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아침 두 번째…인동꽃

역시 새벽의 공기는 상쾌하다.

지저귀는 참새 소리도, 까치가 뱉아내는 짧은 음의 폭도 휘파람새가 길게 뿜어대는 소리보다 더 후련하게만 느껴진다. 거짐 십리 길을 걸어 학교를 오가다 멱을 감던 그곳이 역시나 반가웠다. 마삭줄이 노송을 휘감고 가을인 양 빨갛게 물들인 이파리들이 흥미롭다.

낫을 들고 보리밭 첫머리에 앉으면 코피 줄줄 흐르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보리 베다 게으름이 슬금슬금 다가와 유혹의 손길을 내밀면 주저하지 않고 일어선다. 이웃 밭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돌담에 잘도 열린 빠알간 산딸기보다 그윽한 인동꽃의 그 고운 향기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눈을 비비고 비벼도 보이지 않아 안절부절못하던 바보 같은 추억.

   
 
 
열심히 패랭이에 따 담아 집에 와선 아버지께서 마시려고 사다 놓은 술병 마다에 넣어 약술을 만들었던 기억을 떠올리자니 난 어느새 소녀가 되어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이 꽃을 금은화라고도 부르는데 내친김에 이 얽힌 이야기나 들어볼까요?

약이 된 황금빛 꽃···. 금은화

오래고 오랜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늙은 부부가 작은 약방을 꾸리며 오붓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부부에게는 무남독녀 외딸이 있었는데 인물 뛰어나고 맵시는 출중하며 마음씨 또한 아름다운 데다 손부리마저 몹시 여물었다.

그녀는 늘 머리에 금빛이나 은빛 나는 꽃을 꽂고 다니기를 즐겼으므로 사람들은 이름 대신 금은화처녀라고 불렀다. 아울러 마을의 처녀들과 각시들은 모두 그를 본떠 그처럼 치장하기를 좋아했다. 그만큼 금은화처녀가 자기식대로 치장하고 나서면 뭇사람들에게 으뜸으로 멋지게 보였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금은화처녀가 열여섯 살 나던 해에 그의 마을과 주위 마을에는 전에 볼 수 없던 큰 병이 돌았다. 일단 병에 걸리기만 하면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빼빼 말라 죽어 갔다. 집집이 근방에서 내로라하는 명의들의 좋은 약을 다 지어다 먹여도 병이 낫기는 고사하고, 병세는 점점 더하여 날마다 사람들의 죽어 나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일로 알게 된 금은화처녀는 안절부절못했다. 참으로 이런 몹쓸 병을 물리칠 수 있는 약이 이 세상에 없단 말인가? 그는 생각하던 끝에 아버지 어머니보고 집에 있는 갖가지 약으로 이 무서운 병을 물리칠 약을 만들어 보자고 제의를 드렸다.

"우리가 그런 명약을 만들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아예 그런 허무한 생각을 말아라."

그러나 금은화처녀는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우둔한 것이 범을 잡는다고, 그래도 모르지요. 더구나 온갖 정성 다하면 돌 위에는 꽃이 핀다고 했거든요."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디 한번 시험을 해보려무나."

사랑하는 딸이 뜻을 굽히려 하지 않자 그의 아버지는 끝내 허락해 주었다.

그리하여 금은화처녀는 곧 이 일에 달라붙었다. 그는 밤이고 낮이고 침식마저 잊어 가며 고심을 다해 약을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못된 병은 그의 집에까지 전염되어 드디어 금은화처녀의 어머니마저 몸 져 드러눕게 되었다. 한다 하는 명의들의 처방에 따라 약을 지어다 대접했으나 병이 나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 제가 만든 약을 한 번 대접해 볼까요?"

"글쎄, 세상 한다 하는 명의들의 약도 속수무책인데 네가 만든 약이 무슨 효험이 있으랴마는 이젠 백약이 무효로 사람이 죽게 돼 있는즉 더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이젠 그 약이라도 한 번 시험 삼아 써 볼 수밖에."

이리하여 금은화처녀는 자기가 만든 약을 어머니에게 대접했다.

   
 
 
아, 그런데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토하고 설사하던 어머니의 병세는 대뜸 호전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는 완쾌되었다.

"오, 잔디도 방귀를 뀔 때가 있다고 하더니 이는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다.

"아버지, 우리 이 약을 앓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갖다 드리지요."

"아무렴, 그렇게 하고말고. 어서 사방에 광고를 써 붙이거라."

금은화처녀는 역신을 물리치는 약을 무상으로 가져가라는 글발을 사방에 내붙였다.

이 소식은 재빨리 전해졌다. 문지방에 불이 나도록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이리하여 보름도 안 되어서 무섭게 떠돌던 몹쓸 놈의 병이 완전히 퇴치되었고 금은화처녀의 갸륵한 행실은 온천하에 저절로 소문나게 되었다.

이때 나라의 한 대신에게 조금 모자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대신은 매파를 보내어 금은화처녀와의 혼사를 청했다. 그러나 내막을 알게 된 금은화처녀와 그의 부모는 응할 리 없었다.

그러자 대신은 권세를 이용하여 마구잡이로 가마를 보내어 금은화처녀를 잡아갔다. 대신의 아들은 시시콜콜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태생 병신인데다 말도 할 줄 모르는 벙어리였다.

처녀는 너무나 기가 막혀 종일 흐느껴 울며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밤 어둠을 타서 집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간악한 대신은 어느새 사람을 파견해 지름길 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를 잡아 다시 가마에 앉혀서 달아났다.

‘이대로 잡혀가 평생을 속절없이 애간장을 태우다 죽느니 차라리 길에서 죽어 버리리라!’ 이렇게 결심한 금은화처녀는 산세가 험한 길목에 이르자 치마폭을 뒤집어쓴 채 훌떡 뛰어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마을 사람들은 금은화처녀의 신세를 몹시 슬퍼하며 이 몹쓸 세상을 한없이 저주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를 마을에서 가장 풍치가 아름다운 곳에 장사지내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그의 무덤에서 하얀색의 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 꽃은 이삼일 햇빛과 이슬을 받더니 다시 휘황찬란한 황금빛 색으로 변하면서 그 향기를 멀리까지 풍겼다. 사람들은 두말없이 그 꽃을 금은화라 불렀다.

그다음 해 마을에서는 또다시 많은 사람이 뜻하지 않은 눈병에 걸리게 되었다.

"생전에 금은화처녀는 우리를 위해 그 모진 전염병도 고쳐 주었으니 이 꽃도 틀림없이 이 병을 떼게 해 줄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믿었다. 그리하여 그 꽃을 따서 끓는 물에 타서 마시고 눈을 씻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불과 얼마 안 되어 눈병은 씻은 듯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로부터 금은화는 사람들의 열을 내리고 해독을 시켜 주는 훌륭한 약재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금은화처녀의 이름을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져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5~8월에 흰색으로 꽃이 핀 후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색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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