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28) 김준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최근 온라인을 떠도는 영상에서 “자유”를 이야기하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마스크를 착용해달라고 부탁하는 승무원과 시민들을 향하여, ‘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느냐’는 투로 강하게 반발하는 그는 듣기 거북한 육두문자에 몸싸움까지 해가며 지하철 공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과학 대신 종교를 탑재하고 있었다. 생물학과 의학에 기초한 이성적 접근은 없고 오로지 현 정권을 비판하는 계기로만 삼고 있었으니,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을 대하는 인간(사회)의 미성숙한 태도에 한숨만 쌓여간다. 그는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 얼마나 가슴 떨리는 단어이던가, 자유!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그 할아버지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라고 정말 진지하게 묻고 싶다. 

197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시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에 남몰래” 써야했던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그 절규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절차적 민주주를 성취로 이어졌다. 그러나 분단으로 인한 냉전의 유산은 여전히 감성의 민주주의, 사상의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1970년대라는 그 캄캄한 시대.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 시인은 1990년대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하며 지식인들과 예술인들, 그리고 시민들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죽음의 굿판을 거둬치우라’는 말 이후에도 그는 생명사상을 쫓아 정진했지만, 결국 1970년대에 그이가 보여주었던 결기와 강단에 찬 시인의 모습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웠고, 사람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다. 멀어진 정도가 아니라 옛 시절의 존경을 갉아먹는 극단의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김지하에 관한 나의 느낌도 사람들의 그것과 대략 이와 비슷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 속의 그이를 온전히 삭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이후의 그이 때문에 1970년대의 그이를 통째로 지울 수는 없기 때이다. 그이는 사상가 이전에 예술가였다. 사상의 깊이가 한없이 깊어지기 전부터 투철한 인지력과 빛나는 예지력을 가진 청년예술가였다. 그 청년예술가의 처절한 저항은 암흑의 시대를 비춘 한줄기 빛이었다. 그렇게 빛나는 성좌와 함께 수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싸웠다. <아침이슬>과 <공장의 불빛>으로 1970년대의 어둠을 밝힌 김민기가 있다. 수십년 침묵과 망각의 강을 건너 4.3항쟁을 이야기한 <순이삼촌>의 현기영도 있다. 광주 5.18의 현장을 낱낱이 밝혀내며 나아가 광주학살의 서사를 광주항쟁의 서사로 이어낸 김남주와 홍성담도 있다. 

ⓒ제주의소리
홍성담, 광주 5.18 목판화 연작, 1980.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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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 모내기, 1989.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제주4.3항쟁의 대서사를 빛나는 회화 연작으로 시각화한 강요배가 있고, 서슬시퍼런 국가보안법의 발호 아래 작품을 빼앗기면서도 위대한 화업을 쌓은 <모내기>의 신학철도 있다. 그리고 서정적 음유시인에서 시대정신과 호흡하는 리얼리스트로 진화하며 한국의 예술인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헌정한 정태춘도 있다. 김지하와 김민기, 현기영, 김남주, 홍성담, 강요배 신학철, 정태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이루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등 우리사회가 함께 풀어야하는 절박한 과제들이었다. 그것은 사회와 함께 동행하는 예술이자, 사회 변혁을 위해 행동하는 예술이다. 

예술은 지난 수십년간 한국사회를 진일보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민주주의 단계로 공진화하는 데 힘을 모았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에 근접하고 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사회의 의식은 아직 함량미달이다. 자유란 누군가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가치 기반 위에서 스스로 소여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에는 아직 시간 거리가 너무 짧았던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번 생도 결국 20세기 후반 한반도 냉전체제라는 시대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새삼 실감한다. 

제국주의 침탈과 국가주의 폭력에 시달리며 어렵사리 식민과 해방, 산업화와 민주화 단계를 거쳐온 한반도의 일부 사람들에게 자유란 아직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모든이가 스스로 온전히 자유를 누리는 세상을 향하여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 예술 또한 아직 갈 길이 멀다. 민주주의가 완결의 상태가 아니듯 자유와 인권과 평화를 향한 예술의 사회적 실천 또한 미완결의 틈을 메꾸며 정진하는 영구혁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什麼是自由?
金俊起

在最近網路上播放的影片中,我看到一個老人在談論“自由”。他對要求戴口罩的地鐵工作人員和市民,強烈反對的問:“為什麼要限制我的自由?”當他以聽不見的呼喊脫口而出,並猛衝撞自己,這使地鐵空間陷入了恐慌。他的言行舉止是宗教而非科學。我只是對人類(社會)對於冠狀病毒之類的微生物的不成熟態度感嘆,因為他只是以此批評當前的管理方式,而不是基於生物學和醫學的理性方法。他使我思考自由的含義。 “自由”一詞真是令人心動不已!我想認真地請問這位老人,他談到憲法所保障的“自由”到底是什麼?

