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12) 멜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장 제주음식연구가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들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격주로 '제주댁, 정지에書'를 통해 제주음식에 깃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글]

나의 어머니는 가파도 토박이다.

모슬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스무 살에 취직하겠다고 서울로 올라가서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셨고 곧 함께 제주에 내려오셨다. 제주의 여성들이 생활력과 경제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엄마는 결혼을 한 후 IMF 전 까지는, 그러니까 17년 동안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여느 집이나 다 그랬겠지만 IMF는 우리 가정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아빠의 실직으로 엄마의 30대 후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시절, 나는 고등학생, 여동생은 중학생, 남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나와 여동생의 학비와 남동생의 학원비, 성장기인 우리들이 먹어야 할 식비가 가장 문제였고, 그 외에도 당장 들어가야 하는 돈도 한두 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앞이 깜깜해진 엄마는 무슨 생각이셨는지 아빠가 타고 다니시던 차를 중고로 넘기고 아빠의 퇴직금을 보태 트럭 한 대를 사셨다.

그렇게 우리 집 차가 바뀌었다. 승용차에서 트럭으로.

지금도 기억이 난다. 파란 포터를 사셨는데 며칠 후 그 포터는 초록색 뚜껑을 달았다. 그 이후 엄마는 매일 전화기를 들어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확인하시고는 밤마다 외출하셨다. 그리고는 새벽 혹은 아침에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옷과 트럭에서는 쾨쾨한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그 트럭이 지독히도 싫었다. 등교할 때는 버스로 등교를 하지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는 오후 11시경, 집으로 가려면 부모님이 학교에 데리러 오셔야 했다. 그 비린내 나는 트럭을 타야 하는 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가방을 챙기고 백 미터 달리기 하듯 달려가 제일 먼저 교문을 통과했다. 다른 친구들이 교문으로 나오기 전에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사실 예쁜 옷을 입은 세련된 엄마 대신 늘 비린내가 배어 있는 작업복을 입은 엄마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혹시 길을 걷다가도 찻길에 초록색 뚜껑이 있는 파란 트럭이 저 멀리서 보이면 황급히 골목으로 숨어버리고는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 역시나 낮에 엄마는 전화기를 들었다. 이후 저녁밥을 차린 후 주섬주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엄마가 도대체 밤마다 어딜 가는지 궁금했던 나는 엄마한테 조심스럽게 따라간다고 이야기했다.

“엄마 나도 같이 가서 도와줄까?”
“아이고, 밤에 안 된다게. 집에 이시라.”
“아냐. 엄마 도와줄게. 나 옷 갈아입는다.” 

엄마는 외갓집 가는 방향으로 차를 운전했다. 

우리 집은 제주시내라서 외가인 가파도를 가려면 서부산업도로(지금의 평화로)를 경유해 약 한 시간 동안 운전을 해야 했다. 지금처럼 길이 잘 닦여있을 시절이 아니라 도로가 무척 험했고 또, 가로등도 거의 없어 밤 10시 넘어 운전하기에는 무서운 길이었다. 나와 엄마는 그렇게 그 어두운 길을 통해 한라산을 넘어 모슬포항에 도착했다. 밤의 모슬포항은 낮에 보았던 풍경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부신 전등을 단 배들이 시시각각 항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여러 명의 상인들이 부둣가 선착장 바로 앞에서 컨테이너를 수십 개씩 쌓아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중에 젊은 여자는 엄마밖에 없었다. 

남자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혹은 더 나이 드신 아줌마들이 더러 계셨지만 혼자 계신 분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남자 분들과 함께 계셨다. 엄마는 나보고 트럭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두꺼운 작업복 잠바와 머플러, 모자를 쓰고(날씨가 꽤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생물을 받기 위해 거친 남자들 틈에 끼어 배가 뭍에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모슬포항은 엄마의 외가여서 아는 친척들도, 삼촌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한테 먼저 우선권을 주는 건 그 세계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물론 삼촌들이 젊은 애기 엄마가 고생한다며 한 컨테이너를 서비스(?)로 더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엄마도 똑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가격을 흥정했다. 몇 번의 흥정 후 계약이 성사되면 엄마는 그 배 앞에 준비한 컨테이너를 가지런히 내려놓았고 삼촌들이 반짝반짝 거리는 그것들을 엄마의 컨테이너에 쏟아냈다.

맞다. 그 반짝이는 그것들은 바로 멜이었다. 

