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3) 40여년 전 효돈초등학교 운동날의 기억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할 새로운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게 될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연재는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이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글

벌써 10월 끝자락 가을이 한창 깊어지고 있습니다. 

시간 참 빠르지요. 10월 이라니…. 이 편지를 쓰며 무심코 “참 시간 빨리도 간다”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습니다. 

10월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잠시 떠올려보시지요. 

홍시, 단풍, 가을 소풍, 그리고 가을 운동회가 떠오릅니다. 이맘때 마을 초등학교마다 가을 운동회를 했습니다. 제가 다닌 효돈초등학교에서도 어김없이 가을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1960년대 제주지역 학교 운동회 풍경. 출처=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1960년대 제주지역 학교 운동회 풍경. 출처=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카바를 신고 간 운동날

가을 운동회를 그때 40여 년 전 우리들은 ‘운동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운동날이라고 발음해 보니, 단지 ‘회’ 한 음절을 뺐을 뿐인데, 지금의 운동회와는 사뭇 다른 어감으로 다가오네요. 운 동 날. 한 글자씩 따로 떼어 발음하면서, 그때 1970년대 운동날을 기억해봅니다. 

운동날에는 ‘카바’라고 하는 일종의 덧신을 신었습니다.(Cover를 그렇게 발음한 것으로 보입니다.) 카바는 허연 광목천의 재질에 고무신 모양인데 양쪽에 끈을 달아 발등위로 묶어 고정시킬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카바를 신고 신발을 신은 게 아니라, 그것만 신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맨발이나 다름없는데도 발바닥이 아프지 않았습니다. 지금보다 울퉁불퉁한 자갈에, 운동장에는 돌멩이들이 널려 있었는데 말이지요. 사실은 아팠겠지만 그냥 견딘 건 아니었을까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카바 대신 실내화를 신는 것으로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하지만 실내화를 신고 달리기를 하면 자꾸 미끄러져서 오히려 맨발 같은 카바를 아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때 100미터 달리기를 꽤 잘했거든요. 지금도 가끔 한라수목원에서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하면서 속으로 ‘살아있네’ 합니다.  

만국기, 희사 모자

운동날, 학교에 들어서면 맨 먼저 펄럭이는 만국기가 사뭇 벌써부터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 걸린 국기들을 보며 일부러 나라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발음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따금 만국기가 바람을 맞으면 ‘피피피피’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만국기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파란 하늘이 펼쳐지면 제 이름, 가을하늘 민(閔)과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로 시작하는 애국가 3절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만국기 아래를 거닐면 비로소 운동날인 게 실감났습니다.

구령대 옆으로 하얀 장막이 펼쳐졌습니다. 하얀 장막 가운데에는 ‘기 효돈국민학교 0회 동창회 증’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장막 맨 앞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곳에서 접수를 받았습니다. 접수란 다름 아닌 찬조금으로 그때는 그것을 ‘희사’라고 불렀습니다. 자녀의 학년, 반을 적고 돈이 든 봉투를 넣으면 무궁화꽃이 감싸는 ‘효돈’이라는 마크가 선명한 모자를 줬습니다. 운동날 그 모자를 쓴 사람은 희사를 한 사람이거나 선생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누나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희사를 하지 않으셨다 했습니다. 제가 비로소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희사를 하셨습니다. 다른 어른들 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180cm인 아버지가 희사하고 받은 모자를 쓴 모습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 불운했던 4학년 운동날

운동날에는 학년마다 달리기를 두 번씩 했습니다. 한 번은 그냥 달리기, 또 한 번은 장애물 달리기를 했습니다. 장애물 달리기 중에서 특히나 6학년의 ‘물건 찾아 달리기’는 가장 재미있는 종목이었습니다. 

