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12) 제주신보 속 한국전쟁과 제주 ②
1950년 10월10일~1952년 12월 16일까지 전황·지역뉴스·미담 다양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중요한 계기다. 이후 UN군과 한국군은 북진을 이어가면서 한때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품기도 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또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한국전쟁 당시 도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해준 <제주신보>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전시 상황을, 외신 소식을 포함해 매일 주요뉴스로 보도했다. 더불어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의 주도권을 국군과 연합군이 잡고 나서는 다양한 지역 소식도 지면을 통해 알렸다.

# 세기적 38선 돌파, 숨통 트이는 제주도

1950년 10월 10일자 1면에는 ‘수(遂)!! 국토양단의 마선절단 / 정의UN군 세기적 38선 돌파 / 정예 미 기갑사단도 북진 개시 / 아(我) 국군 원산에 돌입!’이란 기사가 보도됐다.

당시 유엔은 그해 10월 7일 총회를 열고 압도적인 표수로 ‘한반도 통일·부흥’에 대해 결의한다. 총회를 계기로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며 본격적으로 북쪽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1950년 10월 10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1950년 10월 10일 제주신보 1면. ⓒ제주의소리

1950년 10월10일자 2면에는 달라진 전황에 따른 일상을 보여주는 소식이 등장한다. 

‘어렵 제한 전면적 해제 / 10월 10일 0시부터 / 어민에 일대 낭보!! / 평화어로에의 복귀’라는 제하의 기사다. 전쟁이 수세에 몰리면서 어업 활동이 일시 막혔는데 “전국(戰局)이 호전함에 따라” 다시 어업 활동이 허용되면서 어민들의 숨통이 트였다는 내용이다.

10월 17일자 ‘제주-광주 간 / 불원(不遠) 전보 재개’ 기사 역시 비슷한 의미다. 머지 않아 전보가 재개된다는 뜻의 제목 아래로 "제주도와 광주 사이의 일반전보 취급을 위한 연결시험이 성공되어 곧 종전과 같이 전보 취급이 재개될 것 것이니 도민은 기대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기사다. 

1950년 10월 10일 제주신보 2면 기사. ⓒ제주의소리
1950년 10월 17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 한층 여유가 느껴지는 분위기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지난 2002년 ‘제주4.3사건 자료집’을 제작하면서 참고 자료로 만든 <제주신보> 복사본에는 1950년 10월 17일 기사 다음으로 1951년 3월 17일 기사가 이어진다. 약 5개월간의 신문 기록이 빠져있다. 신문 자료 확보 당시부터 이 기간의 신문이 남아 있지 않아 유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전쟁은 1950년 겨울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UN·한국군은 후퇴하기에 이르고, 이후 치열한 공방을 계속하면서 UN·한국군은 1951년 3월 24일 38선을 다시 돌파했다.

<제주신보> 3월 25일자에는 ‘맥 원수 성명 / 남한서 적군 완전 소탕 / 대중공 교섭 용의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맥 원수’는 맥아더 장군을 뜻한다. ‘남한서 적군 완전 소탕’이란 표현은 중공·북한군으로부터 서울을 다시 탈환하면서 재공세를 펼치는 전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3월 25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비록 목전에 둔 한반도 통일은 실패했고 한때 반격을 허용하기도 했지만, 기사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시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읽혀진다.

7월 1일자 1면에는 ‘만·리·풍’이라는 코너가 등장한다. 짧은 기사들을 모은 코너인데 지금도 여러 신문지면 상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만·리·풍’에는 7월에 맞게 “럭키세분’의 칠월이니 부듸…”라는 농담 섞인 문장을 나오는 등 부드러운 글로 채워졌다. 2면에는 ‘문화코너 철학과 현실’이란 기사가 한 쪽을 차지했다.

7월 3일자 2면에는 ‘꽃피는 문화제주 / 상설 영화관 신설 태동 중’이란 기사가 등장했다. 제주읍내에 상설영화관 설치를 일부 인사들이 바로 추진 중인데 취재 결과 지역 모기업주와 읍 당국이 합작해 신설에 필요한 재원을 양측이 공동부담하기로 했다는 기사다. 

7월 4일 2면에는 ‘고마운 군인 아저씨 / 상금을 몽땅 아동시에 기증’이라는 훈훈한 미담 기사가 등장한다. 아동시(兒童市)는 사단법인 한국보육원이 설립한 원내 자치기구다. 한국보육원은 1951년 제주에 설립한 기관으로, 전쟁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유엔군 지원으로 1950년 10월 설립된 서울시립아동 양육원이 전신이다. 한국보육원의 초대 원장은 원불교도 황온순 씨가 맡았다.