엄마는 매일매일 전화기를 들었던 이유는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 엄마는 123번으로 전화를 걸어 풍랑주의보가 내려 배가 뜨지 않는지를 확인하고 밤마다 모슬포항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멜 컨테이너를 트럭에 가득 싣고 보통 밤 11시부터 한림, 애월, 하귀, 외도를 돌며 집집마다 배달을 했다. 엄마가 배달을 마친 집에서는 그 멜을 가지고 동이 트는 새벽에 조업을 하러 나간다고 했다. 엄마께 어떻게 조업하는 집으로 배달을 하게 되었냐고 물어봤더니 몇 집은 소개해줘서, 나머지는 무작정 마을을 돌며 조업하는 집인 것 같으면 들어가서 팔아달라고 해서 그렇게 알음알음 배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슬포에서 해안마을을 따라 배달을 하며 집에 오면 새벽 3시나 4시. 혹은 더 늦으면 6시, 하루의 반나절 정도를 이 일을 하셨으니 그 시기 엄마의 냄새는 늘 비린내일 수밖에!

그래도 엄마가 원하는 만큼 멜을 받으면 그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자기 기상이 악화돼서 멜 잡이 배들이 멜을 못 잡고 일찍 온다거나, 양이 넉넉지 않으면 허탕 치고 그냥 돌아가는 일도 허다했다. 혹시 몰라 마지막 배까지 기다리는 초조한 엄마의 모습도 아직도 나에겐 선명하다. 다른 삼촌들이 모두 가고 엄마는 혼자 남아 저 멀리 수평선에 있는 배가 항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 배의 불빛 하나만 바라보았다. 

엄마의 그 멜은 우리 집 생계가 달린 멜이었다. 허탕을 치는 날이면 하릴없이 그 자정이 넘은 시간 깜깜한 한라산을 혼자 넘어오시기도 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다른 삼촌들이 모두 가고 엄마는 혼자 남아 저 멀리 수평선에 있는 배가 항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 배의 불빛 하나만 바라보았다. 엄마의 그 멜은 우리 집 생계가 달린 멜이었다. 사진=김진경. ⓒ이로이로

그리고 가끔 삼촌들이 넉넉하게 멜을 주거나 멜이 남으면 다시 낮에는 중산간 마을로 무작정 운전하고 다녔다. 이런 날 엄마의 점심은 늘 빵과 우유였다. 그래서 엄마의 파란 트럭에는 늘 먹던 빵 봉지와 우유곽이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내가 매점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수다 떨며 먹었던 빵과 우유는 그 시절 엄마의 외로운 점심이기도 했다. 

엄마는 혼자 트럭을 타고 중산간 마을 여기저기를 다녔다.

“멜 삽써, 멜 삽써, 싱싱한 멜이 와수다. 멜 삽써.”
“멜 삽써, 멜 삽써, 싱싱한 멜이 와수다. 멜 삽써.”

그렇게 밤낮으로 엄마가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돈으로 바뀌지 않았던 멜들은 결국 우리 집 밥상으로 올라왔다. 멜국으로도 올라오고 멜조림으로도 올라왔다. 그래도 남으면 멜을 꾸덕꾸덕 말려 멜 지짐을 해주기도 하고 그래도 남으면 멜젓을 담그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엄마의 멜을 사실 밥상에서 마주하기가 너무 싫었다. 

우린 그렇게 엄마의 멜로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했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학교에 안 가는 토요일이면 늘 엄마와 함께 모슬포로 동행했다. 

엄마는 줄을 서고, 나는 트럭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배들이 하나씩 들어오면 나도 목장갑을 끼고 트럭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엄마 옆에 섰다. 추울 줄만 알았던 바닷바람은 꽤 상쾌했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이 시원했다. 상인들이, 삼춘들이 나보고 기특하다며 엄마한테 내 칭찬을 했다. 엄마의 얼굴은 저 환한 멜 배의 전등처럼 밝게 차올랐다. (제주에선 성별에 상관없이 나이든 어른들을 삼춘이라 부른다)

난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되기 전까지 토요일 밤, 엄마의 파트너가 되었고 엄마의 트럭은 내 아지트가 되었다. 엄마가 운전을 멈추면 난 트럭에서 내려 짐칸에 있는 노란색 멜 컨테이너를 할아버지네, 삼촌네 집 앞에, 혹은 창고에 놓고 트럭에 올라탔다. 하지만 내가 엄마와 파란 트럭을 타고 엄마의 파트너가 되는 시간은 단지 친구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밤 시간뿐이었다. 여전히 친구들이 있는 곳이거나 학교 앞에서의 엄마의 파란 트럭은 나에게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존재였다.

1997년 이때 엄마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2020년 지금 내 나이도 서른아홉이다.