那個感嘆是:“民主,永遠!”詩人金芝河(Kim Ji-ha)於1970年代在大韓民國寫的“在渴求中,在黎明時秘密地寫著”導致了1980年代程序民主的實現。但是,由於分裂而造成的冷戰遺留問題仍然阻礙了敏感性和觀念的民主化。這位詩人曾在1970年代的黑暗時代,直到1990年代以及進入二十一世紀,對獨裁者朴正熙呼籲民主,如今,他們與知識分子,藝術家和公民之間的距離越來越遠。在“停止死亡儀式”一詞之後,他繼續致力於追求生命理念。但是最後,很難再看到他在1970年代向我們展示的堅定而有爭議的詩人,而且逐漸遠離人們。他沒有走開,而是對表現出對過去形象的破滅和對他以前的尊敬使人感到失望。在1970年代的大韓民國,詩人金芝河不得不寫“黎明時分,口渴”的“民主,歡呼”的尖叫聲在1980年代後變成了程序民主。它導致了該原則的實現。

我對金芝河的印象與人們的印象大致相同。一個區別是我無法完全將他從歷史記錄中刪除。由於他在1990年代後的態度,不可能撤消他在1970年代的所有存在。在成為思想家之前,他還是一位年輕的藝術家,具有清晰的認知能力和出色的預測能力。這位年輕藝術家的巨大抵抗力是一束照亮黑暗時代的光線。在光彩奪目的星座下,許多藝術家齊心協力。有金敏基,他的《晨露》和《工廠之光》揭示了1970年代的黑暗。經過數十年的沉默和遺忘,許賢英還講述了他的孫逸姨母4.3起義的故事。還有金南柱和洪成潭,他們一個接一個地揭露了光州5.18大屠殺的場景,並將光州大屠殺的記憶以光州起義的方式傳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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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成潭 Hong Sung-dam,《光州》 5.18版畫,1980年。照片= Gim Jungi。 ⓒ濟州之聲

圖片2
申鶴澈 Shin Hak-chul,水稻種植,1989年。照片= Gim Jungi。 ⓒ濟州之聲

姜堯培(Kang Yo-bae)通過一系列出色的畫作形象化了濟州4.3起義的史詩故事。還有創作《水稻種植》的畫家申鶴澈,儘管他的作品被嚴格的國家安全法沒收了,但他建立了偉大的藝術事業。然後我們有鄭泰俊,他從抒情詩人變成了時代精神的現實主義者。他致力於韓國藝術家的「表現的自由」。金芝河,金敏基,玄基榮,金南柱,洪成潭,姜堯培,申鶴澈,鄭泰春和許多其他藝術家共同努力爭取民主,人權與和平,這是我們社會亟需解決的緊迫問題,這是與社會同行並為社會帶來改革而行動的藝術。

近幾十年來,藝術在推動韓國社會發展方面發揮了重要作用。它不僅有助於加速政治民主,而且還有助於使國家相互發展成為文化民主。但是,這條路仍然很遠。政治制度可能更接近民主,但作為民主基礎的公民社會的意識仍然不足。似乎時間仍然太短,無法認識到自由不是某人給予的東西,而是受民主價值觀自我驅動的。我再次意識到,我們所生活的這種生活最終將在20世紀下半葉朝鮮半島冷戰系統的範圍內展開。

對於朝鮮半島上遭受帝國主義剝削和民族主義暴力,幾乎沒有經歷殖民化,解放,工業化和民主化階段的一些人來說,自由仍不是完全屬於自己。 為了實現每個人都享有自由的世界,仍有許多事情需要克服。 藝術還有很長的路要走。正如民主不是最終形式一樣,走向自由,人權與和平的藝術社會實踐也是如此,因為這是永無止境的革命之路,需全力以赴填補未完成的空白。


What is freedom?
GIM Jungi

In a video that recently ran online, I saw an old man talking about freedom. He was strongly opposed to crew members and citizens who asked him to wear a mask, saying, Why are you restricting my liberty? and sent the subway space into a panic as he blurted out in inaudible epithets and even got physical. His words and actions incorporated religion instead of science. I just sigh at man (society) immature attitude towards microorganisms like the coronavirus, as he only used it as an opportunity to criticize the current administration instead of a rational approach based on biology and medicine. He made me ponder the meaning of freedom. How the word freedom was as something to make one heart tremble! I would seriously ask that old man, who talks about the freedom guaranteed by the Constitution, What is freedom?

