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갑을’ 아닌 ‘을 대 을’의 대결? 윈윈해법 기대

정조의 숨겨진 리더십을 조명한 김준혁 교수는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으로 대동법(大同法)과 함께 신해통공(辛亥通共)을 꼽았다. 광해의 대동법이 불합리한 납세 제도를 뜯어고친 것이라면, 정조의 신해통공은 왜곡된 상업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쉽게말해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한 게 신해통공이었다. 신해는 신해년, 즉 정조 15년인 1791년을 말한다. 

대동법이 공물(貢物,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사의 문턱을 없앴을 뿐(?)인 신해통공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되물을 수 있다. 모르는 소리다. 배경을 알고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장사의 문턱은 매우 높고도 견고했다. 그 벽은 조선 건국 이후 399년 동안 허물어지지 않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1791년 이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장사를 할 수 없었다. 흔히 시전상인이라고 하는, 국가 공인을 받은 상인 즉 도고(都賈)만 예외였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실은 매점매석을 하는 상인 혹은 상인조직의 다른 말이다.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난전(亂廛)을 금하는 권리,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쥔 시전상인들은 폭리를 취하기에 바빴다. 독점으로 인해 물가는 치솟았고,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시전상인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조정 관료들은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다. 

이러한 금난전권을 혁파하려 했으니 시전상인들의 반발은 실로 엄청났다. 그럼에도 정조(정승 채제공)는-김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신해통공을 밀어부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김 교수는 채제공의 문집 <번암집>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소개하며 신해통공에 대한 당시 세간의 평가를 대신했다. 

“1년 쯤 지나서 물화(物貨)가 모여들어 일용품이 날마다 넉넉해지니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여, 비록 전에 원망하고 저주하던 자들일지라도 공의(公議)가 훌륭했다고 했다”

너무 돌아왔다. 하나의 개혁 정책이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는지를 얘기하려하다가 무려 2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말았다. 

정작 하고픈 말은 따로 있다. 발행을 앞둔 제주 지역화폐 ‘탐나는전’ 얘기다.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 늦긴 했어도,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탐나는전 역시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지역 상권을 보듬자는 취지인 만큼 개혁적인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래픽이미지=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곧 발행될 제주 지역화폐와 관련, 농협 하나로마트의 가맹점 등록 허용 여부를 놓고 농민단체와 소상공인단체가 대립하는 양상이다. 윈윈해법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픽이미지=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그런데 지금 제주에서는 조금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모양새만 놓고 보면, 을(乙)과 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농민단체와 소상공인단체가 맞선 형국이다. 신해통공 시절과는 대척점이 다르다. 조선 후기 신해년에는 갑(甲, 시전상인을 비롯한 기득권층)과 을(일반 백성)이 대립 관계에 놓여있었다. 

농민단체와 소상공인단체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농협 하나로마트의 지역화폐 가맹점 허용 여부를 두고서다. 

둘 다 일리는 있다. 농민단체는 제주 경제를 지탱하는 농수축산물 소비 촉진을 위해서라도 지역화폐를 제한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소상공인단체는 하나로마트가 대기업 계열의 대형 마트 보다 실질적으로 중소 소상공인들에게 더 큰 타격을 주고 있다며 가맹점 등록 제한을 요구한다. 

의외로 복잡한 문제다. 이용의 편리성(접근성)과 확장성(소비촉진), 소상공인(골목상권) 보호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례(제주 지역화폐 발행 및 운영에 관한 조례)는 이미 만들어졌다. 조례만 따른다면 간단하다. ‘등록 제한 업종’으로 단란주점과 유흥주점,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른 대규모 점포가 적시됐다. 대규모 점포는 연면적 3000㎡ 이상의 매장이다. 도내 하나로마트 가운데 여기에 해당하는 곳은 없다. 

조례 제정의 근거가 된 모법 ‘지역사랑상품권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지역상품권법)이 고민을 안겨줬다. 지역상품권법에는 가맹점 등록 제한 대상으로 △사행산업 관련 △중소기업이 아닌 것 두 가지가 나와있다. 제주도가 중소벤처기업부에 유권해석을 의뢰했더니, 하나로마트는 비영리법인인 농협이 운영하는 것이므로 중소기업으로 볼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농협은 중소기업도, 그렇다고 대기업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등록 제한이 임의규정이라는 점이다. 제한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다른 지역을 살펴봤다. 지역상품권법은 올해 7월2일부터 시행됐다. 타 시도는 대부분 그 전에 지역화폐를 도입했기에 고심의 여지가 적었다. 농협 마트가 해당 지역 상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시도마다 다른 것도 고민을 깊게 한다. 

머리를 싸맨 제주도는 일률적으로 규제 혹은 허용 방침을 정하기 보다 매출액, 매장의 위치 등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는 방안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녕 을끼리 윈윈하는 해법은 없는 것일까. 양쪽 모두 한발씩 양보하는 건 대안이 될 수 없을까.

오늘의 고민은 분명 신해통공 때와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그래도 정조가 살아돌아온다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하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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