나이가 들어 내가 어른이 되고,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니 그때의 그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나도 10대 후반으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지만 엄마도 한창 꾸미고 싶고 예쁘게 다니고 싶을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행여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는 부끄럽고 창피했을 수도 있고, 엄마는 심지어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전업주부였는데 그렇게 트럭 하나를 타고 멜 삽써를 외치며 제주도를 누비셨다.

“엄마. 나 고등학교 때 생각해 보면 엄마 정말 대단한 것 같아. 그때가 내 나이였잖아.”
“아이고, 그때야 나도 무슨 용기였는지 창피하지도 않고 경 했던 거 닮아. 지금 하라고 하면 챙피행 못하켜.”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멜국.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멜은 꽃멜이 최고고, 왕멜은 별로여.”

엄마는 꽃멜이라고 불리는 셋줄멸을 가장 좋아하셨다. 조업하러 가시는 분들이 왕멜보다는 꽃멜을 더 선호하셨기 때문이다. 왕멜(불멜이라고도 한다. 학명은 눈퉁멸로 제주사람들은 펄눙멸이라고 부르는 어종으로 짐작된다.)은 주로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나오고 꽃멜은 보리 수확철부터 늦여름까지 나온다고 한다. 엄마의 기억에는 20년 전, 11월 초까지도 꽃멜 장사를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이에 기상의 변화인지, 해양자원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지금 10월 말의 제주바다에는 애석하게도 멜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멜국은 주로 급냉한 멜을 이용해서 끓인 멜국이다.

젓갈을 담을 때도 꽃멜과 왕멜은 차이가 있다. 꽃멜은 젓갈로 담아도 멜의 형체가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왕멜은 발효되면서 삭아버리면서 형체가 흐트러진단다. 그래서 왕멜젓갈은 끓여서 걸러내 맑은 액젓형태로 사용이 가능하다. 육지에서는 액젓을 넣어 김치를 담그지만 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잘 삭힌 생젓갈을 넣어 김치를 담근다. 엄마가 담근 젓갈은 맛이 좋아 주위에서 팔아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잘 부르지 않는 왕멜의 또 다른 이름, 불멜은 왜 불멜이었을까?

물론 불멜도 왕멜처럼 학명이나 공식명칭은 아니다. 다만 조업하러 나가는 어부들이 멜 잡을 때 등불을 아주 밝게 올려 잡는 멜이기 때문에 불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꽃멜도 역시 등불을 아주 밝게 하고 잡아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 그런데도 왕멜 만을 불멜이라고 불렀던 것이 재미있다.

이렇게 나에겐 멜은 학창시절에는 부끄러운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나를 지탱하게 해 준 보물 같은 존재이다. 최근 대정지역 마을 분들과 함께 ‘내가 먹었던 모슬포 추억의 밥상’이라는 주제로 프로젝트를 했는데 마을 분들에게도 역시 멜은 지금의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그 자체였다.

70년 넘게 대정에서 사신 어머님은 ‘멜뜨러 가게!!’라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면 ‘와~~!’라는 소리와 함께 뛰쳐나와 바닷가 원담으로 멜을 뜨는 모습이 마치 마을축제 같았다고 회고하신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바가지, 양동이를 들고 뛰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의 마치 눈앞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멜 철이 되면 항구가 멜로 발 디딜 틈 없었다는 대정 모슬포. 나의 마음을 보듬어 주었던 따뜻한 멜국 한 그릇이 이분들에게도 역시 마음을 어루만지는 힐링푸드였다고 한다. 멜을 한 냄비 가득 지져내면 그날 저녁 우리 집 식구들 밥상이 풍성해지고, 가족들이 앞다투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멜 음식은 대정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가족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끈함 이었다. 

대정 어머니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멜튀김을 유채기름으로 튀겼다고 한다. 유채기름을 쓰면 튀김을 할 때 거품이 엄청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 유채기름으로 튀겨낸 멜튀김의 맛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지금 콩기름으로 튀겨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고 단언하신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콩기름이 아닌 유채기름을 식용유로 사용했다고 한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머니의 멜국 레시피.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지금은 신선한 상태의 멜을 급속 냉동시켜 언제나 그 뜨근한 멜국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생겨났다. 

엄마의 멜국을 먹어본 지 언제였더라?

고등학생 시절엔 입도 대지 않았던 멜국이었는데 지금은 나의 힐링푸드 중 하나가 되었다. 나와 엄마를 끈끈하게 이어주었던 제주의 멜.

당신과 부모님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장 제주음식연구가

김진경은?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에서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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