전쟁 중 발생한 고아 800여명을 서울에서 제주로 군용기로 싣고와 '아동시'에서 생활하도록 했는데, 당시 군인들이 체육대회에서 받은 상금을 아동시에 전액 기증해 '고마운 군인 아저씨'라는 제목의 훈훈한 미담이 실렸던 것.  

전쟁 고아들 외에도 전쟁통에 몰려들었던 약 8만명 가까이 되는 피난민으로 혼잡했던 제주 상황을 다룬 기사도 있다.

7월 5일 2면에는 ‘본도 내 요 구호자 / 무처 칠만팔천명을 초과’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본문에는 “한 때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일대 혼잡을 이루다가 전국 호전과 더부러 또 다시 발거름을 돌리고 있는 본도 피난민...”이라고 적혀있다. 제주로 피난 온 인원 가운데 거처가 없는 사람들이 상당해 전쟁통에 넘쳐나는 피난민으로 혼잡했던 제주의 당시 상황을 알려준다.

1951년 7월 1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1951년 7월 3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1951년 7월 4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1951년 7월 5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8월 18일자는 이승만 대통령 소식으로 주요 지면을 채웠다.

1면에는 ‘이 대통령 돌연 내도 / 훈련소 읍내 등을 시찰 / 작 십칠 오후 이도’라는 제목 기사가 최상단을 차지한다. 지난 16일 이기붕 국방장관과 함께 제주를 방문했다는 내용이다. <제주신보>는 시론 ‘이 대통령을 환영함’까지 더하면서 “우리의 국부 이대통령”에 대한 환영의 뜻을 전한다.

2면은 이기붕 국방장관과 기자와의 문답 기사가 실렸다. 이기붕 장관은 당시 제주에서 운영되던 육군 제1훈련소의 운영 상황을 “경탄”하면서 “토벌에 군 불필요”라는 입장도 내비친다. 이는 제주4.3 이후 남아있는 무장대 세력에 대한 대처로 보인다.

1951년 8월 18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1951년 8월 18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육군훈련소는 1951년 1월 22일 대구에 있던 육군제1훈련소가 제5훈련소와 합병해 제주로 옮긴다. 육군제1훈련소는 1953년 1월 1일 '강병대'로 무대 명칭이 바뀌고, 1956년 1월 1일 폐쇄된다.

<제주신보>는 8월 18일에서 한 동안 공백 상태였다가 1952년 1월 1일 새해 신문으로 이어진다.

1일자 신문 최상단에는 ‘통일 재건 / 결의도 새로운 각계신년사’가 크게 박혀있다. 그리고 제주도지사 최승만, 육군훈련소장 겸 제주도 지구 위수 사령관 육군 준장 백인엽의 신년사가 실렸다. 백인엽은 올해 7월 사망한 백선엽 전 장군의 형이다.

1952년 1월 1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 전쟁통 도청사 준공...대대적으로 홍보

1952년 12월 16일 제주도청사(현 제주시청사) 준공식 소식은 한 면 전체를 할애할 만큼 비중 있게 소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만 대통령, 밴 플리트 UN군 총사령관, 백선엽 육군 참모총장 등 당시 최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제주도청사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8일 첫 삽을 뜨고 다음 해 11월 30일 공사를 마쳤다. 만에 하나 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될 경우 정부 청사로 사용할 상황까지 고려해, 벽 두께만 1m에 달할 만큼 탄탄하게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제주신보>는 다음 날인 17일자에 보도했다. 2면 전체를 준공식 소식으로 채웠다. 이 대통령의 장문 연설도 빼곡하게 실었다.

기사 제목을 보면 ▲이 대통령, 밴 장군 …… 돌연 내도 ▲도청사 낙성식에 임(臨) / 체재 5시간, 군함으로 향목(向木) ▲이 대통령께서 간곡한 유시 / 전보다 현저한 발전 / 합십합력코 복지 이루라 ▲국군의 증강 발전은 / 영원한 평화에의 첩경 /  밴 장군 환영 대회서 역설 ▲삭(朔) 풍하 낙성식 성황 / 말쑥히 신축된 도청사 ▲격찬 받은 산업전 / 대통령 밴 장군 부처 첫 참관 등이다.

1952년 12월 17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52년 12월 16일 제주도청사 준공식 당시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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