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극협회 창작 연극 ‘홍윤애의 비가’

지난 18일 공연한 '홍윤애의 비가'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지난 18일 공연한 '홍윤애의 비가'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지조와 절개의 상징, 제주여인 홍윤애를 연극 무대 위에서 재현한 한국연극협회 제주지회의 창작 연극 <섬에서 사랑을 찾다>가 올해로 3년째를 맞는다. 이번에는 ‘홍윤애의 비가’라는 새 이름을 들고 지난 18일 공연을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인 홍윤애-조정철의 만남과 이별이란 큰 줄기는 유지하면서 2018년 초연부터 매해 제작진, 출연진에 크고 작은 변화를 줬다. 올해는 지난 2년과 비교할 때 가장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연출은 연극인 정민자가 맡았는데 김성노, 고동원에 이은 세 번째다. 그보다 2년 연속 홍윤애, 조정철을 연기한 주연 고지선-이승준이 박은주-강상훈 조합으로 바뀌었는데, 나중에 후술할 여러 가지 연출적 시도와 맞물려 극의 색깔을 바꾸고 무게감 역시 한층 더 높였다.

# 중년의 조정철, 젊은 배우들의 열연 
 
1751년생인 조정철은 1777년 제주로 유배 왔다고 알려진다. 27세 나이에 낯선 유배지에서 홍윤애를 만난 셈이다. 고지선-이승준이 연기한 앞선 두 번의 공연은 실제 역사와 비교적 잘 부합하는 연령대나 연기를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60대를 목전에 둔 강상훈을 투입시켜 전혀 다른 느낌을 입혔다. 이것은 창작의 영역으로 역사를 재해석한 셈인데, 놀랍게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는 흔히 조선시대 선비, 양반이라고 상상하는 통념상 이미지가 알게 모르게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여기에 일찍 여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홍윤애가 자연스럽게 조정철을 향한 관심이 애정으로 바뀌게끔 의도한 설정도 중년의 조정철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던 원인으로 해석된다.

강상훈은 선비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 애써 고독을 삭히는 외로움 속에 자신도 모르게 홍윤애에 대한 감정이 커져가는 한 남자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활력 있게 감정이 전달하기보다는 생각 이상으로 차분한 연기로 다가왔는데 지난 2019년 5월 <늙은 부부 이야기> 이후 1년 하고도 5개월 만에 배우로 복귀한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고한 선비라는 캐릭터와 잘 맞아 떨어지며 오히려 시너지(synergy)를 가져왔다. 자택으로 찾아온 홍윤애와 대화를 나누기 전 실제로 비어있는 술잔을 터는 연기나 반죽음이 된 홍윤애에게 무릎을 끌고 다가가는 모습 등은 기억에 남는다. 가람의 이상용, 세이레의 강상훈, 파노가리의 문무환 등 중년 나이를 지나는 제주지역 극단 대표급 연극인들의 연기를 주연이든 조연이든 관계없이 더 많이 비교해보는 기회가 생긴다면 반갑지 않을까.

새로운 홍윤애를 연기한 박은주는 배우, 제작진 포함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는 제주 연극인 가운데 하나다. 작품 마다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는 배우로 기억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안정감 때문인지, 묘하게 특별한 인상을 떠올리기 힘든 ‘아이러니’를 출연한 작품들을 보며 종종 느꼈다. 하지만 남녀 주연이 주목받는 <홍윤애의 비가>에서는 주인공으로서 손색 없는 활약을 펼쳤다. 조정철을 향한 사랑에 마시지도 못하는 고소리술을 잔뜩 마시면서 속마음을 슬쩍 내비치고,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의 연기에, 아버지를 기다린 홍윤애의 딸까지…. 박은주는 홍윤애가 느낀 희로애락을 매끄럽게 무대 위에서 표출해내며 작품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했다.

악역 김시구의 오종협, 홍윤애를 마음에 품은 강창수의 현유상, 정조·아전·동료를 담당한 문재용 등 제주의 젊은 연극인들의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30대를 오가는 젊은 배우들이 모이면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작품 전반에 걸쳐 풀무질 역할을 했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활동하는 동년배 제주 배우들을 한 작품에서 만나는 기회는 이런 기획 공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비슷하게 양순덕, 김이영, 이영원, 정윤선이 모인 일명 ‘아줌마 조합’은 관객 웃음과 공감이라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아줌마 조합은 초연부터 지금까지 극의 흐름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번에는 인원 구성을 세 명에서 네 명도 늘리고, 그 안에서 역할과 이야기를 추가해 한층 더 비중이 커졌다. 예컨대 수다쟁이 종상(정윤선)이 용선(양순덕) 남편의 외도를 떠벌이면서 빚는 갈등이다. 