That exclamation, Democracy, forever! which the poet Kim Ji-ha had to write in the Republic of Korea in the 1970s in a burning thirst, secretly at dawn led to the fulfillment of procedural democracy through the 1980s. However, the legacy of the Cold War remains an obstacle to democracy of sensibility and ideology. The poet who ever cried out for democracy against the dictator Park Chung-hee in that dark era of the 1970s, through the 1990s and into the twenty-first century, has moved further and further away from the intellectuals, artists, and citizens. He continued to devote himself to the pursuit of the idea of life after the words stop the rituals of death. But in the end, it was difficult to see again the determined and argumentative poet he showed us in the 1970s, and the poet gradually moved away from people. Rather than moving away, he disappointed them by showing the extremes that eroded his old respect.

My impression of the Kim Ji-ha is roughly the same as that of people. One difference is
that I can completely delete him from history. It is impossible to dismiss all of his presence in the 1970s due to his attitude after the 1990s. He was an artist before he was a thinker. He was a young artist with lucid cognition and brilliant foresight even before his ideas were deepened. The tremendous resistance of this young artist was a ray of light that illuminated the darkest of times. Numerous artists fought together under that shining constellation. There was Kim Min-ki, whose Morning Dew and Factory Light revealed the darkness of the 1970s. There was also Hyeon Ki-Young who told the story of the 4.3 uprising in his Aunt Sunyi after decades of silence and oblivion. There are also Kim Nam-joo and Hong Sung-dam, who revealed the scenes of the Gwangju 5.18 massacre one by one, and who turned the memories of the Gwangju Massacre into those of the Gwangju Up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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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Sung-dam,  Gwangju 5.18 woodblock print series, 1980. Photo = Gim Jungi.
ⓒJeju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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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 Hak-chul, Rice planting, 1989. Photo= Gim Jungi. ⓒJejusori

There Kang Yo-bae, who visualized the epic story of the Jeju 4.3 uprising with a series of
brilliant paintings. There also Shin Hak-chul, the painter of Rice Planting, who built up
a great career of art even though his works were confiscated under the strict National
Security laws. And then we have Jeong Tae-chun, who went from being a lyrical bard to a realist breathing in Zeitgeist. He dedicated Korean artists freedom of expression. Kim Ji-ha, Kim Min-ki, Hyun Ki-young, Kim Nam-joo, Hong Seong-dam, Kang Yo-bae, Shin
Hak-chul, Jung Tae-chun, and many other artists have worked together to fight for democracy, human rights, and peace which were urgent issue that our society needed to solve. It is the art that accompanies society and acts for social reformation.

The art has played a great role in taking Korean society a step forward in recent decades. It has not only helped to hasten political democracy, but has also helped to mutually evolve the country into a cultural democracy. But we still have a long way to go. The political system may be getting closer to democracy, but the consciousness of civil society, which is the foundation of democracy, is still insufficient. It seems that time is still too short a distance away for us to realize that freedom is not something that someone else gives, but something that drives itself based on democratic values. I am reminded that this life we are living now is, in the end, also being played out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Korean Cold War regime of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For some people on the Korean peninsula, who have suffered from imperialist encroachment and nationalist violence and have barely gone through the stages of colonization and liberation, industrialization and democratization, freedom is still not entirely their own. There is still too much to overcome for a world in which all people enjoy freedom. The arts also still have a long way to go. For just as democracy is not a finished form, the social practice of art towards freedom, human rights and peace is a path of perpetual revolution, filling in the unfinished gaps and devoting itself to it.


自由とは何か
金俊起(ギム・ジュンギ)国立現代美術館学芸研究室長

最近オンラインを流れる映像で、「自由」を語るおじいさんを見た。マスクの着用を求める乗務員や市民に向かって、「なぜ私の自由を制限するのか」というふうに強く反発する彼は、聞き苦しい卑語を飛ばし体当たりまでして、地下鉄の空間をパニックに陥れた。彼の言葉や行動は、科学の代わりに宗教を取りこんでいた。生物学と医学に基づいた合理的なアプローチではなく、ただ現政権を批判する契機にしてばかりいたのだから、コロナウイルスのような微生物に対する人間(社会)の未成熟な態度にただ嘆息する。彼は自由の意味を私に考えさせた。それはどれほどまでに胸震える言葉だったろう、自由! 憲法が保障する「自由」を語るそのおじいさんに「自由とは何か」と真剣に問いたい。

