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켜본 박정희--장도영(I)
내가 지켜본 박정희--장도영(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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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장도영 컨넥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국가의 정체성'을 제기하며 불거진 그의 부친인 박정희에 대한 '사상전력'이 도마위에 올라와 있다.

'정수장학회'가 그의 부친이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부당하게 취득한 '장물'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장물장학회'란 별칭이 따라 붙어 박근혜의 '도덕성'을 강타하고 있다.

박근혜는 이게 바로 '연좌제' 부활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필자는 2000년 2월 김종필(전 중앙정보부장, 국무총리 역임)씨를 만났고 2001년 2월 장도영씨(5.16 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그리고 같은 해 3월에는 김윤근(5.16 쿠데타 주체, 당시 해병 김포여단장)을 만났다.

모두 박정희의 '정체'에 대해서 나름대로 증언들을 해 주었다.

장도영은 미국에 살면서도 아직도 '주체세력'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회고록 「망향」(2001년 3월)에 기록했으니 그것을 참고로 하고, 만약 의문이 있다면 그때 다시 인터뷰할 수 있다"며 5.16과 박정희 그리고 김창룡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망향」에 그려진 박정희와 장도영의 인연을 간추려 이곳에 소개한다. 그리고 내 맘속에 일고 있는 강한 의구심을 이곳에 공개한다.

장도영(대령)은 1949년 가을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선임 국장은 백선엽이었다. 그가 부임지로 간 곳에는 이미 박정희가 문관으로 전투정보과(과장 유양수 소령)에 근무하고 있었다.

장도영은 박정희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군내 좌익계 비밀조직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후 본인이 알고 있는 그 비밀조직망을 전부 조사관에게 보고, 그 보고에 의하여 군내 적색분자들이 일망타진되었고 박정희는 형집행이 면죄되고 소령으로 예편 되었다...그후 정보국장 백선엽대령이 그를 문관으로 채용하여 작전정보과장 유양수 소령을 보좌하는 일을 보게 하였다. 직제도 급료도 없는 자리였다(5.16 후에 출판된 여러 간행물 중에는 6.25를 전후하여 정보국의 모든 정보판단은 박정희 문관이 다 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는 과장이라기 보다는 왜곡이다)."

정보국장 장도영은 그 수하에 있는 박정희에 대해서 한시도 감시를 소홀하지 않은 면이 엿보인다. 즉, 그의 '사상전향'을 끝까지 의심하였다.

그러나 6.25라는 극한 상황을 통해서 박정희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6월 28일 육본은 한강이남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한강교는 국군공병대에 의해서 폭파되어 버려서 육본 멤버들은 각개작전으로 도강 수원에 집결하게 된다(김종필 증언, 김종필중위는 6.25 아침 육본 당직사관).

서울을 어렵사리 탈출한 장도영은 시흥으로 피난 나온 육본 정보국으로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 전황이 더욱 불리해지자 그들은 다시 수원(농업시험장)으로 후퇴하였다. 그는 내심 용산에서 헤어진 정보국원들의 행방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박정희도 끼어 있었다.

30일 오전 정보국에 들른 장도영은 박정희가 용산의 잔류장병들을 이끌고 거기에 합류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정보상황도 등 중요문서들까지도 깨끗이 보존해 가지고 왔다...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28일 새벽 서울에 진입한 적정으로 봐서 박 문관은 그가 원하였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나는 이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혹을 깨끗이 버렸다. 오히려 과거 그를 조금이나마 달리 생(각)하여 왔다는 것이 참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이었다."

그후 육본은 또 다시 대전으로 이동, 딘장군의 24사단 본부와 함께 충남도청에 합동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의구심을 떨쳐버린 장도영은 정일권 총장에게 찾아가서 "박정희 문관을 현역소령으로 복직시키자"고 건의했다. 재고끝에 박정희는 다시 소령으로 복직되었다.

전세가 계속 악화되어 육본을 다시 대구로 철수하였다. 대구로 이동한 뒤에 비로소 비교적 안정된 정상적인 정보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첩보요원의 선발과 훈련, 전시 후방 방첩업무 강화, 그리고 통신정보작업...이때 작전정보과장 유양수 소령의 일선 전출로 공백이 된 과장 자리에 박정희소령이 대행으로 대체되었다.

적의 공세가 대구 영천 한강 포항지구를 계속 위협하게 되자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를 대구에 남기고 부산으로 후퇴하였다.

9월 28일 서울 수복이후, 장도영은 준장으로 진급하고 서울방어를 위한 새로운 사단인 9사단이 창설되자 사단장으로 부임했으며 이때 박정희를 사단참모장으로 기용하여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다.

장도영은 정보국 근무활동이 가장 격무에 시달린 것이었다고 서술하면서 "거의 매일을 아침 6시까지 마포장에 사시는 신성모 장관에게 지난 24시간의 상황보고를 해야 했고, 또 중요한 보고가 있으면 신 장관과 같이 경무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해야 할 때도 종종 있었다"고 하였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기록하면서도 정보국 산하의 방첩대(CIC) 김창룡과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이름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았나보다.

2001년 2월 필자는 플로리다 올랜도 근교에 살고 있는 그(장도영)를 찾아가서 한국전쟁동안 일어난 각 형무소 정치범 처형 및 예비검속자 처형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발뺌했다. 김종필은 "그런 일은 김창룡이 다했다"고 했는데...(김종필은 당시 전투정보과 북한반 반장이었다).

"그렇다면, 김창룡이 다했습니까?"고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짧막하게 답하고 일체 입을 다물었다: "김창룡은 우리민족에 없었어야 할 사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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