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호 국회의원의 제주-목포 해저터널 필요 주장에 대한 반론

송재호 제주시 갑 지역구의 민주당 국회의원이 물류 체계 대량 운송 문제를 이유로 제주-목포 간 해저터널을 2022년까지 공론화한다고 10월 4일자 <제주의소리>에서 밝혔다. 

해저터널은 제주(濟州)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문제다. 제주의 건널 제(濟)는 바다 위를 건너는 고을, 섬을 뜻한다. 해저터널로 연륙(連陸)이 되면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육지(陸地)다. 

뿐만 아니라 상극 시대가 돌아온다. 제주 이름도 바꿔야 한다. 한 마디로 연륙과 동시에 제주는 없다. 2007년 박준영 전남지사가 주장해 김태환 제주지사가 동조하는 모양으로 167km KTX 일일 생활권화를 주장한 바 있다. 퇴근하면서 제주에서 바다회로 식사를 하고 육지 집으로 귀가한다는 것. 일명 ‘밥 먹엉 갑서’이다. 당시 이 정책은 여론에 뭇매를 맞고 접은 바 있다.

물류 체계 대량 운송은 제주의 정체성인 자연 환경을 대량 파괴하고도 남을 것이다. 전남도 국회의원이 아니고 자신의 고향 제주의 국회의원이 이런 주장은 한마디로 섭섭한 일이다. 제주의 ‘제(濟)’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하길 바란다. 차제에, 옛 제주 섬나라 이름인 탐라국을 내세워 제주인의 긍지를 드높이는 운동을 펴는 것도 검토해 볼 만하다. 해저터널의 문제와 함께 이해를 돕고자 간략히 제주역사를 조명한다.

제주도 발전 4軸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포, 모슬포) 이문호의 제주의 문(門)에서. 출처=이문호.
제주도 발전 4軸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포, 모슬포) 이문호의 제주의 문(門)에서. 출처=이문호.

왜 제주는 상극(相剋)과 상생(相生)인가?

제주의 미래 핵심 가치는 ‘청정과 공존’이 아닌 ‘청정과 상생’이다.  제주는 탐라-고려-조선에서부터 1960년대까지 삼재도(三災島)로 ‘바람과 돌이 많고 땅이 척박하고 물이 귀한 상극(相剋)시대(기원전 4세기~1960년)였다. 1960년대 이후 감귤 나무가 재배되면서 교통이 트이고 어승생 저수지 등으로 물 문제가 해결되고 관광지화 되면서 상생(相生)시대(1960년~현재)로 접어들었다. 상극이란 말은 서로 대립하고 부딪치는 것이 아니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괴하고 누른다는 뜻으로, 삼재(三災)와 역사의 굴곡이 제주인을 피눈물 나게 했다. 상생은 순행(順行), 서로의 순리적인 질서와의 공생(共生)을 의미한다.

한라산은 섬 가운데에 높이 솟아있고 깊은 골짜기도 있어, 비가 오면 물 흐름이 빨라서 수재(水災)가 많았다. 화산섬으로 돌이 많고 토질이 척박해 조금만 가물어도 한재(旱災)를 겪었고, 여름과 가을에 걸쳐 몰아치는 태풍의 길목이 돼 자주 풍재(風災)를 만났다. 이런 재해가 일 년 내내 이어지니 자연히 흉년이 될 수밖에 없고, 섬사람들의 생활은 어려움을 면치 못했다. 오죽해야 하얀 쌀밥은 너무 귀해서 명절 때나 조상 제사 때나 먹을 수가 있어 ‘고운 밥(산듸로지은밥)’, ‘곤밥’이라고 했지 않은가? 잔치 집에 가는 것도 잔치‘먹으레 간다’로 하고,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밥 먹엉 갑서’로 인사말을 건넨다. 왜, 그랬을까?

제주의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절약이 생활화(조냥 정신)될 수밖에 없었고, 힘든 밭일과 바다 일을 번갈아 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의 ‘재앙’을 함께 이겨나가기 위해 이웃 사이에 서로 믿음과 사랑이 돈독해질 수밖에 없어 ‘수눌음’ 정신과 ‘괸당’, ‘상생(相生)’ 정신이 자연히 생겨나왔다. 여기서 괸당은 괴다에서 나온 말이다. 굄돌, 괸돌, 괸당 순으로 바뀌었다. 돌 머들(뢰, 磊)가 사람의 무리 중(衆, 众) 괸당으로 변천됐다. 

우리가 처음만나는 사람을 곧장 ‘삼촌’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따라서 제주에서 ‘상생(相生)’은 제주인 품성(品性)이다. 

