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형 도시재생을 묻다] ④ 개혁군주 재조명 되는 ‘광해군’ 제주유배도 집중 연구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는 제주에서 숨을 거뒀다.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된 광해는 1637년 제주로 유배됐는데, 광해가 처음 제주 땅을 밟은 곳으로 추정되는 제주 어등포(지금의 구좌읍 행원리)에 기착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역사(歷史)’는 도시재생의 핵심 콘텐츠다. 다만 ‘역사’는 도시재생사업의 흔한 주제다. 접근이 쉬운 만큼 실패 확률도 높다는 말이다. 도시재생을 할 때 단순히 기술적 접근뿐만 아니라, 지역에 오랫동안 축적된 인문학적 가치를 발굴하고 활용하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달렸다. 

역사 문화 콘텐츠로 도시재생에 성공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 사례는 차고 넘친다. 제주 도시재생 핵심콘텐츠로 ‘광해(光海)’를 주목하는 이유다. 

도시재생사업이 한창 추진되고 있는 제주시 원도심 핵심 콘텐츠로 조선의 제15대 왕인 ‘이혼(李琿)’이 최근 주요하게 회자되고 있다. 이혼은 ‘광해군(光海君)’의 본명이며, 과거 제주 유배인 중 유일한 임금(王)이다.  

올해 6월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관덕정 주변 활성화 추진협의체’가 공식 출범했다. 추진협의체는 광해군 콘텐츠를 활용한 도시재생을 목표로 하고 있다. 

광해군이 유배 생활을 했던 제주시 원도심에서 광해의 마지막 삶을 끌어내 제주시 원도심의 역사적 가치를 드높여 도시재생으로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1575년 태어난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광해군은 서적 편찬, 사고 정리 등 내치에 힘쓰고 명과 후금 두 나라에 대한 양단(兩端)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했다. 그러나 당쟁에 휩쓸려 임해군과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폐위됐다. 재위 기간은 1608~1623년이다.

광해군은 1623년 3월13일 폐위돼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병자호란 발발 다음해인 1637년 제주로 유배됐다. 광해군은 1637년부터 제주에서 4년여간 유배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영화 '광해' 포스터.
영화 '광해' 포스터.

비록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됐으나, 광해군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비운의 폭군이 아닌 개혁 군주로서의 숨은 역사도 재조명돼야 한다는 움직임이다. 

임진왜란은 광해군을 운명을 갈랐다. 아버지인 선조가 피난길에 나서며 조정을 둘러 나누는 분조를 시행해 광해군에게 전시 사직을 이끌게 했다. 비상사태에 따른 불가피한 선조의 선택이었다. 

전시통솔권을 부여 받은 광해군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목숨을 걸고 백척간두의 전선을 넘나들며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과 맞서 싸우는 등 선조를 대신해 사실상 전시 지도자 역할을 했던 것이 재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쫓겨나 묘호(廟號)조차 얻지 못한 왕으로 전락한 광해군. 임진왜란으로 경제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조선의 전후복구라는 중차대한 과제와 명·청 교체기라는 특수한 외교상황에 직면했을때 선조는 눈을 감는다. 

광해군은 이처럼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1608년 임금에 즉위한다. 전시복구는 물론 대동법 실시 등 혁신적 정치를 잇따라 펼쳤고, 명의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하는 등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살피고 국가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펼친 양단의 실리외교가 문제가 됐다. 당시 선조가 명나라에 등을 돌렸다는 주장과 함께 서인을 중심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 폐위됐다.  물론 폐위에는 이밖에도 여러가지 배경이 있다. 폭군으로 기록될만한 사건들도 있었다.  

광해는 제주시 원도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숨을 거뒀다. 현재 광해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도1동 KB국민은행제주종합금융센터 건물 한편에 광해의 적소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측면도 일부 고려해야 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광해의 업적을 재평가한다는 움직임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던 광해의 ‘중립외교’는 현대에서는 주목할만한 외교 전략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광해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제주에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당시 절해고도의 제주로 온 광해군의 유배생활은 늘 살얼음을 걷는 분위기였을테다. 주변에는 언제나 엄격한 감시가 이뤄져 일거수 일투족 모두 감시 대상이 됐다. 특히 언제 암살을 당할지 모를 상황으로, 광해는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점도 광해의 제주 유배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요인이 되기도 했을 것. 

광해는 자신을 감시하는 장수가 윗방을 사용하고, 자신은 아랫방에 거쳐하게 하는 모욕도 참아냈으며, 심부름꾼이 자신을 ‘영감’이라 호칭해도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전해진다. 독살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한 여름에도 펄펄 끓인 물만 마셨다. 

그러나 광해와 관련된 제주의 흔적은 많지 않다. 광해가 제주에 도착한 첫 기착지로 알려진 구좌읍 행원리 행원포구(옛 어등포, 於登浦)에 2006년 세워진 기착지 표석이 있고, 원도심에 ‘적소(謫所)’로 추정되는 터에 빗돌이 있다. 

