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항쟁 정명의 길
여순항쟁 정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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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31) 김준기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애국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 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배웠던 일. 1948년 10월 19일에 발발한 여수와 순천에서의 역사적 사건은 좌익 군인들이 벌인 군사반란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위의 호소문이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여순의 핵심은 군인으로서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는 일체의 폭력을 국가 권력으로 수렴하면서 국민을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최고의 의미로 삼는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신생 국가들에서는 국가가 국민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념과 진영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국가 폭력은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3년만인 1948년 봄, 제주도에서 4.3항쟁이 일어났다. 사안의 핵심은 ‘해방된 조국이 남북으로 나눈 분단조국일 수 없다’는 생각을 실천한 반분단운동이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한 제주도민들의 선거보이코트에 이어 제주도 전역에서 대대적인 토벌이 이뤄지고 있던 그해 가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제주도 토벌 출동 명령이 내려졌으나, 군인들은 제주도로 향하지 않았다. 그것이 반란이냐 봉기냐를 놓고 아직 역사적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여순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 등으로 명명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여수·순천사건(麗水順天事件) :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사건이라는 말에는 과거에 발생한 일을 거리는 두고 바라보는 객관화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가치 평가는 담보할 수가 없다. 여기 72주년을 맞이한 여순사건을 여순항쟁으로 정명하고자 하는 한 예술가의 치열한 노력의 결실이 있다. 박금만의 여순항쟁 연작 개인전이 그것이다.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금만 : 여순항쟁 역사화전>(2020.10.12.-10.31)은 여순항쟁을 다룬 20여점의 연작을 전시했다. 박금만은 여수, 순천, 구례, 벌교 등에서 이어진 여순항쟁의 전모를 20여점의 회화에 담았다. 여수의 역사학자인 주철희 박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자료, 고증을 토대로 한 연작이다. 

박금만 자신의 할아버지가 여순항쟁의 주역으로 당시의 학살로 사망한 것을 최근에 알아낸 작가는 더욱 더 절실한 마음으로 여순의 정명을 생각하며 연작에 매진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을 추체험(追體驗)하며 자료를 찾고 현장을 답사하며 증언을 듣고 고증을 받는 치열한 과정을 거쳤다. 그의 그림에는 학살 피해자 유족들의 슬픔에 대한 공감은 물론 항쟁 발생과 전개 과정에 대한 시각적 환기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은 국가의 관점에서 좌익 폭동으로 기록되어온 긴 시간 동안의 역사 서술을 제 평가하는 감성적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여순항쟁 정명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제주4.3이 4.3항쟁으로서의 정명을 과제로 삼고 있듯이, 제주도민을 학살할 수 없다며 봉기한 여순사건이 여순항쟁으로 정명하는 과정에서 박금만의 회화는 공론장에서 뛰어든 역사 비판의 예술로 작동하고 있다.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박금만, 오동도에서, 캔버스에 유채, 2019.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박금만, 아버지, 캔버스에 유채, 2019.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麗順抗争の正名の道

金俊起(ギム・ジュンギ)

「愛国者に訴える」
我々は朝鮮人民の息子、労働者、農民の息子である。我々は我々の使命が、国土を防衛し人民の権利と福祉のために生命を捧げ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我々は済州島の愛国者を無差別虐殺するために我々を出動させようとする作戦に対し、朝鮮人の息子として、朝鮮同胞を虐殺することを拒否し、朝鮮人民の福祉のために総決起した。
1.同胞が相争うことに反対
2.米軍即時撤退
済州討伐出動拒否兵士委員会

私たちは歴史教科書で麗順「反乱事件」と教わった。1948年10月19日に勃発した麗水と順天での歴史的事件は、左翼軍による軍事反乱として知られる。しかし上記の訴えの文章が示すように、「麗順」の核心は軍人として民間人を虐殺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とにあった。近代的な意味での国家は、一切の暴力を国家権力に収斂し、国民を外部の暴力から保護することを至高の意義とする。だが、韓国をはじめ多くの新生国家では、国家が国民を大量虐殺する事件が頻繁に発生した。植民地から脱して新たに国家を樹立する過程で、理念と陣営の対立によって生じた国家暴力は、今も拭えぬ傷として残る。

日本帝国主義の植民地から解放された3年目の1948年春、済州島で4.3抗争が起きた。事案の核心は「解放された祖国とは南北に分断された祖国ではない」という命題を実践した反分断運動にある。南朝鮮での単独選挙に反対した済州島民の選挙ボイコットの後で、済州島全域で大々的な討伐が行われた同年秋、麗水に駐屯していた第14連隊に済州島討伐出動命令が下されたが、軍人たちは済州に向かわなかった。それを反乱とするか蜂起とするか、まだ歴史的定義は下されていないが、「麗順事件」「麗順反乱事件」「麗水第14連隊反乱事件」「麗順蜂起」「麗順抗争」「麗順軍乱」などの名付けを持つこの事件に対するこれまでの辞書的定義はこうだ。

麗水・順天事件:1948年10月19日、全羅南道麗水に駐屯していた国防警備隊第14連隊に所属する一部軍人が起こした事件。

「事件」という言葉には、過去に発生した出来事に距離を置いて眺める客観化の効果がある。しかし、それはそこにどんな歴史的意味があるのかという価値評価を担保できない。ここに、72周年を迎えた麗順事件を麗順「抗争」として究明しようとする、ある芸術家の熾烈な努力の結実がある。朴錦晩(パク・クンマン)の「麗順抗争」連作個展がそれだ。