상극(相剋) 시대는 재난과 고난의 역사다. 이씨 조선 1700~1800년경, 흉년과 질병으로 인구가 급감해서 나이가 80세 이상 생존하는 제주 사람들을 위해 조선(朝鮮)정부에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명예직 벼슬을 하사했고, 일부다처(一夫多妻)제를 장려해서 인구 증가를 꾀 했다. 증·고조 묘(墓)를 보면 부인이 둘 씩 있는 이유다. 흉년을 이기지 못해서 육지, 뭍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제주도민에게 출국금지령이 200년간(1629~1833)내려졌다.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가. 1950년대는 고구마전분 지꺼기와 밀채를 범벅으로 먹었던 세월이 생각난다. 삼재(三災) 상극(相剋)의 섬이  제주였다. 오늘날 전통 관습 중 제주사회에 남아있는 게 몇 가지의 말이 있다.명절, 영장(靈藏), 잔치, 식게(祭祀)와 함께 먹으레 감서, 밥 먹엉 갑서 같은 말은 350년전 흉년과 질병으로 제주 사람이 아사(餓死)직전 못 먹고 못살 때 사용했던 말이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몽고 원나라의 제주지배 100년(1273~1373), 제주도민 출도 금지령 200년(1629~1833), 한일 합방 35년(1910~1945), 4.3사건 7년(1947~1954)인데, 그중 4.3사건은 제주 상극이 극치였다. 세상 시국(時國)이 다정한 이웃끼리 서로 미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4.3사건을 승화시켜 평화의 섬, 즉 상생(相生)의 섬으로 태어났다.

1960년부터 현재까지 상생(相生) 시대에서는 후손에 물려줄 영원한 터를 위해, 제주의 청정을 위해 한라산 지하수 매장량과 숭굴 지도(MAP)를 만들 때다.

제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물이다. 화산암반수가 한라산맥 어느 오름 끝 발로 흐르는지 지도를 만들고 지하수맥이 흐르는 오름 발이나 능선을 절대 보호 지역으로 지켜져야 수자원이 보호된다. 수자원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해안가 용천수가 마르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60년전 까지만 해도, 웃뜨르 사람들은 봉천수(奉天水)를 알뜨르 사람들은 해안가 용천수(湧泉水)를 마셨다. 사계리 큰물에 가서 구르마로물을 실어다 마신 것도 1950~60년대다. 당시만 해도 웃뜨르 총각에 시집오는 알뜨르 처녀들은 흔치 않았다. 중산간 웃뜨르 사람들은 물 문제뿐만 아니라 교통도 불통(不通)으로 두 시간 이상 걸어서야 해안가 일주도로변에 도착했기 때문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제주섬에 가장 큰 관심은 물이다. 봉천수가 지하수로 바뀌면서 지하수 매장량에 관심이 많다. 제주 한라산 속살 안에 큰 컵이 있다고 생각하자. 큰 컵 속에는 물 매장량은 연간 약 16억7600만톤이 있다. 이 화산암반수가 ‘똑똑’ 떨어지며 모이기까지는 19년 시간이 걸리고 바닷물이 한라산 컵의 목을 조이고 있다. 2016년 제주 인구 60만과 유동인구 750만명(잠정적으로 관광객 1500만명의 반절)을 합친 810만명이 연간 약 6억만 톤을 사용한다. 한라산 컵에 약 10억만 톤의 여유 저수량이 있는데 바다로 흘러가는 누수량을 감안하면 더 줄어들 수 있다. 2020년 정주 인구가 65만에다 유동인구 1000만(잠정적으로 관광객 2000만의 반절)으로 계산했을 때 총 제주인구가 1065만이므로 저수량이 약 5억만 톤 정도가 되지만 누수량을 감안하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치이다. 이와 같이 점점 더 한라산 컵 안에 있는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된다.

한라산과 나, 이웃과 이웃, 이웃과 관광객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제주 자연이 청정해져야 한다. 즉, 사람과 자연이 서로 충전 에너지를 주고받을 때 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청정 관련 성산 제2공항 건설에 대해, 제주MBC는 9월 26일부터 27일까지 만 18세 이상 제주도민 1004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무선전화 85%, 유선전화 15%)를 진행했다. 연휴 동안 ▲제2공항 건설 ▲도민 의견수렴 방식 등 제2공항과 관련 도민 의견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제주 공항시설 확충 관련 질문에 ‘현 공항 확충’의견이 47.0%로 가장 높았고 ‘제2공항 건설’이 37.1%, ‘제2공항 건설반대’ 의견이 57.9%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웠던 180년 전, 제주도민들은 출도(出島) 금지령으로 꼼짝 못했는데, 오늘날 물밑처럼 몰려오는 관광객을 보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낀다. 관광객들은 상극시대 제주에 격리(隔離, Isolation)됐던 한라산의 청정자연환경을 보려고 온다. 한마디로 제주에 청정(淸淨)을 빼면 한마디로 미래에 제주(濟州)는 없다.

#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으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RMIT대학, 독일 뮌헨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기술부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 공학부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에 선정됐다.

현재 감귤과 커피나무 유전자 DNA 결합을 후성유전자 현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