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56) 만월(滿月) / 고영숙

흐르는 만월. ⓒ김연미
흐르는 만월. ⓒ김연미

보름은 당신의 오래된 우상

당신이 쓸어내리는 사시사철
살아서 손금선 넘어 건네받은 명줄 
아흔 아홉 조각 꽃잎들로 뼈를 맞춘 
열두 달 버거운 하늘이 저려온다  

만월滿月,

달빛을 신으로 모신 어머니의 눈썹경전經典 

바람을 베끼는 지난한 필사 
 
먼 곳은 잘 있다는 풍문이 흩날린다

떠받들던 하늘 그림자가 휘어든다
북쪽 하늘 끝자락 움켜쥔 오래비 
고봉밥에 수저를 꽂는다
골 깊은 아흔 아홉 골 벼랑에 영혼꽃이 핀다 

버려야 가벼운 호젓한 슬하 
매운 이력의 끝을 읊는

달빛 

한 점 

한껏 몸을 낮추어
생의 절기를 이어나간다

-고영숙 [만월(滿月)] 전문-

후대의 자손들은 2020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1347년에서부터 3년간 20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던 페스트의 해, 역시 20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던 스페인독감이 휩쓸었던 1918년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2020년이 까마득한 미래로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그려보곤 했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힘으로 달나라를 이웃집 마실가듯 여행을 하게 되진 않을까. 영화 속 이야기처럼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은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 개발로 인해 로봇과의 생사를 건 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타임 루프 안에서 외계종족에게 침공당한 지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202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금의 2020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지금은 영화 속에서처럼 획기적으로 과학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우주는 아직도 지구를 태평양 바다의 한 점 모래알 같은 존재로 머물게 하고 있다. 대신 그 모래알 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와의 싸움으로 지구의 2020년은 고달프다. 더 크고 더 넓은 세상으로만 초점을 맞춰온 지구인들에게 태클을 건 코로나19다. ‘넓고 큰 것만 세상이 아니야. 작은 것들도 얼마든지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고!’ 하는 듯 말이다. 뒤통수 한 번 세게 맞은 듯 지구가 온통 비틀거리고 있다. 

추석이 다가올수록 바람은 맑아지고, 그 바람에 씻기며 오곡이 익어가고, 좀 더 높아진 하늘을 배경으로 드디어 만월이 오르는 추석날. 우리는 또 정갈하게 차려진 차례상 앞에서 조상을 생각하고 후대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올 추석에는 이렇게 평범하게 흘러가던 것들을 마냥 따뜻하게 바라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꼭 필요한 지금, 잠깐의 만남으로 인한 행복은 잠시 미뤄둬야 하니까 말이다. 

과거가 있다는 것은 그 과거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었다는 말이다. 페스트의 역사를 이기고, 스페인독감을 이기고 그 외 수많은 질병과 전쟁과 말로 다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이기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린 또 하나의 과거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한껏 몸을 낮추어’ 또 하나 ‘생의 절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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