제주시 원도심 관덕정 모습. 숨을 거둔 광해의 장례는 왕실 허가에 따라 관덕정 앞에서 왕자에 준해 치러졌다. 

광해는 1641년 음력 7월 제주에서 유배생활 중 눈을 감았다. 1623년 폐위된 후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이미 15년 이상 이미 유배를 겪다가 그의 주변에서 광해의 복위를 염두에 둔 몇차례의 역모를 시도하자 다시 제주로 쫓겨난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벌써 환갑을 넘긴 때라 사실상 복위에 대한 미련도 떨쳐버린 시점이다. 

제주로 유배지를 옮겨온지 4년여 만에 쓸쓸히 생을 마감하면서 광해의 장례식은 제주에서 치러졌다. 각종 문헌을 분석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제주에서 진행된 광해의 장례식은 제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장례식이었다고 고증한 바 있다. 

당시 대부분의 제주도민이 광해군의 장례에 참석해 예를 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문헌에 제주 사람들이 광해 적거지를 지날 때마다 예를 다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실제 광해가 숨을 거뒀을 당시 이시방(李時昉) 제주목사(牧使)는 제주 사람들의 애원을 담아 광해에 대한 예를 표해야 한다고 왕실에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광해의 장례는 관덕정 앞에서 왕자에 준해 치러졌다. 이후 광해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조성된다. 

광해가 숨을 거둔 1641년의 제주는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그런데 광해가 생을 마감하자 많은 비가 내렸다. 아직도 제주 사람들은 지독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부른다. 

이후 제주사람들은 광해가 임종한 날 즈음이면 “7월 초하룻날이여, 대왕 관(어붕)하신 날이여, 가물다가도 비오람서라”라며 광해우를 기다리고 광해군의 넋을 달랬다.

최근 광해가 숨을 거둔 제주시 원도심에서 광해 스토리텔링이 도시재생과 연계돼 조명되고 있다. 올해 공식 출범한 관덕정 주변 활성화 추진협의체는 가칭 ‘제주광해문화제’ 개최도 준비하고 있다. 

제주에서 진행된 광해 밥상 기획전. 기획전 기간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방문해 광해가 먹은 것으로 전해지는 음식을 관람하고, 실제 맛을 보는 체험도 했다.

제주시 원도심 주민들을 중심으로 제주에서의 광해의 삶과 그에 대한 기록 전반을 조명하는 과정이 이뤄지고 있다. 

제주도 도시재생지원센터는 지난해 6월 제주대학교 스토리텡링연구개발센터와 ‘광해군 콘텐츠를 활용한 제주시 원도심 활성화 업무협약’을 체결, 광해 스토리텔링과 함께 광해밥상 레시피도 개발 중이다. 
 
각종 문헌에 광해가 즐긴 것으로 알려진 육고기와 잡채, 김치 등 광해의 밥상을 비롯해, 광해가 제주에서 입었던 옷 등 그의 모든 것을 되짚는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광해 콘텐츠화 준비 단계로 광해와 광해밥상을 다룬 기획전도 열렸다. 

아직 세부적인 계획까지 잡히지 않았지만, 광해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은 콘텐츠로서 큰 가치를 갖는다. 특히 쇠락해진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에 가장 적절한 콘텐츠라는 평가도 뒤따르고 있다. 

관덕정 주변 활성화 추진협의체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양진건 제주대학교 교수는 광해가 제주의 킬러 콘테츠가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지난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진행된 광해 특별전.

최근 ‘광해의 요리사 충(沖)(2020)’라는 웹소설을 출판해 인기를 끈 양 교수는 콘텐츠로서 가치가 매우 높은 광해라는 인물과 제주를 연계할 수 있다면 원도심 도시재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조선의 왕은 콘텐츠로서 가치가 높다. 특히 광해와 관련된 책과 영화, 드라마 등 제작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광해에 대한 콘텐츠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광해는 제주의 킬러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어 “광해는 지금의 제주시 원도심에서 살았다. 유배인으로서의 광해에 한정되지 않고, 광해라는 인물 자체를 스토리텔링해 제주와 연계할 수 있다. 강원도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한 단종을 스토리텔링해 매년 영월에서 ‘단종(조선 제6대 왕)문화제’가 열린다. 제주에서도 ‘광해문화제’를 개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 교수는 “현재 광해를 콘텐츠화를 위한 다양한 작업이 진행중이다. 광해는 제주의 콘텐츠이자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의 킬러콘텐츠가 될 수 있다”며 “광해(光海)는 ‘빛의 바다’라는 뜻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바다와 뗄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이어온 제주와 닮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도시재생의 핵심은 지역주민들의 주거 복지와 지역경제 향상이다. 킬러 콘텐츠로 언급되는 역사콘텐츠를 조명하는 박물관이나 기념관 하나를 짓고 마는 도시재생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역사콘텐츠를 주거복지와 지역경제 향상으로 연결되도록 원도심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박물관으로 조성하는 도시재생으로 나아가야 한다. 광해(光海)는 침체된 제주 원도심의 빛의 바다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럴만한 콘텐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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