1970年代の大韓民国で、詩人・金芝河(キム・ジハ)の「灼けつく渇きで、夜明けに密かに」書きつけねばならなかった「民主主義よ、万歳」というその絶叫は、1980年代を経て手続的民主主義の成就につながった。しかし、分断による冷戦の遺産は依然として感性の民主主義、思想の民主主義を妨げている。1970年代というあの暗黒の時代、独裁者・朴正熙(パク・チョンヒ)に対抗して民主主義を叫んだその詩人は、1990年代を経て21世紀を迎えると、知識人と芸術人、そして市民からますます遠ざかっていった。「死の儀式をやめなさい」という言葉の後も、彼は生命思想を追って精進したが、結局は1970年代に彼が見せてくれた決起と議論に満ちた詩人の姿に再び出会うことは難しく、人々から次第に遠ざかった。遠ざかると言うよりもむしろ、昔の尊敬を蝕む極端な姿を見せて失望感を抱かせた。

金芝河について抱く私の印象も人々のそれと大体似ている。一つ違う点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歴史の中の彼を完全に削除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だ。1990年代以降の彼ゆえに1970年代の彼をまるごと消し去ることはできない。彼は思想家以前に芸術家だった。

思想が深まる前から、透徹した認知力と輝く予知力を持った青年芸術家だった。その青年芸術家の凄まじい抵抗は、暗黒の時代を照らした一筋の光だった。その輝く星座のもと、数多くの芸術家たちがともに戦った。『朝露』と『工場の明かり』で1970年代の闇を明かした金敏基がいた。

数十年の沈黙と忘却の川を渡って四三抗争を語った『順伊おばさん』の玄基榮もいた。光州5.18の現場を一つ一つ明らかにし、さらに光州虐殺の敍事を光州抗争の敍事に引き継いだ金南柱(キム・ナムジュ)、洪成潭(ホン・ソンダム)もいた。

図版1
洪成潭 光州5·18木版画連作 1980 写真=金俊起  ⓒ済州の声
図版2
申鶴澈 田植え 1989 写真=金俊起  ⓒ済州の声

済州四三抗争の大叙事を輝かしい絵画連作で視覚化した姜堯培(カン・ヨベ)がいるし、厳しい国家保安法が跋扈する下で作品を奪われながらも偉大な画業を積んだ「田植え」の申鶴澈もいる。そして叙情的な吟遊詩人から時代精神を呼吸するリアリストへと進化し、韓国の芸術家たちに「表現の自由」を献上した鄭泰春(チョン・テチュン)もいる。 金芝河(キム・ジハ)、金敏基(キム·ミンギ)、玄基榮(ヒョン·ギヨン)、金南柱(キム·ナムジュ)、洪成潭(ホン·ソンダム)、姜堯培(カン・ヨベ)、申鶴澈(シン・ハクチョル)、鄭泰春(チョン・テチュン)など多くの芸術家が一緒に立ち向かったのは、民主主義と人権、平和など、私たちの社会が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切迫した課題だった。それは社会とともに歩む芸術であり、社会変革のために行動する芸術である。

芸術はこの数十年間、韓国社会を一歩前進させるのに大きな役割を果たした。政治的民主主義を早めることに貢献しただけでなく、文化民主主義段階へと相互に進化することに力を合わせた。しかしまだまだ道は遠い。政治体制は民主主義に近づいているかもしれないが、民主主義の根幹を成す市民社会の意識はまだ不十分だ。自由とは、誰かが与えるものではなく、民主的価値を基盤に自ら牽引するものだと悟るには、まだ時間の距離が短すぎるようだ。私たちが生きている今生も結局、20世紀後半の韓半島冷戦体制という時代の垣根の中で繰り広げられることであることを改めて実感する。

帝国主義の収奪と国家主義の暴力に苦しみ、植民地化と解放、産業化と民主化の段階を辛うじて経てきた韓半島の一部の人々にとって、自由とはまだ完全に自分のものではない。すべての人が自由を享受する世界を実現するためには、乗り越えるべきことがまだあまりにも多い。芸術もまた、まだ長い道程がある。民主主義が完成形ではないのと同じように、自由、人権、平和に向けた芸術の社会的実践もまた、未完の隙間を埋めながら精進する永久革命の道だからだ。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예술과학연구소장,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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