順天大学校博物館で開かれている「朴錦晩:麗順抗争歴史画展」(2020年10月12日-31日)では麗順抗争を扱った20点余りの連作が展示されている。朴は、麗水、順天、求礼、伐橋などで続いた「麗順抗争」の全貌を20点余の絵画に描いた。麗水の歴史学者である朱哲姫(チュ・チョルヒ)博士をはじめとする多くの人々の証言と資料、考証を土台にした連作だ。

自分の祖父が麗順抗争の主役として当時の虐殺で死亡したことを最近知った朴は、より切実な思いで、「麗順」の正名を考えながら連作に邁進した。彼は歴史的事件を追体験し、資料を探し、現場を踏査して証言を聞き、考証を受ける熾烈な過程を経た。彼の絵には虐殺の被害者遺族の悲しみへの共感はもちろん、抗争の発生と展開過程の視覚的喚起という意味が込められている。

それは、長期にわたって国家の観点からただ左翼暴動として記録されてきた歴史叙述を検証する感性的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場をもたらしたという点で、麗順抗争正名運動としての価値を持つ。済州4.3が4.3抗争としての正名を課題とするように、済州島民を虐殺することを拒否して蜂起した麗順事件が麗順抗争に正名する過程で、朴錦晩の絵画は公論の場に跳躍する歴史批判の芸術として機能しているのだ。

図版1 朴錦晩 <梧桐島にて>キャンバスに油彩 2019 
図版2 朴錦晩 <お父さん> キャンバスに油彩 2019


The Path of correcting the title of “Yeosun”
GIM Jungi


Appeal to the people of our country:
We are the sons of the Joseon people, workers and peasants. We are well aware that our mission requires us to defend the land and devote our lives to the rights and welfare of the people. We, as sons of Joseon refuse to massacre fellow countrymen in an attempt to mobilize us for the indiscriminate slaughter of the patriots of Jeju Island, and we resolved to make a general stand for the welfare of the Joseon people.
1. Opposing fratricidal war 
2. Immediate withdrawal of U.S. forces
The protest Soldiers' Committee for the Refusal to Defeat Jeju


We are taught in history textbooks that the historical events in Yeosu and Suncheon, which broke out on October 19, 1948, are known as the military rebellion by the leftist soldiers. However, as the text of the above appeal indicates, the core of the 'Yeosun' was that as a military man, he could not massacre civilians. In the supreme significance of the modern state is that it converges all violence with state power and protects its citizens from external violence. However, in South Korea and many other nascent states, there were frequent incidents of the state committing genocide against its citizens.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 new nation away from colonialism, the violence that resulted from the conflict between ideas and camps remains an indelible scar.

In the spring of 1948, three years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s colonial rule, the 4.3 uprising broke out on Jeju Island. The crux of the matter was an anti-dividend campaign that put into practice the proposition that "a liberated homeland is not a homeland divided into North and South." In the fall of the same year, the 14th Regiment, which was stationed in Yeosu, was ordered to dispatch Jeju, following an election boycott by Jeju residents who opposed a separated election in South Korea, but the soldiers did not head to Jeju Island. Although there is still no historical definition of the incident as a rebellion or an uprising, here are the dictionary definitions of the incident so far, with names such as the "YeosunIncident," “YeosunRebellion," "Yeosu 14th Regiment Rebellion," "Yeosun Uprising," and "Yeosun conflict,” “Yeosun Disturbance”. 

Yeosu-Suncheon Incident: an incident on October 19, 1948, caused by some soldiers belonging to the 14th Regiment of the National Defense Guard stationed in Yeosu, Jeollanam-do.

The word "incident" has the effect of objectifying a distanced view of events that occurred in the past. However, it cannot guarantee an assessment of the value of any historical significance to it. Herein lies the fruition of an artist's fierce efforts to investigate the 72nd anniversary of the Yeosunevent as Yeosun "uprising". This is the case with Park Geum-man's solo exhibition of "YeosunConflict," a series of works.

A series of more than 20 works on the subject are on display at the Suncheon National University Museum from October 12 to 31, 2020, in an exhibition titled "Park Geum-man: Yeosun Uprising historical painting". In more than 20 paintings, Park has depicted the entirety of protests that continued in Yeosu, Suncheon, Gurye, and Beolgyo and other areas. The paintings are based on the testimonies including Yeosu historian Dr. Joo Cheol-hee, documents, and historical evidence. 

Park, who recently learned that his own grandfather had died in the massacre of that time as a leading figure in the Yeosun uprising, was even more compelled to work on the series as he pondered the true name of "Yeosun”. He went through a fierce process of reliving historical events, searching for documents, examining the site, listening to testimonies. His paintings are not only meant to sympathize with the grief of the victims' families of the massacre, but also to visually evoke the outbreak and development of the conflict.

It has value as a political movement for the Yeosun uprising in that it has set the stage for emotional communication that evaluates the long-standing history descriptions recorded as left-wing riot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nation. In the same way that Jeju 4.3 was tasked with legitimizing the 4.3 as 4.3 uprising, the Yeosun Incident, which refused to massacre the people of Jeju Island, was legitimized as the Yeosun Uprising, Park's paintings serve as an art form of historical criticism that leaps into the arena of public discourse.

Fig.1  Park Geum-man<Odong Island> oil on canvas 2019
Fig.2  Park Geum-man<father> oil on the canvas 2019.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예술과학연구소장,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장

 * 필자의 사정으로 중국어 번역 원고 게재가 잠시 늦어지고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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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2020-10-27 18:00:11
제주도민의 빚, 여순의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11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