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4)법원, 4.3행불인 수형인 재심 심문...상당수 정뜨르비행장 총살 피해자 

70년 가까이 제주공항 비행기 바퀴 밑에 파묻힌 행방불명인들이 유족들의 입을 통해 한 맺힌 제주4.3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19일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사라진 4.3행방불명인 40명의 재심 청구사건 첫 심문 절차를 진행했다.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 제주위원회로 분류된 피고인들은 1948년 4.3을 전후해 행적이 끊긴 희생자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공항)에 암매장됐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출신인 故 문기호(1925년생)씨는 구엄국민학교 교사이던 1949년 봄. 퇴근후 집으로 가던 길에 느닷없이 군경에 붙잡혀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재심청구인인 여동생 문정어(85) 할머니는 당시 13살 국민학생이었다. 초토화작전과 소개령으로 고성리 마을이 불바다로 변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시내 외가댁으로 몸을 피했다.

수소문 끝에 오빠가 제주경찰서에 끌려간 사실을 확인하고 구금 한 달만에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면회에 나섰다. 자신이 없는 동안 어머니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이 오빠의 마지막이었다.

“자전거 타고 주말에 집으로 오다가 잡혀갔어요. 물을 길러 가는 동네 아줌마가 봤다는 거예요. 다시 면회를 가보니 오빠가 없었어요. 그때 트럭이 제주공항쪽으로 가더라고요. 사람들 눈을 검은천으로 다 가렸서 누가 누군지. 무작정 따라갔는데 다리에서 막더라고요. 그때 총소리가 다,다,다,다. 그 후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1999년 4.3수형인명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故 문기호씨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2018년에 제주공항 유해 발굴 현장에서 70년 만에 오빠의 유골과 마주했다.

“판사님, 우리 오빠. 결혼도 못하고 그 젊은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잡혀갔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꼭 이 억울함 풀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현장에서는 피고인 故 김여순(1920년생)씨의 동생인 김여권(81) 할아버지 등 재심청구인 총 4명이 직접 법정에 출석해 4.3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대정읍 신평리 출신인 김씨의 가족은 옹기를 제작하며 오붓한 가정을 꾸렸다. 4.3 당시 소개령으로 가족들 모두 모슬포로 피난했지만 큰 형인 故 김여순씨만 홀로 집에 남았다.

마을이 모두 불에 탔지만 부모님들은 옹기를 챙기러 다시 집으로 갔다. 그 곳에서 숨어 지내던 큰 아들과 마주했다. 그 길로 경찰서로 데려가 일단 자수를 시켰다. 목숨이 먼저여서다.

“죄도 없고 영문도 몰랐지만 일단 부모님들이 자수를 시켰어요. 이후 석달마다 모슬포경찰서에서 인분을 치우러 밖에 나오는 큰 형과 몰래 면회를 했어요. 그 때마다 형은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괜찮다고만 했습니다. 세 번 정도 만났는데 그 후로 연락이 없었어요”

김씨 역시 정뜨르비행장 4.3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형의 유골과 마주했다. 그 동안 큰형의 생일에 제사를 지냈지만 이후부터는 아버지 기일에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019년 6월3일 법원에 행불인수형자 10명에 대한 첫 재심을 청구했다. 올해 2월18일에는 행불인수형자 393명이 추가로 청구에 나섰다.

서류미비 등을 이유로 제외된 인원을 적용하면 실제 재심 대상자는 349명이다. 재심청구인은 342명이다. 6월8일과 9월14일에 이어 오늘까지 65명에 대한 심문 절차가 이뤄졌다.

나머지 청구인에 대해서도 순차적으로 심문 절차가 이뤄진다. 재판부는 검찰의 의견서가 접수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을 유족들에게 전했다.

재판부는 행불인 수형인 사건과 별도로 최근 4.3생존수형인 8명에 대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개시 결정이 내려져야 본격적인 재판 절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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