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주 최초 풍토지 『제주풍토록』 남긴 충암 김정을 기리며 /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딱 500년 전인 어느 가을밤, 산지천 동쪽 언덕의 초가삼간 툇마루에 형색은 남루하지만 눈빛은 형형한 젊은 사내가 앉아 한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은 적막했고 높이 쌓은 돌담은 사슴뿔 모양의 나뭇가지로 둘러쳐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다만 달과 별은 밤이면 번갈아 찾아와 초가 위로 빛을 뿌려 그의 시름을 잊게 하곤 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35세에 형조판서를 지내다 1520년 (음)8월 21일 제주에 유배 된 충암김정의 모습이다. 양력으로 치면 10월 7일 오늘이 유배 5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수 백 년 간 오현(五賢)을 선비들의 사표로 삼아 온 제주사회로서는 기억할 만한 날이다. 

  충암(1486~1521)은 중종 2년(1507) 22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중종 14년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 등과 함께 나라의 적폐를 혁파하려 했으나 훈구파의 반격으로 제주로 귀양 온 뒤 이듬해 사약을 받았다. 기묘사화가 그것이다.

제주 오현단 / 출처 = visitjeju ⓒ제주의소리
제주 오현단  / 사진 출처 = www.visitjeju.net ⓒ제주의소리

 충암이 남긴 『제주풍토록』은 사약이 언제 내려질지 예측할 수 없는 1년여의 시간 중에 남긴 기록물이다. 16세기 제주의 상황 등을 생생하게 그려낸 제주 최초의 풍토지이다. 조선시대 제주를 찾는 관리와 선비들에게는 반드시 읽고 가야 할 안내서 같은 존재였고, 오늘 날에는 제주학 연구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이 책은 충암을 제주 선비들의 표상으로 삼았던 오현의 첫 반열에 오르게 했고, 후세들은 제주에 오현단을 조성하며 충암을 비롯한 다섯 현인들을 함께 기려왔다. 오현단에 세워진 충암의 「절명사」비에는 「⋯이 세상 두고 이 목숨 끊어지나/ 구름을 타고 천제(天帝)에 올라 굴원(屈原)을 따라 높게 소요(산책)하련다.」라는 글이 눈에 띈다. 

 굴원은 중국 한나라 때에 펴낸 시집 『초사(楚辭)』를 통해 시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이름을 남겼다. 그는 초나라의 재상으로서 개혁을 추구하다 반대파들에 의해 유배지로 쫓겨난 뒤 초나라의 멸망 소식을 듣자 「사세시(辭世詩)」를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단오의 풍습은 바로 굴원의 충절을 기리는 풍습에서 생겨났다. 충암은 자신들의 좌절에서 굴원의 자취를 떠올리고 자신도 「절명사(絶命辭)」를 남겼다고 이해된다. 

  그가 후세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시를 보며 제주선비들은 굴원과 충암처럼 충절을 지키며 살아갔던 선현들의 모습을 사표로 삼고자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선현들이 1500년

강문규 전 한라생태문화연구소장
강문규 전 한라생태문화연구소장

의 세월을 뛰어넘으며 공유했던 밝은 세상에 대한 꿈을 제주선비들도 계승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현단을 거닐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와 제주학센터, 그리고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는 이달 22일 도의회에서 충암을 기리는 세미나를 개최한다. 충암의 적거지를 비롯한 여러 자취를 돌아보는 답사도 진행할 예정이다. 그 때 소슬바람 맞으며 충암의 자취를 함께 거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