특히 용선 역할을 맡은 양순덕은 배역에 녹아드는 특유의 존재감을 보여주며, 자신이 왜 3년 연속 같은 배역을 놓치지 않았는지 증명했다. 

# 한결 담백하게 정돈된 흐름

큰 틀에서 기조를 이어온 <홍윤애의 비가>는 여전히 역동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이지만, 구석구석 제법 다양한 점이 달라졌다.

주연 배우로 인해 극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물론, 조정철이 실제 남긴 옛 시 구절을 대사에 추가했는데 여느 영상이나 무대 장치만큼이나 시대 배경을 연상케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보말국, 고소리술 같은 고유명사는 친근함을 높였다. 산신령이 홍윤애-조정철 인연을 점지했다는 설정을 삭제하고, 때때로 유쾌했던 아전(衙前)을 까다로운 성격으로 바꾸는 등 <홍윤애의 비가>는 담백하고 차분한 역사극에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제주어에 대한 상반된 접근은 상징적인데,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제주목사 김시구와 30년 넘는 긴 시간이 흐른 뒤 제주를 찾아 본인 딸의 제주어를 알아듣는 조정철은 각각 어떤 마음으로 제주와 제주사람을 대했는지 대비된다. 각색은 강은미가 담당했다.

다만, 홍윤애를 좋아하지만 인연이 되지 못하는 제주목 말단 관리 강창수는 단편적으로 소비됐다는 인상이다. 김시구에게 홍윤애 정보를 처음 보고하고 동시에 눈앞에서 홍윤애가 사망하는 장면을 지켜본 인물이 강창수인데, 인물의 죄책감을 창작으로 활용한다면 이야깃거리가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김시구가 고문으로 홍윤애를 죽인 뒤 당황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공백이나, 이어서 아전에게 대사 없는 귓속말을 남기고 떠나는 구성 역시 전후 맥락과 단절된 갑작스러운 전개로 다가왔다. 

# 홍윤애를 시작으로…

<홍윤애의 비가>가 남긴 의미는 완성도, 그리고 연합 공연에 대한 기대로 요약해본다.

2018년 초연부터 세 번의 무대에서 올해 처음으로 음악을 작곡해 사용했다. 영화 <지슬>에 참여하면서 지역에 널리 알려진 작곡가 전송이가 참여했다. 물론 지난해 등장한 라이브 연주도 관객 입장에서 인상적이었지만, 작품에 맞는 새로운 곡을 창작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작곡, 각색, 소품, 무대 미술 같은 요소들은 보다 나은 작품, 완성도 높은 무대를 추구한다면 소홀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최대한 빠뜨리지 말고 또 합당하게 대우하는 시도가 더 많이 지켜지길 바란다.

<섬에서 사랑을 찾다>는 제주지역 극단들이 연합해 제작하는 방식이다. 초연은 조정철 역의 이승준을 비롯해 고가영, 박세익, 차선영 등 극단 가람 배우들 비중이 높았다. 두 번째는 예술공간 오이 등 다른 극단도 역할이 생겼다. 올해는 극단 세이레 주축으로 만들었다. 극단마다 각자의 개성과 장단점이 존재하기에 누가 나은지 비교하기 보다는, 제주 연극계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많은 제주 극단들이 참여하는 연합 기획 공연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홍윤애 이상의 제주 소재를 계속 발굴하는 노력이다.

제주시가 전향적인 자세로 나선다면 다양한 제주 소재들이 연극으로 도민들에게 찾아갈 것이다. 애초 해당 사업 명칭이 ‘제주소재창작연극개발사업’ 아닌가. 제주소재창작연극개발사업과 함께 <더불어-놀다 연극제>도 지원하는 등 이미 제주시는 지역 연극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제주시의 진취적인 예술 행정을 기대한다. 

<홍윤애의 비가>는 유튜브 채널 ‘제주도연극협회’( https://www.youtube.com/channel/UCnAUpQeW_G-CmJbIz_pcbqw )에서 녹화본으로 시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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