보통 여자들만 이 경기를 했는데 트랙 주변에 구경꾼들이 몇 겹으로 모였습니다. 이 경기는 달리기 실력보다는, 순전히 얼마나 쉬운 물건이 적혀있는 종이를 고르느냐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아주 쉬운 청군 머리띠, 실내화, 머리핀 같은 물건이 나오면 무조건 1등이었고, 좀 더 디테일 할수록 등수와 멀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지팡이를 든 남자, 분홍색 치마, 흰 고무신을 신은 여자 등이 적힌 종이를 뽑고는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재미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육상으로 전도소년체전 금메달을 땄던 우리 누나도 ‘흰 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적힌 종이를 뽑아서 3등 안에도 못 들었습니다. 사실은 그때 흰 저고리를 입은 우리 큰 어머니를 발견했는데 워낙 달리기가 느리셔서 두고두고 미안해했습니다. 또 “밤 색 구두를 신은 남자!”라고 외치는 소리를 제 아버지가 듣고 뛰어나가, 아예 그 6학년 여자를 업고 뛰어 1등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운동날이 끝나면 동네사람들 사이에서 몇 일간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4학년 운동날은 이래저래 안 좋았습니다. 우선 오전에 있던 달리기에서 뛰는 도중에 실내화가 미끄러져 가까스로 3등을 했습니다. 점심 바로 앞에 했던, 장애물 달리기는 운동장 바닥 양옆에 팽팽하게 당겨진 그물 속으로 들어가서 통과하는 경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군대의 낮은 포복 자세였습니다. 그 경기에서 그물에 들어갈 때부터 한참 헤맸고, 머리띠까지 잃어버리고 꼴찌를 한 그야말로 불운한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손에는 상으로 받은 공책은 달랑 3등해서 받은 한 권 뿐이었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건 홍시를 먹다가 하얀 체육복 하의에 묻어서 흡사 똥 묻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1960년대 제주지역 학교 운동회 풍경. 출처=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1960년대 제주지역 학교 운동회 풍경. 출처=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간첩을 잡자!

간첩을 잡기로 했습니다. 

그때는 반공의식 고취와, 신고정신 함양을 위해, 운동날에 모의간첩 신고가 있었습니다. 운동날 점심때가 되면 방송으로 “우리 학교에 간첩이 투입되었습니다”라고 시작하며 인상착의를 설명했습니다. 모의 간첩을 발견 후 신고하면, 단체 경기의 승점보다 훨씬 높은 점수가 배정되었고, 무엇보다 신고한 아이는 무려 공책 10권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신고 방법은 모의 간첩을 발견하면 “간첩 잡았다!”를 크게 외치고, 같이 구령대 옆 천막 본부로 들어가면 됐습니다. 

‘그래! 간첩 잡자.’

모의 간첩을 잡아 오늘의 불운을 만회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공책 10권이 탐났습니다. 

점심을 후다닥 먹고, 방송에서 불러준 ‘밤색 구두에 회색 바지, 하얀 와이셔츠! 짙은 갈색 잠바에 하얀 모자, 중간키의 남자’를 연신 곱씹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점심을 먹거나, 모처럼  받은 돈에 이것저것 사고 놀고 있을 때, 아무도 몰래 제가 혼자 간첩 잡기를 시도하는 것이 훨씬 성공할 확률이 높아 보였습니다. 

교문 양 옆으로 높고 넓은 돌담이 있었습니다. 그 담 밑으로는 뿌우연 먼지를 뒤집어 쓴 냉차, 호떡, 솜사탕, 홍시, 고구마튀김을 파는 자판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담 위로 먼저 올라가 다시 인상착의를 곱씹으며 운동장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았고, 하나하나 인상착의를 위아래로 맞추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학교 건물 주위를 한 번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인상착의를 바로 방송에서 알려줬는데 벌써부터 사람들 사이를 다니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 없는 곳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요. 정문 왼쪽에 있는 자연 시간에 관찰하는 암석 표본들이 전시된 곳을 살폈고,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마다 열매만 대롱대롱 달려있는 먹구슬나무가 앞에 있는 5~6학년 교실들도 봤습니다. 

학교 후문 뒤편에 있는 풍치원쪽으로 갔습니다. 후문은 주로 동상효 아이들이 학교 올 때 이용했는데, 그 앞으로 아름드리 후박나무들이 네 모퉁이를 에워싼 풍치원이 있었습니다. 풍치원은 그늘이 좋았습니다. 그 가운데 콘크리트로 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을 더위를 식히고, 한 숨 돌려 멍하니 후문 왼쪽 음악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친절했던 간첩 아저씨

그때 음악실 계단을 등지고 담배 피고 있는 한 아저씨가 보였습니다. 뒷모습만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심코 보는데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간첩이다.’

