니 더 한 수 위이신 거죠 라고.

그에게 지난해부터 심어 번영한 그 꽃나무들의 이름을 카톡으로 물었더니 그는 친절하게도 꽃말까지 가르쳐 주었다. 키가 작은 꽃은 쿠페아의 꽃말은 ‘세심한 사랑’, 키가 훌쩍 크고 색깔도 화려한 꽃은 칠변화의 꽃말은 ‘나는 변하지 않는다.’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올레길 7코스를 걷다 보면 지나게 될 칠십리시공원에서 꽃을 만난다면, 그가 기울인 노력을 떠올리며 꽃들을 '눈'에다가 가득 담아가 보자.  사진=(사)제주올레. ⓒ제주의소리

혹시 올레 7코스를 걸으면서 칠십리 시공원을 걷게 된다면 몸을 낮춰서 꽃들과 눈을 맞춰볼 일이다. 그 남자의 세심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주올레가 설치한 부탁이 내재된 경고판처럼 꽃은 가져가지 말고 눈으로만 사랑하기를. 공유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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