내 예측은 정말이지 탁월했습니다. 찬찬히 위 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밤색 구두에 회색 바지, 하얀 와이셔츠! 짙은 갈색 잠바에 하얀 모자, 중간키의 남자!’ 
등지고 있어서 하얀 와이셔츠는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걸 제외한 모든 것이 일치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천천히 일어나서 그 간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이제 큰 소리로 “간첩 잡았다”를 외치면 됐습니다. 그런데 풍치원과 음악실 채 30미터 남짓 거리를 걸어가는데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 혼자 다니는 게 아니었어. 다섯 권씩 나눌 걸…’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마음 속 크게 기합을 넣고 용기 내어 걸어갔습니다. 이제 큰 소리로 외치기만 하면 됩니다. 

간첩의 바로 등 뒤로 제가 섰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간첩의 오른 쪽 팔뚝을 잡았습니다. 

“저기... 저기... 간첩이지예?”  

저는 겨우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 간첩 아저씨는 살그머니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또 다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혹시 이 아저씨가 모의간첩이 아니고, 진짜 간첩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죽었다던, 이승복 어린이까지 생각났습니다. 주위에는 간첩아저씨와 저 뿐이었습니다. 

“나 간첩 아니여.” 

아저씨가 담배를 땅바닥에 손으로 짓눌러 끄고 저를 지긋이 봤습니다. 저는 슬그머니 아저씨의 오른쪽 팔뚝을 놓았습니다. 

“간첩은 밤색 구두랜 했잖아이, 이 구두는 황토색이녜. 경허고 하얀 모자 썼댄 해신디, 난 모자도 안 써시녜게…. 나 172여게, 172면 큰 키 아니냐? 간첩은 중간키랜 헌거 닮은디….”

아저씨는 자신이 간첩이 아닌 걸 참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180cm인 우리 아버지 보다, 훨씬 작은 172cm가 큰 키라는 얘기에도 수긍이 갔습니다. 아저씨가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는 얘기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 다행이다.’ 아저씨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너 훌륭헌 아이여이. 맻 학년 맻 반이니? 이름 뭐니? 선생들신디 골앙 꼭 너신디 공책 주랜 허키여.”

제 공책까지 챙겨주려는 마음 좋은, 착한 아저씨였습니다. 점심 시간이 끝나갈 즈음이라,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모여 있는 우리 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아 다행이다.” 

1960년대 제주지역 학교 운동회 풍경. 출처=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1960년대 제주지역 학교 운동회 풍경. 출처=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오후 첫 번째 할아버지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이 낚싯대를 방화수통에 드리우면 그 속에 있는 아이가 생활 용품을 고리에 걸어주었습니다. 무료하게 4학년 운동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학교를 침투했던 간첩이 잡혔습니다. 투철한 신고 정신으로 간첩이 잡혀서 우리 학교는 이제 안전합니다. 간첩을 잡은 어린이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시상이 있겠습니다.” 

할아버지 경기가 끝난 바로 뒤, 방송이 들렸습니다. 구령대로 올라간 여자아이는 공책 10권을 상으로 받았고, 구령대 밑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모의 간첩이 서 있었습니다. 여자아이에게 잡힌 간첩은 제가 풍치원 옆, 음악실 계단에서 저에게 팔목을 잡힌 친절한 아저씨였습니다. 

그 간첩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이리저리 마음속에서 흔들거렸습니다. 운동날이 다 끝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데 계속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아니라고 했을까?’

이제 10월 끝자락,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찹니다. 주말에 효돈가는 길에 본 한라산 단풍은 참 고왔습니다. 이럴 때 항상 감기 조심하시고요.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며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왜 그 간첩아저씨는 제게 간첩이 아니라고 했을까요?”

2020년 10월 27일 가을 햇살 좋은 날
강충민 올림

강충민 시민기자는?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주의소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아,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제주향토음식점 대표를 했고, 지금은 독서논술교실을 하며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늘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소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는 건강한 제주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고 참여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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